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믿음은 광야에 있을 때

공회의 심문과 능욕앞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 가말리엘이
제자들을 변호하고 나섰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로 비롯되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해 싸우는 사람이 될것이다.’
내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 말하는 시대,
하지만 내 뜻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있고
나의 반대편에 서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일 수 있다.

압살롬의 반역앞에 
피난하던 다윗에게 
시므이는 돌을 던지며 저주했다.
그 상황에서 다윗은 시므이를 내버려두며 말한다.
“그를 내버려 두어라.
그를 통하여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상황이 내게 억울하다면, 하나님이 갚으신다.”
하나님은 이해되지 않는 상황속에
원수 갚음이 하나님께 속했다고 고백한다.

그의 믿음은 광야에 있을 때 빛을 낸다.

중고서점에서

딸 온유는 책을 좋아합니다.
이제 자기가 좋아 하는 작가의
작품을 골라 읽기도 합니다.
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는 편인데
자기 책을 한 권은 갖고 싶어 하는 눈치라 
중고서점에 데리고 갔습니다.

 

한참을 고르다 선택한 책을 결제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왜 이 책은 접힌 부분이
많으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이 책이 중고책이라는 이야기도,
그리고 헌 책과 새 책의 차이를
이야기해주지도 않았습니다.

딸이 한, 두살만 더 나이를 먹으면
그때 가르쳐 줄 단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품의 이름보다 중요한 게 
제품의 가치이며
겉으로 드러난 모양보다
더 중요한 가치들에 대해서 말해줄 때
이런 이야기를 할 생각입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생각이어도
지금 말해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차근차근, 아이가 충분히 이해할만한 나이와 상황에
말해주어야 겠다는 생각..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내게 은과 금은 없지만
내게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

이 얼마나 놀라운 선언인가?
내게 은과 금이 없는 것은
신자본주의 시대에 
얼마나 슬프고 암담한 상황인가?
도리어 제자들에게 아무 희망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슬프거나 두렵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부활하신 주님을 경험했으며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경험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두려움보다 크신 분이시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예수님은 두려움보다 크신 분이라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

경험하려면 부딪쳐야 하고
경험하려면 말 그대로 경험해야만 한다.
경험하려면 내게 익숙한 것과 결별해야 한다.
그 낯선 땅에서 비로소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 저것 다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결국 둘 다를 가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실패는 빠를 수록 좋다.
옳은 길을 향해 가는 걸음이라면 더더욱.

삶의 방향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죄나 심판에 대한 돌이킴은 
관념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실제적이다.
그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절박함 때문에 사람들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라고 절박하게 도움을 구한 것이다.
돌이키지 않으면 자신은 죽음에 이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을 향해 자신의 존재를 열게 되는 
접점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 여기지 않으면
예수님은 그저 자신의 꿈을 이루는데, 혹은 자신의 어려움을 구조해주는
조력자나 내 말에 귀기울여주는 좋은 친구 정도에 머물기 때문이다. 
여러 조각을 배제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내 인생에 없어서는 안되는 그 접점이라는 것이 있다.
그게 아니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은
내게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접점앞에 나는 상대를 향한 용서, 나에 대한 절망과 기대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등, 여러 가지를 설명하거나 확대할 수 있는
실마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주로 영접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아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더하게 하셨다. (행2:47)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은 것은 
그 결과로서 마땅하지만 
본문에서는 찬양하다라는 말과 평행으로 
사용되었고 능동태여서 다른 사람에게 호의를 갖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곧 구원 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찬양했고
사람들에게는 좋은 태도를 가졌다.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야 할 방향과 태도이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리고 그 분이 나를 향해 행하신 일을 깨닫게 되면
주님을 생각할 때 찬양할 수 밖에 없게 되며
그 분의 마음을 따라 
주님이 내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나도 그들을 향해 사랑의 행위를 하게 된다.

새로운 바람

작년부터 구치소에 사진을 전시하게 되고
재소자 자녀와 사진교실을 열고
교정위원으로 위촉되어
교정위원 전문화 교육을 배우고 있습니다.
 
내가 언제 이렇게 하고 있지.
낌새를 차릴 겨를도 없이
정신차려 보니 나는 어느 순간
이쪽에 발 디디고 서있습니다.
 
하나님의 바람.
하나님이 부시는 바람에
순종하겠습니다.
주님, 인도해주세요.

보이지 않는 선

매일 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과연 나는 지난 일기를 다시 들여다 보기는 할까?
생각하지만 지난 시간동안
주님 주신 마음으로 일상을 기록하며
내게 얼마나 풍성한 시간이었는지 모릅니다.

