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1.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에 능통했을 뿐 아니라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순종하고 행동하기까지 했던
사울은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던 지난 시간이
도리어 하나님을 박해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행9:4)
 
그가 기존에 이해하고 믿고 있었던
세계, 그 모든 것이 해체되었다.
지난 선지자와 예언자들의 모든 글은
예수님을 정말 만난 순간에 모두 해체되었고
다시 재정립되었다.
머릿속에 철저하게 믿고 있었던 모든 생각은
다메섹에서 모두 해체되었고 예수님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떤가? 
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 아니실까?
그래서 청년부시절 수련회에서 나는 기도를 하다가
멈춰버리고 말았다.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으려면
결국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아야 하며
누군가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을 만나야만 한다.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오답이 지워지고
정답을 찾아가게 된다.
 
  1.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행9:4)
사울은 예수님을 직접 박해하지 않았다.
다만 그를 믿는 이들을 옥에 잡아 넣고 박해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사람들이었고 예수님 자신이기도 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 주님의 백성들은
같은 맥락에서 모두 예수님이시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고전 12:27)
몸이며, 지체일 뿐 아니라 그 분 자체이시다.
가장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으로
여기신다.
 
아프리카 차드에 올해 다시 우물을 만들려고 한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인 동시에
나의 형제이며, 몸된 지체이며, 동시에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예수님은 박해 당하는 자들을 알고 계신다.
자신의 피부의 촉감을 자신이 모를 수 없듯
자신이 당하는 일을 모르는 이는 없다.
예수님은 박해 당하는 자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자신이 박해 당한다고 느낀다.
나의 아픔을 아실까?
그 분이 아신다.
 
  1.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던 사울은 (행9:1)
자신의 믿는 믿음을 행동하기 위해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지역 너머의
외국. 
예루살렘에서 약 240킬로미터나 떨어진
이 곳 다메섹에 까지 향했다.
위협과 살기 뿐 아니라
온갖 지식과 의로써 무장된 사울에게
주님의 빛이 비춰졌을 때
땅에 엎드러질 수 밖에 없다.
사울과 함께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한
무장한 무리들도 이 빛 앞에서 단숨에 무력하게 되었다.
주님의 빛 앞에 무엇이 설 수 있겠는가?
 
나는 무엇으로 가득차 있는가?
내가 가진 것들을 해체하기 위해
나를 무장해제 하기 위해 
주님 나를 만나주세요. 
완전한 의인이라 믿었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죄인들의 괴수라는 말로 자신을 이해했다.
주님의 빛 비춰주세요.
그러면 내 안에 주님의 은혜가 드러납니다.
 

초대 받을 수 없는 잔치에 들다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
나는 그것을 음성으로 들은적은 없다.
다만 누군가의 마음을 알 수 있다면
의사소통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텐데
그것은 꼭 음성이 아니라
마음의 생각일 경우가 많다.
 

말씀과 주변의 정황과 사람들, 나의 상태..
속에서 주님이 내게 말씀하실 때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내 생각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주의 사자가 사마리아에서 사역 중이던
빌립을 광야로 내몰았다.
그가 순종했을 때 에디오피아의 고위관료 내시를 만났다.
마침 그는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고
빌립을 통해 세례를 받게 되었다.

 

우연이라 생각하면
모든 것이 우연이다.
결과가 없으면 헛고생이다.
하지만 결과와 시간을 알 수 없는 
인간의 한계 때문에 평가하는 것들이다.
우리는 한쪽만 알고 있다.
아무래도 내 편에서의 사정만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간섭할 수 없는 세계의 정보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하필이면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는 고위관료를
하필이면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던 그를
하필이면 박해를 기점으로 사마리아로 넘어온 빌립과
하필이면 광야 한 가운데서 만나는 이 절묘한 상황
얼마나 많은 일상속에 우연이라는 말을 하나님을 지워내고 있는가?

 

이 만남을 통해
땅끝에 사는 외국인, 그것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 수 없는 내시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게 된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해 발생했다.
주님의 백성이 된다는 이 당연한 사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다.
자신의 몸을 찢으심으로 찢어낸 그 휘장으로
우리를 초대하신 주님의 사랑이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

며칠째 에스겔을 읽고 있다.
내가 묵상한 이 말씀들이
몇 달후에 만날 청년들에게 살아갈 방향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타락한 이스라엘에 
에스겔을 보내며 말씀하신다.
 
 
완악한 그들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 (겔2:3)
:그들이 완악하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보낸다.
스스로 걸어 간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보내신다.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 있다.
 
