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것과의 결별

이제 바울은 제자를 길러내기 시작했다.
그가 만나는 세상은 제한되었지만
그가 기른 또 다른 사람들이 만날 세상은
보다 열려져 있다.
그 세계가 지금 내가 서 있는 곳까지
이른 것이다.
바울은 두란노서원에서 
2년 동안 날마다 가르쳤다.
 
나는 혼자 움직이는 것을 좋아한다.
행정과 조직이 미숙하고 불편한대다가
후원을 요청하는 것도 부담스럽다.
기질때문에라도 혼자 움직이고
혼자 책임지는 편이 수월하다.
하지만 그렇게 만나는 세상은 좁다.
만일 주님이 내게 또 다른 
무언가를 말씀하신다면
나는 내 선호를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따라 걸어야 한다.
 
바울은 그를 비난사는 사람들과
싸우는 것을 그만두고
또 다른 사역으로 전환한다. (행19:9)
자기 변명을 그만두는 일은
용기가 필요하다.
군대 입대할 때 주님이 내게 준 미션 하나가
바로 나의 정당함을 포기하는 일이다.
마땅한 자기 변명을 포기하는 대신,
바울은 두란노서원에서의 사역을 시작했다.
 
익숙한것과의 결별. 이라는 
유행했던 책이 있다.
주님이 원하시면
나는 날마다 익숙한 것과 결별해야 한다.
 
 

많은 유익을 줄 수 있는 사람

복음에는 다양한 측면이 있다.
넓은 스펙트럼이 있고

사람에게는 한 가지,
혹은 몇 가지의 단면만 볼 수 있다.

내가 가진 기질과 성격이 희귀해서
그것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을 가끔 생각한다.
하지만 이또한 전체가 될 수 없으며
무척 작은 단면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에베소로 넘어오며
그와 함께 오랜시간을 사역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함께 동행했다.
에베소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하기를 청했으나
바울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거절할 수 있는 용기, 필요하다.)
왜냐하면 바울은 다시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대신 아굴라 부부가 그 자리를 맡았다.
 
그곳에서 부부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석학인 아볼로를 만난다.
아볼로는 요한의 세례.
곧 주의 길을 예비하라, 곧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이 진리만 알고 있었다.
그에게 예수님을 가르쳤고
아볼로는 바울과 아굴라부부가 떠나온 자리인
고린도 교회를 찾아가믿는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다. (행18:27)
 
바울과 베드로만 유익을 주는게 아니다.
지금까지 진리를 알지 못했던 아볼로도
누군가에게 많은 유익을 줄 수 있으며,
그 시작점에는 아굴라 부부의 수고가 있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고린도에서 함께 동행했던 시간이 있었기에
그 다음 사역, 그 다음 은혜가 있다.
 
지금 내다볼 수 없는 시간,
내게 주신 오늘의 순종과 만남.
그것이 중요한 이유.

말해야 할 때, 잠잠해야 할 때

바울은 이례적으로 고린도에 오랫동안 머물렀는데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주님의 말씀이었다.
지금 나의 상황, 우리의 상황이 어떤지는
다 알 수 없지만 갈등 가운데 멈추어야 한다면
또는 이동해야 한다면, 결정해야 한다면
주님의 말씀이 하나의 근거가 될 것이다.
 
어느 날 밤에 주님은 
환상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 말라.
잠잠히 있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다.
 
이 말씀은 우리의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것이기에
직접적으로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대로 가지고 와도
문제 없을 내용도 있다.
 
두려워 말라.
이 말씀의 근거는
내가 너와 함께 있다.
곧 임마누엘에 대한 약속이며
동시에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주 언급하셨던 말씀이다.
 
내가 두려워 말아야 하는 이유는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잠잠히 있지 말고 말하라.
왜냐하면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고린도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반대로 잠잠히 있어야 할 때는
홍해앞과 여리고 싸움 직전이다.
말해야 할 때와 잠잠해야 할 때가 있다.
그렇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에 귀기울여야 한다.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 또한 중립적이다.
땅에서의 생명으로 국한한다면
이미 세례요한도, 사도 야고보는 목베임을 당했으며
그리고 많은 사도들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영원한 생명을 해치지는 못한다.
나는 어느 나라 국적을 가졌는가의 문제이다.
 
두려워말라.
이제껏 핍박 당해서 생긴 트라우마가 
있을 수 있지만
주님 말씀하시면 순종할 의지와 여지를 가지는 것,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생각해야 할 점!!

오래 머무른 이유

바울은 고린도에서 1년 반을 머물렀다.
다른 곳은 전도를 하다가 핍박을 당하고
급히 이동하느라 바빴는데
이 곳에서는 긴 시간을 머물렀다.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은 동역자를 만났다.
그들과 함께 텐트를 만들며
긴 시간동안 머무를 준비를 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난 후 바울은 그의 서신마다
그들을 언급하며 호의를 표한다.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하다.
인생의 동반자, 인생의 동역자.
 
