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선택이 옳은가?

갈등과 반목은 분명히 부끄러울 수 있다.
위안이 되는 것은 이조차 하나님 안에서 재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야곱과 그의 두 아내의 갈등과 반목, 그리고 그들 가운데 태어난 아들들.
한 가정안에 시기와 질투가 가득했고
문제의 당사자였던 야곱은 끝까지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의 갈등을 통해 이스라엘 12지파가 만들어졌다.
 
바울은 마가의 일로 바나바와 심하게 다투었고 (행15:37-39)
이 일 자체를 성경은 전혀 미화하려 하지 않는다.
성경은 이 두 사람을 신화적 인물로 만들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복음으로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지만
서로의 관점을 중심으로 옳고 그름이 대결하면
심각한 파열음을 내며 갈라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서로 나뉘어 선교를 떠났다.
바울은 바나바 대신 실라와 선교를 떠났고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바울을 중심으로 성경을 기록한다.
하지만 바나바는 지난 실수에도 불구하고
다시 마가를 품어 주게 됨으로 다시 기회를 준다.
성경이 이들의 시간을 다 기록하지는 않지만
후에 바울은 그의 마지막 성경에서
마가 요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바꾸어
그가 자신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 말한다. (딤후4:11)
 
사람은 어김없이 변하지만
그 변화는 마가 뿐 아니라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시간이 걸린다.
이 시간을 기다려 주어야 하는가?
동시에 기다리는 동안 소모해야 하는 시간도 있다.
그 시간에 함께 있는 자의 시간은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동시에 기다리지 않고 먼저 달려간 자의 시간 또한 가치있다.
 
누가 누구보다 낫다는 판단은
결국 자기 기준과 관점의 차이일 뿐이다.
갈라서 보이더라도 여전히 주님 안에 거하는 것,
시간이 더해지면 주님앞에 섰을 때 어느 지점에 서있는가?
내 마음의 방향은 어디를 향해 있는가?
 

본질과 비본질, 옳고 그름의 문제에서

나는 자주 본질과 비본질을 나누어 생각한다.
이것은 본질, 그렇지 않은 것은 비본질.
우리가 본질이라 믿고 있는 것들중에
그렇지 않은 것들은 생각보다 많다.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지금의 예배의 순서와 형태는 은혜롭지만
그렇다고 다른 형태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것도 아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그리고 종교개혁을 거치고,
영미권 선교의 흐름에 따라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전의 모습을 띠게 된 것이다.
 
어쨋든, 생각은 단순하게 정리할 수 있지만
삶에서 적용할 때는 그렇게 단순하게 나눠지지 않는다.
적용할 때는 차라리 본질과 비본질 보다는
상대방이 시험에 들지 않는 수준을
맞추는게 좋다는 기준을 가지고 있다.
 
“너희는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 (행15:28)
이 말은 너희는 유대인이 될 필요는 없다는 말과 같다.
구원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구별되지 않는다.
하지만 유대인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구원과 관계있지는 않지만
유대인들은 여전히 할례를 받았다.
 
이 지점이 기억해야 할 점이다.
구원에 속한 문제가 아니기에
모든 것이 비본질적인 것이고
그래서 의미없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비슷한 이유로 야고보를 포함한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두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그 중 한가지가 앞서 이야기했던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나머지 한 가지는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명했다.
이는 당시 이교도 제사와 관계 되지 않음으로
시험에 들지 않게 함과 동시에
기존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전에 우리가 행하는 습관과 전혀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닌 점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이 자유로울 수 있지만
스스로 자유를 누리지 않을 지점은
예수님이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너희도 이같이 하라.
무엇이 옳고 그런가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쫓으며 살아야 한다.

전에 멀리 있던 우리를

사울에게 다메섹의 회심과 같은
주님과의 극적 만남이 아니었으면
그또한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이방인에게 할례와 모세율법을 지키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 말은 할례와 모세율법을 지켜온
1500여년간의 그들의 역사의 무게를
생각해야만 한다.
하지만 복음 앞에 자신들의 경험과 생각을
분명하게 묻고 다시 서는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얼마전 안동에서 만난 이상동 장로의 이야기.
그는 자신의 아들이 가져온
성경을 읽고 복음 앞에서 자신을 새롭게 만들었다.
종들에게도, 자신의 옛습관 앞에서도, 감옥에서도..
 