 
말하여라. 듣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2:4-5, 7)
다만 선지자가 왔었다는 사실만큼은 알게 될 것이다.
듣듣지 말든지 네가 상관할 게 아니다.
: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원하시는 것은
말하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다. 
말을 해서 그들을 바꿔 놓으라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다.
 
 
두려워 하지 마라. (2:6)
: 두려워 하지 않을 상황이니
두려워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가시밭길을 걷고, 전갈 가운데 있더라도
그럼에도 두려워 하지 말라는 말이다.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과 순종의 영역이다.
 
 
다만, 주의하라. 두루마리를 받아 먹어라. (겔2:8)
: 너도 그들처럼 패역한 종속처럼 되지 않도록.
구별되는 지점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이 아니다.
패역한 족속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들은 누구인가? 
누구보다 종교적인 사람들이다.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생각하였으니 망할지어다

1. simony_ 성직매매. 라는 말이
시몬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는 돈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는 이 능력으로 자신이 경험한
주술적 행위를 통해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
그를 주인으로 모신다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기 위한 게 목적이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주님을 향하도록 하는 것,
곧 자신은 사라지고, 주님이 드러나는 것.
시몬은 하나님을 사용해서
자신의 자아성취를 이루는데 목적이 있었다.
 
시몬의 잘못된 생각을 향해
베드로는 ‘생각하였으니’ – ‘망할지어다’라고 꾸짖는다.
도둑질, 살인 등과 같이 드러난 사건만을 주목하는 우리에게
성경은 생각을 통해 망하게 될것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곧이어 회개하고 기도하라고 권면하는데. 그 결과로는
생각을 용서해 주실것이라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 대한 가치를 기억해야 한다.
신자본주의 시대 온갖 눈에 드러나 보이고, 매매할 수 있을만한 가치에
주목하는 것과 별개로 주님의 가치를 계수해야 한다.
 
2. 시몬은 사마리아의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는 다는 것은 주님을 주인으로 모신다는
고백과 다름아니다. 하지만 이 고백으로 인해 만들어진 교회에
신자인지 모호한 사람들이 함께 있다.
 
알곡과 그렇지 않은 것에 관심을 둘 필요는 없다.
이유는 누가 가라지인지 우리 눈에는 알 수 없다.
한참 나를 괴롭혔던 후배는 놀라운 선교사역을 하고 있다.
바로와 바울은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분별과 심판은 주님의 날에 있다.
예수님 조차 가만두어라. 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주님의 역할을 대신 할 필요는 없다.
 
3. 사마리아는 유대와 원수 사이였다.
하지만 복음 안에서 그들은 가족이 되었다.
실제적으로 말씀 안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사고를
깨뜨리고 있다.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주님의 의와 사랑이 성취된다.
이 시기는 교회가 핍박당하는 시기이다.
 
문제가 없어야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삶 가운데 끊임없는 문제들,
핍박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뜻은 주님의 마음을 품고, 말씀에 순종하는
이들을 통해 거침없이 확장되고 이루어진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본다.

광야에서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

1. 스데반이 죽고
교회는 박해를 당했다.
흩어지는 그들은 두려움속에 질문했을지 모른다.
‘하나님은 과연 일하시는가?
나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은 유효한가?’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
주님의 약속은 성취되고 있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행1:8)
이 성취의 신비로움은
박해로 흩어진 빌립을 통해
사마리아로 복음이 전해졌으며
이 박해의 중심축에 있었던 사울(바울)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중심축으로 이동한 것이다.
 
사람도, 시대의 흐름도
우리는 내다보지 못한다.
다만 오늘의 아픔과 상황만을 보고 평가할 뿐이다.
나는 그래서 오늘의 판단을 유보하게 된다.
 
2. 사마리아 지역에서 시몬도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된다.
그것도 전심을 다해 빌립을 따라다닐 정도로
열심이 있었다. (행8:13)
그는 마술을 행하여 사람들로 부터
신적인 평가를 받을만큼 탁월했던 자다.
소질이 다분하여 나중에는 돈으로 성령을
값주고 살 수 있다고 믿은 자.
그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원했다.
그는 후에 그리스도인을 더럽히고 교회를 흔들었던
영지주의의 창시자가 된다.
 