실라와 디모데가 마케도냐에서 내려오자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다.
붙잡혀 라는 말은 완전히 지배당하거나
사로잡힌 상태를 말한다.
실라와 디모데라는 기댈만한 대상도 중요하다.
 
얼마전 터키선교사와 만나 이야기한 것처럼
무슬림의 지도자들은 흔히 생계를 위해
일을 하고 있다.
그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터키에 있는 기독교지도자들이
생계활동 없이 종교생활하는 것을
업신여긴다고 말한다.
말그대로 팔자 좋다는 말을 한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랍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바울이 텐트메이킹을 하는 게
특별한 모습은 아닐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은 그렇게 수고하지만
다른 사역자들에게 있어서는

자신과 같지 않아야 함을 말한다.

고린도에서 바울이 오래 머문 이유를
여러 가지 추론해 볼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이 성에 당신의 백성이
많기에 머물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아침마다, 밤마다
묵상한 내용의 일부를
나누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이곳에도 주님의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나의 작은 순종으로..

시간의 거룩함 앞에서

아테네의 아르테논 신전이 있는
언덕, 아레오바고에 서서 바울은
에피쿠로스 철학자들과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예수님을 전한다.
 
같지 않은 두 철학에서 
각각의 접촉점을 찾아가며
예수님을 전한다.
 
내가 진심을 말하는 것으로
만족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예수님을 전한다.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실 분도 아니요.
사람이 손으로 지은 신전안에 계시지도 않는다. (행17:24-25)
하나님은 누구인가?
하나님은 누구인가?
 
언젠가 조나단에드워드의 첫번째 논문의 주제
천지창조의 이유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수많은 논증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자기 자신의 영광. 
우리가 이해하거나 다가가지 못할 그 완전함.
 
바울은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었지만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은 조롱하였고
어떤 사람은 다시 듣고 싶다고 했다. (행17:32)
누군가는 바울의 실패한 설교라고 평하지만
순종. 그 자체가 성공이다.
 
그저 떨어진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는 것이 바울의 목적이 아니다.
사나 죽으나, 무엇을 먹던지 마시던지.
시간의 거룩함앞에 순종한다.

첨단도시 아테네

나는 무엇에 분노하는가?
나는 공평하지 못한 것,
또는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처럼 대하는 것이 속상할 때가 있다.
이 말은 전통과 전통주의
권위와 권위주의의 혼돈과 같은 말이다.
분노는 좀처럼 하지 않기에
속상하면 꽤나 발전된 형태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우상으로 그 도시가 가득 찬 것을 보고
매우 격분했다. (행17:16)
성경은 합리와 실용등 또는 인격과 공평보다
더 우위에 두는 것이 있다.
 
십계명의 첫 번째가 그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
그 외를 사랑하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다.
아테네 뿐 아니라 내 안에도 가득하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것으로 충만하기 까지 하다.
아테네에 있는 사람들, 이방인까지
그 곳은 온갖 새로운 것들을 

탐닉하기에 최적화된 도시다. (행17:21)

우리는 새로운 것, 멋진 디자인, 감성적인 것에
열광하고 있다.
나는 어디에 열광하고
어디에 분노하고 있는가?
이 싸움은 꽤 외로울 것이다.
왜냐하면 시대의 흐름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긍정하는 가치에
비껴선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외침을 기억하라.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이 이곳에 왔다” (행17:6)

천하를 어지럽힐 복음

복음은 엄마의 자궁안 생명과도 같다.
데살로니가에서 바울 일행이 머문 기간은
고작 세 번의 안식일, 20 여일 동안이다.
하지만 성경 데살로니가 전후서가 
그 이후 이들을 위해 쓰여졌다.
 
고민하게 된다.
지금같은 교회의 형태,
그러니까 열심과 신앙이 있다고
말하는 수준의 시스템은 오래 되지 않았다.
종교개혁을 거치고, 모더니즘을 통과하며
지적이고 사유적인 형태의 색을 띠게 되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보다 역동적이다.
그리고 그들의 삶 가운데 있다.
연구자료를 살펴보면
전도자들 이외에는 일상 속에서
그들의 삶을 복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컨퍼런스를 자주 참석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선포되는 메세지들마다
불편한 구석이 있다.
옳은 것 같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인가
 
다윗은 그의 수많은 시편을
전쟁터에서 지었다. 삶의 고비속에
여전히 일하시는 주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불량한 사람들을 모아 성을 뒤흔들었다.
그들이 문제 삼은 부분은
오해가 섞여 있지만 본질적인 지적이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에도 왔다. (행17:6)
가이사가 아닌 다른 임금 곧 예수. (행17:7)
오해가 있지만, 그들도 복음의 메세지를
들었다. 기억해야 한다.
 