쉽지 않지만, 복음앞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오랜 혈통의 문제는
신분과 높고 낮음, 남자와 여자. 수많은 문제들이
새롭게 정의되었다.
 
사람의 인식은 당대 문화를 뛰어넘기 힘들다.
오랜시간 젖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음이 내게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셨던 것처럼 이방 사람들에게도 성령을 주셔서
그들을 인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믿음으로 깨끗하게 하셔서
우리와 그들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으신 것입니다.” (행15:8-9)
 
성령을 주셨다는 말은
곧 하나님의 임재를 말한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신 것. 그것으로
우리는 주 예수의 은혜로 받은 구원을 증언할 수 있다.
하나님이 계신 것보다 크신 증거가 무엇인가?
 
성령님이 계신 그 마음을 믿음으로 깨끗하게 하셔서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우리를 가깝게 하셨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는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왜 우리를 택하셨는지?
과연 이런 나를 통하여 어떤 일을 하실지에 대해..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전에 멀리 있었던 나를 부르셨고
내 안에 거하심으로 이제 나를 깨끗게 하셨다.
곧 나를 사랑하셨고, 사랑하시며, 사랑하실거라는 사실이다.

이 믿음에 머물라

말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는 삶에 능력있고
사는 것을 말하는데
주님은 기름부으신다고 믿는다.
 
많은 이들이 말을 하지만
그 말은 진실이지만
사는 삶이 없으면
그들의 말이 허공을 떠돈다.
말을 줄이고 살아야 한다. 복음을.
이 믿음에 머물러 살아가야 한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낫다고
다윗은 광야에서 고백하고 있다.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 사람들이
바울을 돌로 쳐서 도시 밖으로 끌어냈다.
하지만 바울은 일어나서
다시 도시 안으로 들어간다. (행14:19-20)
그의 무엇이 생명보다 나은가?
그의 생명보다 주 예수의 복음.
 
그는 아마도 피투성이로 다시
도시 안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강하게 하고
늘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면한다. (행14:22)
 
죽을만큼 돌로 쳤지만
돌로 친 곳으로 다시 돌아온 사람.
그리고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
제자들은 그의 말을 따라
마음을 강하게 하고
더욱 믿음에 머물러 있기를 힘쓰는 풍경..
주님으로 살아가는 풍경..

보이지 않는 싸움

1. 사람들은 눈 앞에 기적이 있다면
예수님을 믿겠다고 말한다.
이고니온에서 표적과 기사가 있었다.
하나님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그런 능력을 행할 수 있게함으로
은혜의 말씀을 확증해 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도시 사람들은 두 편으로 갈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으로 나뉘었다.
보지 못하지만 믿는 사람이 있고
보았지만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스라엘 광야 속에서 그것을 충분히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고통하는 시기에
과연 주님은 침묵하고 계셨는가?
끊임없이 선지자와 예언자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보이지 않지만, 하지만 보는 것보다 더 가득
주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길 원합니다.
 
2. 짧은 문장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서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이동한다. (행14:1-18)
이동할 때 키워드는 복음과 핍박이다.
핍박이 있어서 그들은 피했지만
동시에 피한 곳에서 다시 복음 전도가 시작되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거리를 두고 읽는 이유는
본문이 말하고 있는 박해현장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예수님을 전한다고 해서
돌로 치려 하는 무리는 없다.
다만 신자본주의 시대의 물결 앞에서
복음을 전하거나, 돌로 치려 하는 대신
모두 생계에만 몰두한다.
 