나는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바쁘다라고 하지만 그 안에는 쉼도 있고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도 있습니다.
우선순위. 그 시간속에 나는 넣어 두었습니다.
바쁘다고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하는 최소의 시간을
나는 우선순위에 두었기에 나머지는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한정된 시간은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내 눈앞에 있는 것들을 처리하느라 
급급하다면 나는 정작 중요한 일을 뒷전으로 둘것이기 때문입니다.

아. 그렇다면 나는 보다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이들과의 보이지 않는 선과 정서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보이지 않는 선은 
그냥 둬도 괜찮은 것일까요?

같이 기도하자.

사람들은 우상을 만든다.
서로 잘 하고 있다고 응원하고 격려한다.
넘어지거나 흔들리지 않도록
못을 단단하게 박아서 고정시켜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러나 나의 종, 이스라엘아

그들과 비교해서 하나님은 ‘그러나’ 라고 이야기한다.
세상에서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여러 가지 조언을 듣고 행동하는데
과연 나는 어느 소리에 귀기울이고 있는가?
흔들리지 않기 위해 반석위에 집을 짓는 것과
우상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 못을 박아 고정하는 것과

온유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의문을 이야기했을 때
겉으로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내 마음에는 여러 생각이 들었다.
이제 이만큼 자라서 생각할 나이가 되었구나.
인지적인 이해 너머의 세계를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

그러다가 우리는 매일 기도하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설명하고, 말씀을 암송하고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을 알아가야 하지만
궁극적으로 기도외에는 이런 문제를 풀어낼 방법이 없다고 믿는다.
기도를 통해 주님을 만나고
그 체험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실제적으로 주님을 만날 시간을
기다리며 기도한다..

불완전한 세계속에서

처음 신학을 공부하라 말씀하셨을때
나는 수많은 의문과 질문을 던졌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있고 목회자가 있는데
내가 여기에 숫자를 더할 필요가 있느냐고.
 
차라리 조금 더 도움되거나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공부를 하고 싶었습니다.
 
내 질문에 주님은 
내가 걸어가야 할 길에 기초일 뿐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느새 1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습니다.
지금 돌아보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신학이 믿음을 담보해주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이해하는
수많은 프레임이 있다는 것을, 
전부인듯 말하는 것 속에
수많은 허점이 있고
진리라 말하는 것 속에
수많은 허울과 싸움이 있음을,
이런 불완전한 세계속에 완전한 주님의 통치가 있음을,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인생 속에 만나게 되는
여러 고통까지도 순응하게 됩니다.
 
언젠가 기도중에
아주 힘든 시기를 경험하게 될거라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이 일인가? 지금 이 시간인가?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쉽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당시에는 전혀 힘든 시간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힘든 시기를 경험하게 될거라는
주님의 마음이 먼저였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 생각하면
내가 보내고 있는 힘든 시기. 그것조차도 
주님의 주권, 주님의 계획안에 있다는 
말과 같기 때문입니다.
 
어린 예수님에게 정결예식을 행하기 위해
마리아가 성전에 올랐을 때 노선지자 시므온이 말했습니다.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눅 2:34)
 
헤롯의 위협 앞에 도망하고
사회종교 지도자들에게 위협당하고
결국 가장 고통스런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어미 마리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예리한 칼로 마음을 이리 저리 찌르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그녀의 인생 속에 만나는 고통에서도
마리아에게 찾아와서 
들려주신 주님의 말씀이 그녀를 숨쉬게 하지 않았을까요?
 
알 수 없는 인생, 주님 말씀해주세요.
잠을 자다가 깜짝 놀라 깨어나곤 합니다.
지난 시간, 선택, 살아온 과정들이 너무 부끄럽습니다.
오늘 내 인생에 다시 주님을 초대합니다.
계속된 인생의 질문들을 오늘 또 묻습니다.
주님, 가르쳐주세요.
말씀해주세요. 인도해주세요.

실패의 흔적

계획했던 일이
잘 이루어졌으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은
나를 포함해서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반면에 실수나 실패는
우리의 마음을 힘들게 만듭니다.
 
백퍼센트 진행될 것 같은 일도
먼지 같이 작은 문제가 원인이 되어
그르치는 일들도 여럿 경험했습니다.
십 여년전에 각각의 다른 출판사에서
말도 안되는 이유 때문에
출간이 1년 이상 연기되거나 
출판 자체가 무산된 적이 있었습니다.
 
두 번 모두 원고와 디자인까지
완성한 후에 벌어진 일이라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난후
감정도 다 정리되었고
지금까지 선생이 되어서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잘 이루어지고, 성공한 일은
앞을 지시하고, 더 속도를 내게 하는 반면,
실수나 실패는 
내게 멈추어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때 내가 아픔을 경험하지 않았으면
과연 지금 나는 어떤 모습일까 생각하면
두렵기까지 합니다.
 
오늘의 나는 실패를 두려워 하지만
실패를 경험한 후에
그 실패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