큰 능력을 가진 자는
더욱 주님앞에 두려움으로 서야만 한다.
사람은 자신을 스스로 평가할 수 없다.
큰 능력이나 큰 결과를 낸 사람들의
마지막을 살피면 다들 좋지가 않다.
믿음의 어른들중에 인생을 잘 마무리 한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뉘는 편이다.
일찍 돌아가시거나, 그 사람만의 가시를 가지고 있다.
다윗이 기름부음 받았지만 광야가운데
거했던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 만나는 광야에서
나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어떤 삶을 살았던가? 살것인가?

스데반의 죽음은
설교를 채 마치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은 죽음이다.
 
그의 죽음 앞에서
스데반은 말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행7:56)
하나님은 스데반에게
하늘나라의 영광을 보이셨다.

사실 하늘이 열리는 모습은
일반적인 우리 눈으로는 보지 못하는 모습니다.
만약 열린 하늘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나는 부끄러울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비교한다.
누구의 삶이 누구에 비해 
더 나은 삶인가?
내가 좌절하고 낙담하는 이유도
문제 없는 누군가와 비교했을 때
내 모습은 갈등과 패배가 가득하기 때문이 아닌가?

 
눈에 보이는 것과 비교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비교한다.
하지만 마지막에 주님앞에 섰을때
나는 무엇을 부끄러워 할 것인가?

굳이 그때까지 가지 않더라도

지금 열린 하늘 아래서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부끄러워 할 것인가?
 
스데반의 죽음은
비참한 죽음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은 아니다. 라고 말씀하신다.
열린 하늘 앞에서 그는 
자신의 죽음을 도리어 감사했을 것이다.
 
나는 열린하늘 아래서
어떤 삶을 살았던가?
오늘 어떤 삶을 살것인가?
성령충만을 원어적으로 살펴보면
존재하다는 말 외에 가까이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열린 하늘 아래 사는 삶은
내 안에 계신 주님,
그리고 가까이 임재하고 계신 주님을
인정하는 삶이다.

늦어도 가장 빠른 길

유대인들은 성전을 귀하게 다루었다.
그러므로 성전을 모욕하게 되면
신성모독이 된다.
그런데 성전이 거룩한 곳인 이유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어디인가?
 
 
성전 자체가 거룩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룩한 곳이다.
‘하늘이 내 보좌이고 땅이 내 발판이다.’
하나님은 성전이 거하셨지만
동시에 그 모든 것의 주인이었다.
그럼에도 성전 이외의 곳에서는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다.

결국 하나님의 뜻과 대치하고 있는
유대인을 향해 스데반은 말했다.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행7:51)

하나님 편에 서있는가?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있는가?
스스로 알지 못한채 각자의 자리에서 완강하게 서있다.

나는 과연 하나님 편에 서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말씀을 통해 주님의 마음을 배워야 한다.
세상이 가치있고, 성공한다라는 개념과
주님의 가치는 차이가 있다.
이 가치를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주님의 마음을 따라 살아가는것이 아니라면

주님의 이름으로 이것도, 저것도 하지만
선지자노릇까지도 하지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송아지를 만들어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돌아서시고
그들이 하늘의 별들이나 섬기게 내버려 두셨다. (행7:41-42)
주님이 나를 내버려 두시는 것만큼 아픈 시간은 없다.
차라리 당장 아프고 끔찍하더라도
주님이 내 인생에 개입하셔서
내 닫힌 눈과 귀를 열어 주님을 만나기를 
그것이 가장 복된 시간인것을. 가르쳐주세요. 주님.

일상의 걸음, 거룩한 땅

알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 알았다면
우리는 그런 말도, 그런 행동도 하지 않았을텐데요.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에 
불꽃이 붙었습니다.
불에 타서 사라져야 할 가시나무는
계속해서 불타오르고
주님은 그 앞에서 모세에게 말합니다.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출3:5)

바로의 명령으로
히브리인 남아들은 다 죽임을 당해야 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계획을 이미 시작하고 계셨습니다.
바로의 딸에게 건짐받은 모세는
당시 최고학문이었던 이집트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광야로 내몰림으로써 무능력한 인생을 철저히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40년의 시간.
그 시간은 모세로 하여금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만듭니다.
그때 시내산 광야에서 모세는 소명을 받게 됩니다.

어디가 거룩한 땅인가?
무기력하게 광야에 머물던 모세의 일상에
주님이 찾아오시자, 그 곳은 거룩한 곳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머물고, 주님이 일하시는 곳이
바로 거룩한 땅입니다.
이미 40년의 시간동안 머물던 곳은
주님이 찾아오시자 그는 신을 신고 머물지 못할 성전이 되었습니다.

