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마음..

몇 번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
내 마음은 이 결정을 내렸을 때
어떤 방향으로 흐를 것이라는
짐작과 예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까운 이의 마음을 지켜주지 못하면
더 멀리 가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나는 그것을 택했습니다.

기도해보았습니까?
그 기도가 명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서로의 이익을 담보하기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는 속셈도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잘 한 것일까?
주님, 내 마음에 말씀해주세요.
표피적인 것에 내 결정과 관심을 쏟지 않고
아버지의 마음을 주세요.

부끄러움과 맞선 시간

강의를 마치면 가장 어린 아이에게 묻곤 합니다.
“지금 선생님이 무슨 말 하는지 이해할 수 있겠어?”

바보같은 고백이지만
이십대 중반이 넘어서야
왜 예수님이 어린양이신지 알게 되었습니다.
모태신앙이라 어릴적부터 이런 가사의 찬양을 불렀을 뿐 아니라
찬양을 부르며 눈물도 흘렸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모른채 교회서는 직분을 맡으며
모든 것을 알고 있는것처럼 행동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나이가 들어서
아무것도 모르는데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어른이 될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담당 전도사님에게 용기내어 이렇게 물었습니다.

“저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요.
알고 있는거라고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돌아오는 답변이 놀라웠습니다.
‘다 알고 있네. 그러면 됐다.’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내용이지만,
이런 서술 자체는 불신자도 알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언어가 가득했던 세상에서 오랫동안 자랐습니다.
누구도 이야기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 또한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그 주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신지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몇 년전엔 사람들을 모으고 매주일 밤마다 시간을 정해서
캠과 마이크를 가져다 놓고 사람들에게 주님을 말했습니다.
종교적인 언어가 아니라 주님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아서
왜 예수님이 어린양이신지, 용서, 영적전쟁, .. 을 말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모니터앞에서 애타게 기도했던 시간들..

거의 반년이 넘도록 부끄러움과 맞섰던 시간이었습니다.
다시 하라면 못할 장면들이지만
그 분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를 매일 고민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가지고 계신 의문과 답답함을
주님께 여쭤보세요.
그것은 당신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기도제목입니다.


내가 경험한 의문과 답답함에 주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느끼는 의문 앞에서 주님께 질문해 보세요.
“주님의 마음을 구합니다.
주님은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어떻게 하길 원하시나요?”

질문에 명쾌한 답변을 주시진 않지만
계속된 질문을 통해 주님은 당신의 마음을 나눠주실거예요.

감동을 따라 노트에 생각나는 말과 문장과 생각을 적어 보세요.
‘내가 할 수 있을까요? ‘, ‘그 이후에 벌어질 어려움’
이런 고민은 나중으로 미뤄도 됩니다.
‘기도하게 되면 아마 주님은 나를 이런식으로 내몰거야.’
순종하지 않으려고 주님의 마음을 구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는 마세요.
우리는 누구도 주님의 뜻을 명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기도하지 않게 만들려는 사단의 계략입니다.

 

부담과 두려움 조차,

책이 나온지 아직 며칠 되지 않았지만
사람들에게서 여러 절절한 메세지를 받았습니다.
벌써 작은 변화와 은혜를 만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마음에 부담이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나는 죽었습니다. 라고 고백하지만
여전히 이 책의 주제가 가지는 부담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게 됩니다.

오전에 아내와 함께 기도했습니다.
이 책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부담과 두려움은 아내에게도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아내에게 책을 가장 먼저 선물했는데
아직까지 아내는 첫 장을 펼치지 못했습니다.
다음주에 숨을 고르고 읽을 생각이라 합니다.
우리 부부에게 이 책은 상당한 부담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책을 통한 기대가 있습니다.
오전에 기도한 것처럼
이 책을 통해 이루실 아버지의 마음.
아파하고 깨어진 가정과 청년들에게
아버지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책에 쓴 것처럼
문제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문제가 있지만 그 문제를
주님앞에 가져가려 합니다.
이런 형태의 두려움 조차 처리하지 못할 정도로
주님은 작지 않으십니다.
모든 문제 이면에 감사가 있음을
나는 도리어 감사를 택합니다.

그리고 내 영혼에 선포하겠습니다.
주님이 나의 주님이십니다.

p.s
유기성 목사님이 칼럼에
책에 대한 소개를 적어 주셨습니다.
출판사 직원들도 이렇게 따뜻하게 적어주신 목사님은 없었다며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이 책을 진행하며 고마웠던 분입니다.
https://www.facebook.com/pastor.yookisung/photos/a.295403830557613.59619.293527930745203/957317207699602/?type=3&theater

주님의 얼굴을 봅니다.

