역사의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야

말씀이 중요하다 해서
말씀만을 집중하게 되면
메마르고 건조함을 느낀다.
그러면 기도와 영성을 강조하게 된다.
기도하고 기도하다보면
영적 체험을 하게 되는데
거기에 집중하게 되면
무엇인지 빈약한 기초를 느끼게 된다.
 
개인의 영성과 구원을 강조하다 보면
사회적 영성과 공동체와 사회정의에 대한
갈증을 느끼게 되고
반대도 마찬가지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쪽과 저쪽, 저쪽과 이쪽을 
두루 경험하며 한 쪽의 논리와 생각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세계의 아름다움과
힘의 균형들을 보게 되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님의 주권,
도대체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알 수 있을까?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바울이 가지고 있는 로마시민권은
매번 로마인으로 하여금
그의 신분를 보장받게 된다.
빌립보의 감옥에서와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에서도 그는 특별한
신분을 확인받게 된다.
 
마치 암행어사출두를 외칠 때
그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눈빛을
이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여기서 궁금한 점은
바울은 사건의 초기에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 타이밍은 항상 바울에게
가장 유리한 지점만은 아니었다.
손해 보지 않을 타이밍에
아이템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의 적절한 타이밍.
복음을 전하는데 문제 없을..
 
나의 정당함을 매번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다.
바울에게 복음이 우선순위에 있었던 것처럼
내게는 무엇이 우선순위인가?

해서는 안되는 말의 내용과 상대

바울은 말해서는 안되는 
내용을, 말해서는 안되는 대상에게
말하고 말았다.
그것도 예루살렘이라는 장소에서.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찬동했던 바울이
이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에게 보낼 것이라는 말.(행22:20-21)
 
유대인에게 이방인들은
식사도 같이 하면 안될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가라고 말하는
예수님, 그리고 이제는 변절자인
바울을 이제는 가만히 둘 수 없는
유대인들 무리에게 바울은 말했다.
 
변하지 않을 이들에게
말하는 것까지가 
지금 바울에게 주어진 사명인가보다.
 
나는 너무 실용적이고 합리적으로
상황을 판단하려 드는 것은 아닌가?
이렇게 말하면
듣는 사람의 마음만 상할 뿐,
그리고 아무 변화는 없다는 말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아닌가?
 
바울은 최악의 장소에서
해서는 안되는 말을
해서는 안되는 상대에게
말하고 있다.

복음의 언어는 무엇인가

나는 같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부담스럽다.
혹, 앵무새가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같은 이야기가 아닌 다른 이야기가 없는게 아니다.
신대원 시절, 설교학 시간에 최고점수를 받았다.
새로운 말씀을 준비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가장 들려주고 싶은 메세지는 무엇일까?

내가 청년시절로 돌아간다면
가장 듣고 싶은, 혹은 필요한 이야기는 무엇일까?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는 필요하지만
방법론이 유효하기 위해서 필요한 내용은 무엇일까?
 
두려운 세상,
하나님은 과연 나와 함께 하시는가?
그 하나님이 지금도 여전히 일하시는가?

하나님이 여전히 일하시는 분이시고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며
두려운 세상 보다 크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전제해야지, 그 다음 걸음을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적부터 예수님을 믿었지만
초, 중, 고, 대, 청년시절, 어쩌면 지금까지도
예수님을 믿었지만 
그래서 의인이지만 당연하게도 죄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 괴리감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바울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에 도착하고, 
결례를 행하자마자 
유대인들로 인해 소요가 발발하고 바울은 체포당했다.
그는 막사로 들어가기 전에 천부장 루시아에게 
연설할 기회를 요청하고,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님을 전한다. (행22:1-11)
 
흔히 복음만을 전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복음이 제한되고 한정된 단어의 나열을 열거하는 것으로
협소하지 않다.
나에게 복음은 무엇이며
그들에게 필요한 복음의 방식은 무엇인가?
복음은 변하지 않지만
이 시대 필요한 복음의 언어는 무엇일까?