당연하고 상식적은 이야기지만
믿음은 어떤 영역인가 생각한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답은 각각에게 다르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서
사단의 세력은 이 시대의 흐름에 대해
아주 흡족해 하고 있지는 않을까?
며칠전 수련회에서 사진으로 강의를 풀어 나갈 때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돈과 명예와 좋은 대학과.. 이렇게 모두가
몰두하는 가치 이외에도
주님이 주목하고 있는 가치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가치가 맘몬 아래에 눌려져 있다.
스며드는 세력들, 위협들, 믿음과의 싸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보고 있어야 한다.

마음에 합한 자

이제 바울이 전면에 나섰다.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의 변화는 급박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변화라기 보다는 깨달음에 가깝다.
왜냐하면 오랜동안 사람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생각과 습관들을 바꾸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하다.
 
바나바의 도움을 받았고
그의 요청으로 안디옥에서 사역해왔던 그들이
이제는 새로운 사역을 시작했고
그 사역의 변화를 누가는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변화
아이들의 변화
공동체의 사람들..
우리에게 주어진 많은 이들의 변화는
말 그대로 시간이 필요하며 
품고 기다려 줄 사람이 필요하다.
 
자신의 신앙이 완고한
철저한 자기 논리로 무장한 사람과
며칠전 논쟁을 벌인 일이 있다.
그러다가 내가 뒤로 물러섰다.
싸움은 끝이 날 것 같지 않았고
만약 내가 이긴다고 하더라도
상대는 논리나 이야기에서 졌을 뿐
자신의 믿음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리 없기 때문이다.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상대가 주님을 만나고, 주님 안에 변화되길 바란다면
차라리 시간이 필요하겠다 싶었다.
 
바울의 설교 중
다윗을 소개하는 문장으로
내 마음에 합한 자라는 표현이 나온다.
다윗을 보고 기뻤던 하나님.
그래서 그에게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게 하기 위해
기름을 붓는다.
하지만 그 당시 다윗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그는 그저 아무것도 내세울게 없는
가장 가까운 이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던 막내였다.
그랬던 그를 어떻게 주님은 주목하셨는가?
 
양을 치던 어린 목동.
그의 시간을 상상한다.
오답을 지워내자면
내가 가진 자격이나, 소유하고 있는 것들
사람들의 평판과 명예..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외모와는 다른 기준을 주님이 가지고 계신다.
특정하기는, 일상의 태도와 그의 마음의 방향이다.
일상의 태도, 곧 반응과 믿음에 관힌 이야기가 아닐까?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안디옥 교회는 예배드리며 
금식하는 일도 일상이었던 것 같다.
금식하던 때에 성령님은 사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워서 맡길 일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반응했다.
원어에는 ‘토테:바로 그때’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성령님의 말씀에 즉각 반응한 그들의 태도를 말하고 있다.
 
주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그 시간.
나는 바로 그때 주님 앞에 반응해야 하며
주님이 말씀하시는 시간은 흔히 내가 주님과의 
깊은 사귐의 시간이거나, 중요한 지점일때다.
그 일상의 때, 이 본문을 읽으며 
금식에 대한 마음을 생각한다.
 
워낙 자유로운 사고를 가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적인 감각을 절제함으로
삶을 단순한 형태로 바꾸고, 주님의 신호에
민감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중요한 지점에는
악한 영의 공격 또한 거세어 지기 때문이다.
 
구브로(키프로스)라는 섬에서
그는 그 땅을 통치하는 서기오바울을 만나게 된다.
그는 진리에 대한 사모함이 있는 사람이었고
그 지역의 선교전략에 주요 인물이기도 했다.
이에 바예수라 하는 유대마술사가 사역을 방해한다.
바울은 성령충만하여 그를 대적했다.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행13:11)
 
주의 손이 우리에게는 힘과 방패가 되지만
동시에 주의 손이 대적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주의 손이 우리에게 있을 때도 여전히 현실의 어려움이 있지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요16:33b)
승리는 오늘과 내일이 아니라,
이미와 아직의 문제이다.
결국 믿음의 문제이다.