 
내 안에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만물보다 부패해서
불에 타서 사라져야 할 
나는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의 임재가 머무는 곳,
내가 바로 그 곳입니다.

무능력하고, 무기력하게 

걸어다니는 나의 광야, 일상이 머무는 곳에
주님의 뜻과 계획이 있습니다.
모세의 40년이 내게 어느 지점이 될지 알지 못하지만
가시나무 떨기에 여전히 타오르는 불꽃을 
내보이는 곳은 
아주 먼 땅이라던지, 거룩해 보이는 지점이 아니라
일상이 이어진 시간과 공간 입니다.
내 부끄러운 시간과 발걸음들이 연결된 지점이기도 합니다.
 
나는 알지 못하지만 오늘 내가 선 곳, 
부끄러운 지점 가운데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일상의 걸음이 곧 거룩한 땅입니다.
 

문제는 풀면 된다

이 땅에 완전한 교회는 없다.
초대교회를 그 모델로 삼지만
그조차도 완전하지 못하다.
교회 안에 헬라파와 히브리파 사이의 알력이 생겼다.
하지만 문제는 풀어내면 되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 문제가 없는 것을 꿈꾸게 되면
현실속에 우리는 계속 낙담할 뿐이다.

문제는 적절하게 풀어내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가정안에는 늘 문제가 있다.
사랑해서 만난 사이인데 
문제가 없을줄로 생각했는데
남편과 아내 사이에 문제가 생긴다.

 

문제가 생겼다고 그자체를 비난하게 되면
문제는 더 큰 문제로 불어난다.
문제가 생겼다는 게 근본적인 잘못이 아니라
잘못된 전제를 가지고 있는게 문제다.
생긴 문제는 적절하게 풀어내면 되는 것이다.

 

사도들은 구제사역으로 인해
말씀 사역을 소홀히 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했다. (행6:2)
이는 기도와 말씀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반증이다.
굳이 이 말을 하는 이유는
기도와 말씀만큼 소모적이고 실용적이지 못한 
것도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마음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면
주인을 알아 가르치고, 그 분과 대화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한편으로
기도와 말씀이 중요하다고 해서
나머지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구제사역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이를 따로 충원했다.
오직 기도와 말씀에만 몰두한 것은 
말씀을 전하는 사도의 역할로의 구분으로 이해해야 한다.

 

일을 맡길 때 지혜롭기만 한 사람이면
실용적인 선택만을 따를 수 있다.
성령충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일처리가 탁월하지 못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곱사람은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자들이었다.

 

지혜와 믿음과 신앙, 삶의 모습의 관계.
완전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겠지만
어지러운 시대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주님이 부으시는 믿음과 지혜와 존경받을 어른이 
세워지기를 기도한다.

 

문제가 생기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이런 시간을 통해
유대교의 지도자였던 제사장 무리들까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제사장 무리들을 말과 말로써
설득하고 포섭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그들의 변한 삶을 통해
그들 안에 ‘진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주변 사람들은 우리를 지켜본다.
아무리 말을 해도 
말 자체는 힘이 없다.
수많은 말들 속에 걸어가는 걸음. 삶을 통해
사람들은 진짜를 알게 된다.

믿음과 생각은 진공상태에 있지 않다

밤중에 잠을 자다가 깨어났다.
주님, 주님, 당신의 도우심을 구했다.
나의 고난 받는 것이 무엇인가?
고난 받는 것은 당장 생각나지 않더라도
불편하거나 불만인 것들은 더러 있다.
 
 
사도들은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채찍질당한 뒤 도리어 기뻐하며 공회를 떠났다. 
왜냐하면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았다는 사실이
합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행5:41)
 
 
믿음이나 생각은 진공상태에 있지 않다.
어떤 환경과 어떤 전제위에 있느냐에 따라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생각과 판단을 할 수 있다.
 
 
사도들은 원래 용기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중에 가장 나서길 좋아하는 베드로조차
여종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했던 자가 아닌가?
하지만 그들은 달라졌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했기에 그들은 
끝이 정말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끝은 또 다른 심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심판을 하시는 분이 이제 그들 안에 거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상을 심판하신 이가 세상에서 하신 일은
다름 아닌 가장 낮고 낮아지는 일이었다.
사도들은 불편하고 불만을 너머 능욕을 받고 
고난 당하는 일을 도리어 기뻐했다.
그들은 주님 안에서 이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내가 일상 속에 만나는 
수많은 사건들 앞에서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물론 무조건적인 양보나 실패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여러 결과에 대해서는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이 문제는 나는 누구이며, 주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