막대한 비용을 대는 이유

바울은 네 사람의 정결예식 비용을 댔다.
나실인의 정결례는 상당히 큰 비용이 든다.
숫양 두 마리와 암양 한 마리, 소제물과 전제물..
바울이 이런 비용을 댄다면
유대인들은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의 오해를
거둘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쉽지 않다.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많아지면서
그들은 여전히 율법에 열심인 사람이기에
바울에게 오해를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싶지만
해명한다고 이 문제가 
간단하게 풀어질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이방인은 유대인이 될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율법과 전통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 간단하지 않는 설명을 하는 대신,
교회 지도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바울은 정결예식의 비용을 대는 상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교회안에 이런 갈등과 오해가 얼마나 많은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다시 말하면 옳은 것을 택하기 위해
전심을 다하지만 결과적으로 양쪽이 피투성이가 된다.
주님의 마음이 무엇일까?
 
이 장면에서 바울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은
비본질에 대한 것이라면
자신이 대가지불을 해서라도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낮춘다.
물론, 이 일의 결과는 바울에게 위태로운
상황으로 흘러갔지만 말이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두로의 제자들,
가이사랴의 제자들,
그리고 아가보라는 선지자까지
바울에게 반복적으로 말한다.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가게 되면 당신은
고난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가지 마십시오.” (행21:11-12)

성령님은 그들에게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 
내다보게 했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한 판단은
둘로 나뉜다.
 
나는 은사를 가진 많은 이들을 만났다.
그리고 바울이 경험한 이 일을 
생각보다 많이 경험했다.
그래서 이 본문이 가지는 왜곡들을
잘 알고 있다.
 
문제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하나님은 부족한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 일하시기로 작정했다.
드러나 보이는 은사자가
모든 것을 판단해서는 안된다.
역설적인 상황은,
 
은사는 주신 감동을 그대로 믿어야 하지만
그것이 또한 정답은 아니다.
성령하나님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도구인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기준이 아니라면
내게 아무리 유익해 보이는 길이라도
분별이 필요하다.
 
바울에게 앞으로 일어날
고난과 핍박에 대한 예언은 
틀리지 않았지만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바울은 단순하게 결정했다.
주님의 마음을 따라 결정했다.
내 삶의 위태로움 앞에서
나는 무엇을 결정해야 하는가?
이쪽도, 저쪽도 답이 아니다.
주님의 인도하심과 음성이
답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기 때문이다.

너무 위험한 생각일까

#위험한생각 #내책임아니다 #이리떼와의싸움
“분명히 말하지만
여러분 가운데 누가 멸망에 빠진다 해도
그것은 내 책임이 아닙니다. ” (행20:26)

에베소 장로에게 바울이 말했다.
냉정하지 않은가?
몇 년을 함께 지낸 그들에게 
당신들이 멸망에 빠지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선을 그어야 하고, 구분이 필요하다.
내가 할 수 있는 몫이 있고
책임지지 못할 영역이 있다.
바울은 그들에게 헌신했다
하나님의 모든 뜻을 주저함 없이
그들에게 모두 전파했다. (행20:27)
이에 바울의 몫이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것은
바울의 몫이 아니다.
물론 휙 던져놓고, 받던지 말던지
그것은 내 소관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시대의 언어를 담고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미혹되지 않도록
전하는 것까지 바울의 몫이다.
 
하지만 그 이후는 그들의 몫이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전하라 말씀하신다.
다만 그들은 듣지 않을 것인데
그들을 돌이키는 것이 에스겔의 목적이 아니라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까지가
에스겔의 소명이다.
 
바울이 떠나면
교회는 흉악한 이리 떼가 교회로 들어올 것이다. (행20:29)
교회는 아무 싸움없이 평온한 상태의 목가적인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끊임없는 싸움이 있다.
하지만 주님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싸워 나가는 전쟁터와 같은 곳이다.
 