실패가 아니라 과정이다

1. 로데의 이야기를 다룰 때
짝을 이루는 예화가 있다.
그리고 이런 패턴의 예상되는 결론은
어딘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본문의 내용은 이렇다.
베드로가 탈옥 후
마가의 다락방 문을 두드렸을 때
사람들은 베드로가 살아 돌아왔다는
로데의 말을 믿지 않았다.(행12:15)
 
이 본문에 짝을 이루는 예화는
흉년에 비가 내리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우산을 가지고 온 사람은 아이 한 명 뿐이더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감옥에 갇힌 베드로를 위해 기도했다.
간절히 기도했지만 그가 마가다락방으로
정말 돌아올는지는 모르지 않았을까?
우리는 그들의 기도의 내용을 모를 뿐 아니라
주님이 이루실 뜻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상황에서 야고보는 죽임을 당했지 않은가?
나는 성경을 보고 이 상황의 결말까지 전지적시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아직 경험치가 없는 사람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언젠가 하나님은 내게 가르치시셨다.
답과는 거리가 먼 자신만의 답을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치를 넘어간 이유로
더이상 그림 그리지 못하기에 틀렸다고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상황을 믿음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가혹하지 않은가?
그들은 이런 시간을 통해 배우게 된다.
강조점을 실패가 아닌 과정에 찍을 수 있다.
 
사도행전은 신화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당연하게도 교회 구성원의 불명예스러울 수 있는
이 상황을 적어 놓았다는 말은
전략적인 진술이라는 예상도 하게 만든다.
동시에 예수님이 죽으신 후 부활하셔서 사람들을 만나신 것처럼
예수님의 수제자이자, 교회의 수장이었던 베드로도
죽임 당한 후 그의 천사로 자신들을 방문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베드로의 기도로 중풍병자 애니아를 고쳤고
죽었던 도르가도 살아났을 정도로
그의 행적이 예수님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아직 신학적 토대가 만들어지지 않은 당시는
모든 것이 처음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쨋든, 다행스러운 것은
지금 우리의 모습을 투영하는 듯한
당시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부족하고
불완전한 기도를 통해
주님은 당신의 일을 이루셨다는 사실이다.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순종하여 드리는 기도 마저도
주님이 받으시다.
그것은 믿음 없음을 꾸짖을 것이 아니라
실날같이 작은, 겨자씨 같은 믿음과 순종을 기뻐해야 할 일이다.
 
 
2. 세례요한, 야고보.. 하나님의 사람들을
여럿 죽인 헤롯은 결국 교만이 원인이 되어
주님이 치신다. (행12:23)
 
작은 유대땅 구석을 통치하는 왕은
자신이 마치 신이 된 것처럼 기고만장했다.
헤롯이 아니어도, 자기 동네의 골목대장이 되어도
기세가 하늘을 찌를 수 있다.
얼마전 행사에서 시의원들을 여럿 만났다.
충격적일만큼 사람을 무시하고
으시대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모든 옷을 벗은 후, 모든 타이틀을 벗은 후
우린 누구여야 하는가?
나는 누구여야 하는가?
 

탈옥에 성공했지만 이제는 수배자

인생에 풀 수 없는 문제들이 가득합니다.
하나님 언제까지 입니까?
우리의 인생은 어디를 향해 갑니까?
당신은 왜 무능력한 분처럼 침묵하십니까?
 
헤롯은 세례요한을 참수하고
야고보를 참수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반응을 살핀 후 그들의 호응에
이제는 베드로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
 
절대로 도망가지 못할 상황,
네 명이 한 조가 되어
네 개의 조가 베드로를 지키도록 했습니다.
절대로 풀지 못할 인생의 감옥.
 
예수님을 믿는데 그는 곤경에 빠졌으며
더더구나 교회의 수장이 내일이면 죽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기도와
주의 천사가 상황에 개입하여
그는 드라마틱하게 살아났습니다. (행12:1-12)
 
천사는 갇힌 베드로에게
“급히 일어나라”고 지시하고는 그의 탈옥을 이끕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셨다면
급히 일어날 게 뭔가요?
그냥 느긋하게 움직여도 되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그 상황에 구체적으로 지시하십니다.
우리의 만남, 일, 기다림. 이 모든 인도에는
그 분의 질서가 있습니다.
언제든 멈추고, 언제나 절제를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특별히 원하시는 주님의 때가 있습니다.
그 때를 놓치면 그 순간은 오지 않습니다.
 