겨우 몇 년이 되지 않았지만
그리고 앞으로 수세기에 걸쳐
이들은 정말 천하를 어지럽힐 것이다.
그 중심 이유는 가이사가 아닌
바로 예수가 왕이기 때문이다.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지만
결과가 대단하지도 않고
어려움까지 당하고
더욱 궁지에 까지 몰리게 되었다.
 
마게도냐 환상으로
내 계획을 내려 놓았지만
자주 장사 루디아를 만났고
귀신 들린 여종을 자유케 한 뒤
무리들에게 핍박 당했다. (행16:19-40)
 
제대로 되는 일 하나 없다.
그런데, 진리 위에 서지 않으면
진리가 잘못된 것처럼 생각한다.
과연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우리는 인생을 잘못 알고 있는게 아닐까?
다 잘 되어야 하는데,
SNS 상의 사진과 이야기를 보면
다들 잘 되는 것 같은데
나만 이런거 아닌가?
 
그제 강의중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공감한 게 이런 내용이다.
‘아. 나만 문제가 있는게 아니구나.’
우리 인생에 문제는 가득하다.
하지만 문제 가득한 감옥에서도
주님은 나와 함께 계셔서
그 곳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한다. (행16:25)
그리고 그 기도와 찬송을
죄수들이 들었다.
 
큰 지진이 났다.
모두가 도망했다.
하지만 이들은 그대로였다.
이들에게 감옥안이나 감옥바깥이나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가 가장 역설적인 것은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자였기에
감옥에서 가장 합법적으로
나올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감옥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이다.
 
일부러 고통 당할 필요는 없겠지만
고통 당하는 그곳에도
주님은 함께 하신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주 예수 계신 곳이 하늘나라다.

빌립보에서의 대가지불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통해
자신의 기존 계획을 접고 빌립보로 향했다.
하지만 그들이 만난 이는 루디아라는 옷감장수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여는 열쇠는 
한 사람이라 믿는다.
그 한 사람을 통해 당신의 나라를 빚어가신다.
 
한국교회가 이 코드를 
읽지 못하면 수 많은 사람들을 모으는
물량공세에게 집중하게 될 것이다.
 
 
귀신들린 여종이 하나 있다.
그는 주인에게 많은 돈을 벌어다 준다.
그는 바울과 일행들에게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소리쳤다.
옳은 이야기가 아닌가?
하지만 옳은 이야기, 그리고 우리에게 유리한
메세지면 다 괜찮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바울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했을때
귀신이 그 아이에게서 나갔다.
그리고 주인은 큰 돈을 잃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영적 해방을 맞게 되었다.
기억해야한다.
신자본주의 시대에 참 자유가 무엇인가?
돈이 많은 것이 자유라고 말하는 시대에
돈을 잃더라도 우리 안에 참 빛이 임하는 것,
그래서 어두움이 떠나가는 것
그로 인한 대가지불을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

모든 것이 자유하지만

바울의 선교는 원칙이 있었다.
유대인의 회당에 먼저, 그리고 그들에게 배척을 당한 후
이방인에게 향한다.
그는 디모데와 함께 선교하기를 원했다.
디모데는 유대인이었지만 (유대인은 모계 혈통을 따른다)
그리스 사람인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할례를 하지 않았다.
 
 
구원의 자격과 조건과는 전혀 상관없지만
그는 전도 대상자를 위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다.
모든 것에 자유하지만, 모든 자에게 종이 되려는 것이다.
 
 
디모데에게 행했던 바울은
그리스인 디도에게 할례를 행하지는 않았다.
이것이 구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에게도 이를 스스로 증명해냈다.
 
 
바울은 실라와 함께, 그리고 마지막에 합류한
디모데와 함께 선교를 떠났다.
하지만 성령은 그들의 행로를 막으셨고
결국 밤에 환상으로 유럽 지역으로 갈 것을 말씀하셨다.
나는 다시 디모데를 주목한다.
아직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바울이 죽고 난 뒤 초대교회를 이끌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디모데에게 이런 시간들은 어떻게 이해되었을까?
 
 
 
선교. 그 자체가 목적인가?
세를 불리는 것 자체가 목적인가?
그럴수도, 아닐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음성에 귀기울이고
그렇게 순종해 가는 것.
외부적으로 크고 대단한 사역을 할 수 있지만
도르가처럼 주변에서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이 사역일 수 있다.
내부적으로 그는 끊임없이 주님의 주되심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죄인중에 괴수,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은혜, 용서.. 같은
가치들이 자신의 안에서 먼저 생수가 되어 넘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