갈등없는 곳을 꿈꾸다 보니
가까이에는 갈등 없는 고상한 인격이 그리스도인의 완성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은 여전히 부족하기에, 부족한 자와의 만남속에는
불협화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지금 시대는 갈등을 만들지 않기 위해
최적화되어 있다.
거리를 두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유지하다가
결국 첫 번째 강하게 부딪히는 시기가 결혼이다.
나의 고상한 인격을 사정없이 부딪히는 곳이
가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해하게 된다.
너 때문에 천사같은 내가 괴물이 되었다.
아니다, 원래 괴물이었지만 잘 숨겨왔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결혼하기 전에 공동체를 통해 
수없이 부짖히는 시기를 경험하는 것,
그것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가난한 존재인지
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라는 위험한 생각을 해본다.

두렵고 부럽다, 그의 말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함께 한 이들에게 내가 당신들에게
이렇게까지 수고했고, 헌신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절대 말할 수 없는 말들이다.
하지만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그렇게 말했고
그들 또한 이 말들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바울은 자신의 서신서에서
자신을 본받아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제 이곳으로는 다시 오지 않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언제 그가 목숨을 다할지 모르지만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가지, 더욱 낯선 곳으로 들어갈 뿐
정들고 익숙한 이곳으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지만
동시에 성령님은 그곳에서 기다리는 것이 
고난과 박해라고 말한다.
언젠가 주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될거라고.
그런데, 거짓말처럼 이 말을 듣는 순간
원망이 아니라 
언제가 힘든 시간이지?
지금인가? 지금이 그때인가를 돌아보게 되었다.
바울은 비교할 수 없을만큼의 
고난과 박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주님이 말씀하셨기에
나는 제대로 가고 있는거라고 확신했을런지 모르겠다.
 
그는 말한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사명을
전하는데 있어서 내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자신의 생명보다 복음이 더 귀하기 때문.
시대적인 언어에 코드를 맞추는 것과
복음이 동일선상에 있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문화적인 것이 복음 위에 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내 생명보다 예수님이 귀한 분이기 때문이다.

그의 기록에 위로를 받는다

우리는 무교절 후 빌립보에서 배를 타고 (행20:6)
누가는 바울과 복음을 전하며 여행은 한다.
넘칠대는 파도위에서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의사출신 답게 세세하게 일정과 경로를 말하고 있다.
 
바울은 소요가 끝난 후
마게도냐로 떠났다.
누가는 행로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바울은 이 때를 생각하며 ‘살 소망이 끊어지고
사형선고를 받는 줄 알았다’고 말한다.(고후1:8-9)
 
그들의 위대한 여행을
다 말하기에는 지면이 너무 적다.
그 짧은 지면속에
유두고라는 청년 이야기가 서술된다.
다음 날 떠나는 바울은
밤중까지 강론을 계속했다.
당시는 주일이 쉬는 날도 아니었기에
일하고 온 무리들은 피곤하지만
집중해서 그 시간을 함께 했다.
 
청년 유두고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삼 층에서 떨어져 죽었다.
죽었지만 그는 살아났다.
마치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렸고
엘리사가 수넴여인의 아들을 살린 것처럼
바울은 그에게 엎드려 안았다.
큰 슬픔이 큰 위로가 되었다.
 
나는 궁금하다.
당시의 모습을,
땀내 나는 그들의 모임.
죽었다가 살아난 청년,
그리고 날이 새기까지
다시 말씀을 강론하는 모습.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생계에
지쳐있었겠지만, 그 속에 어떤 희망일까?
 
생명 앞에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이 값주고 사신
영혼의 가치앞에 모두는 위로를 얻는다.