오늘 새벽처럼 주님이 내게 ‘급히 일어나라.’ 말씀하시면
그 곳이 어디건, 죄 가운데 이건, 일 가운데 서건, 쉼 가운데 서건
우리는 일어나야만 합니다.
일상 속에 그런 시간이 쌓여야만
주님과 호흡하며 걸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내가 알지 못하는 지점에 있습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감사하게도 이제는 죽음. 그 두려움의 대상이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죽음 보다 크신 분, 죽음 보다 사랑하는 분이
그의 안에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리운 예수님앞에 얼굴과 얼굴로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하지만 오늘이 아니었습니다.
천사가 찾아온 날은 죽게 되었다고 생각한
바로 전 날 밤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시간을 알지 못합니다.
 
탈옥에 성공했으니
하나님이 그를 구했으니
이제 그는 두려움 없이 거리를 활보해도 되는 걸까요?
하나님이 일하시기에
우리는 아무 거리낌 없이 살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일하심에도 불구하고
야고보는 칼로 죽임 당했습니다.
베드로가 잡혔을 때처럼 야고보가 잡혔을 때
교회는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주님과의 동행이 나를 구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아침이면 수배자가 되어 피해다녀야 하며
여전히 생명의 위협이라는 현실 앞에서
믿음과의 교차점을 찾아 고민하며 걸어야 합니다.
 
탈옥에는 성공했지만
이제 그는 수배자가 되었습니다.
보니발 아내의 유혹에서 벗어났지만
그는 강간미수범이 되었습니다.
창을 열고 하루 세 번씩 기도했지만
사자굴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인생은 알지 못하는 것 투성입니다.
여전히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믿음.
그 믿음에 반응할 뿐입니다.
그렇게 오늘을 살아갑니다.

성가신 바울, 그를 품는 조력자

1.
내게는 어느 시기이든
돕는 사람이 한 명씩은 있었다.
그래서 숨쉬기 힘들때에 
그들은 내가 숨쉴 수 있게 해주었다.
 
다윗은 혼자 걸어갈 수 없었다.
다윗을 돕기에 가장 부적합한 사람을 
한 명 꼽으라면 그는 사울왕의 아들, 요나단이었다.
차기 왕위 계승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가장 큰 조력자로써 그를 구했다.
 
바울을 중심으로 신약성경과 
예수님 이후 이방인 선교를 해석하지만
사실 바울은 아웃사이드였다.
그는 나중에 베드로를 향해서도, 마가와 바나바에게도
비난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을만큼
자기 노선과 주장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행15:39, 갈2:13)
 
안디옥 선교에 있어서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지만 조심스러울 수 있는 사람이 바울이었다.
그의 고향 다소를 찾아가 바울을 데리고 온 사람,
바울이 있기까지 그를 조력하고 함께 한 사람이 바나바다. (행11:25)
바나바와 바울이 안디옥에서 큰 무리를 가르친 결과,
비로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되었다. (행11:26)
 
2.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핍박받은 이들이
흩어져, 전도하여 만들어진 교회다.
핍박과 환난은 우리가 피하고 싶은 시간이다.
하지만 성경은 아이러니하게도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셨다”(행11:21)고 말하고 있다.
 
복은 무엇인가?
주님이 나와 함께 하는 것,
그것이 복이다.
문제는 여전하지만 주님이 함께 하신다면
이 시간을 감사해야만 한다.
 
아가보의 예언처럼 로마 전역에 심한 흉년이 들었다.
안디옥에 있는 제자들은 그의 힘대로
예루살렘을 도왔다. (행11:28-29)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을 돕기 위해
바나바를 도왔던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 안디옥이 예루살렘을 돕는다.
도움 받기 위해 도움을 주지 않았지만
마치 부메랑 같이 주님이 갚으셨다.
오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