데메드리오의 의도를 군중은 알지 못한다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동종업계의 사람들이 외부인들의 영향으로
업종을 변경하게 되었고 이 무서운 경제적 타격은
곧 자신에게도 들이닥칠 것 같았다.
지금의 금융중심지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때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똑같은 일이 에베소에서 벌어졌다.
은세공업자로써 아데미 여신의 은모형을
만드는 사람으로써 관련 업계의 중심이 되는
데메드리오라는 자가 이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마술사 그룹이 자그마치 5만 드라크마의
직무와 관련된 도서를 불에 태워버린 사건은
곧 신상을 제작하는 업계로 불똥이 튈지 모른다.
그래서 군중을 모아 외쳤다.
“아데미는 위대하다!
에베소 사람들의 아데미 여신은 위대하다!” (행19:28)
거의 두 시간을 소리쳤고, 도시는 순식간에
온통 수란스러워졌다.
 
재미있는 사실은
외쳐 소리지르는 이들중 태반은
왜 모였는지도 알지 못했다. (행19:32)

여기서 기억해야 할 점은

많이 모였다는 사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는 뜻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조금 더 발전하면
시대의 언어를 이해해야 하지만,
시대의 언어이기에 옳은 일은 아닐 수 있다.
예를 들면 권위에 대한 반기를 드는 시대는
지금으로써는 옳을 수 있지만
10년 전과, 혹 10년 후에도 옳은 것일까?
답은 알수없다. 이다.
 
그리고 많은 수가 긍정하는 일이
진리인가? 에 대한 질문에도 
알수없다.가 답이다.
성경의 많은 경우, 특히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간을 살펴보아도
진리의 싸움과 다수결의 싸움은 조금 구분된다.
 
그리고 이 모임의 핵심은
모인 사람들은 알지 못하지만
데메드리오의 의도이며
그의 의도는 자신의 생계. 곧 돈이다.
믿음에 대한 문제와 맘몬과의 싸움이지만
군중에게는 가려져 있는 싸움이기도 하다.

주문이 아닌 능력이다

5년 전에 집에 더이상 책을 둘 때가 없어서
읽지 않는 책을 모아서 알라딘 중고서점에
팔아버린 적이 있다.
그때 100여권의 책을 팔아서 10만원 조금 넘게
돈을 받았다. 그 돈으로 외식도 하고..
 
마술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책을 모아 사람들 앞에서
불로 태워버렸다.
그 책의 가격은 모두 5만 드라크마 정도였다.
1드라크마가 장정의 하루 품삯이니
내가 알라딘에 팔고 받은 책값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거금이다.
 
돈은 하나의 권위이며 권세이다.
또 하나의 능력인데 자신의 존재이유와 같았던
마술책을 파는 행위, 그것도 사람들 앞에서
불 태우는 행위는 하나의 행위예술이자
믿음의 고백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 일의 시발점이 있었다.
에베소에서 바울을 통해 특별한 기적이 있었다.
물론 성경은 그 특별한 기적이 하나님으로 부터
말미암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행19:11)
심지어 바울의 몸에서 천조각 하나라도 가져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래서 마술하던 사람,
그 중에 대표적인 유대 사람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했했다.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령한다.”
여기서 명령하다라고 표현한
원어’호르키조’는 부탁한다. 애원하다에 가깝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애원하고 부탁했다.
 
악한 영이 대답했다.
“내가 예수를 알고 바울도 안다.
그런데 너희는 누구냐?”
악한 영에 빠진 사람이 그들에게 달려들어
힘으로 눌러 이겨서
스게와의 아들들은 발가벗겨진 채 피를 흘리며
집 밖으로 도망쳐 나왔다. (행19:15)
말 그대로 수치와 망신을 당한 것이다.
 
이 부끄러운 사건이 바로 마술사들을
예수님께로 돌이키는 시작점이 되어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두려워함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자신의 악한 행위를
공개적으로 고백했다.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 능력 앞에
마술사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권세를
내려놓고, 불태우고
주님의 권세를 가시적으로 드높였다.
 
부끄러움과 수치스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을 통해 주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다.
예수님의 이름은 하나의 주문이 아니다.
주술로써의 도구적 존재가 아니라
그 분 자체가 주권적인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