중국에서 잠시 한국에 들른 선교사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나자는 약속.
한국에 머물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서
급하게 잡은 약속이지만 흔괘히 집을 나섰습니다.

나는 이 분을 만나서
어떤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이 만남을 통해 어떤 일을 하실까요?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나는 지금 이 시간을 기대하며 순종할 뿐입니다.
아무것도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지만
나는 매일을 기대하겠습니다.

내 모습을 살피면
나는 어느 것 하나 할 수 없습니다.
할 자신도 없구요.
하지만 주님을 바라봅니다.
최소한 기도해드릴 수 있겠네요.
그러면 이 분을 통해 주님 뜻 이루시겠지요.

매일의 시간을 경영하시는 주님,
주님의 얼굴을 봅니다.

모르는 것 투성이

주님, 늦은 밤이예요.
아이들의 잠자는 소리,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듣기 좋아요.
오늘 온유에게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는데
억울한 일을 당했을 경우를 이야기해주었어요.

아이가 아직 어렸을때는
자신의 정당함만을 보곤 하잖아요.
왜 나만 사과해야 하는지를 묻는 딸아이에게
속상했겠구나. 억울한 이야기를 다 들어준 뒤에
이제는 그 사람의 마음이 되어 보라고 이야기해주었어요.
중요한 건, 그 당시의 시간이 아니라
조금 더 전 이야기를 생각해보라고 권해줬어요.
억울했던 상황과 전혀 상관없는 상황들..

다행히, 다행히 딸 아이가 내게 말해주었어요.
“아빠, 그런데 그때 이 아이는
이 일로 마음이 속상했을수도 있겠다.”

“그래. 온유야.
억울한 일을 당한 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는것 같아.
친구가 앞서 있었던 속상한 마음 때문에
너한테 속상한 일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도 몰라.

그때 너가 참 많이 속상했을 것 같아.
하지만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그 친구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아.
왜냐하면 아빠는 그 자리에 없어서 누가 잘했고 못했는지를 알 수 없어.
이 말은 온유가 거짓말한다는 이야기가 아니야.
온유는 거짓말 하지 않는 딸이라는 것을 아빠는 믿어.
하지만 너가 정직하게 이야기해도
다 알 수 없는 사정이 너무 많아.
아빠 나이가 몇 살이지?
응. 마흔살이지만. 아빠도 아직 어리기만 한 걸..
그래서 모르는 것 투성인걸..”

비생산적인 시간

주님은 내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전쟁과 상황에서
주인공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사단은 우는 사자처럼 내 마음과
내 시선을 주님에게서 외부로 이끌려 합니다.
어쩌면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게 하는 것 또한
사단의 성공이고,
자신이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만드는
유물론적인 생각으로 인해
주님마저 지워버리게 만든다면
그것 또한 사단의 성공입니다.
나는 오직 주님께 시선을 두고
그 분께 기대어 있겠습니다.
주님 내 삶에 지속적으로 말씀하시고
만나주세요.
다음주중에 책이 나옵니다.
<결혼을 배우다>
네. 주님 저는 결혼을 주님께 배웠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하던 내게
주님이 강권하셔서 내게 사랑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제 겨우8년이 지났을 뿐인데
이제 나는 누군가에게 결혼은 이런 것이다.
가정은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말할 자격이 되느냐.
내가 말할만큼 무엇을 알고 있느냐와 상관없이
나는 그 시간
무의미한 시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요?
이런 시간 가지면 좋지.
누군들 이런 시간을 갖고 싶지 않겠어?
하지만 기회비용이라는게 있잖아요.
내가 여기에 시간을 투자하는 만큼
더 생산적인 것은 소홀해지거나 방치되어 버리잖아요.
기억나는 몇 개의 경험이 있습니다.
2년이 넘도록
나는 그 시간속에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지금 이 시간은 무엇인가요?
싫거나 힘들다는 것이 아니라
정체되어 혼자 멈춰있는 시간.
나는 하루종일 설거지를 하고
말 그대로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버리는
손에 잡히는 것 하나 없이
그저 떠노니는 구름을 멍하게 쳐다보는 시간.
나는 그 시간이 내게 어떻게 필요할 지
주님께 묻고는 했습니다.
이 시간이 내게 무엇을 가르쳤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을 내가 거쳤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비생산적인 시간이라 생각했던
그 시간을 통해
나는 최소한 후배들에게
그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애쓰는 시간은 물론 필요하지만
자신의  달란트를 계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 인생의 목적이 그것만은 아닙니다.
오늘 주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이
때로는 납득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 훈련을 계속해야만 합니다.

감사합니다.

8년을 살고 있는 우리 집이지만
초인종을 누를 적마다 감격해하며,
대문 앞에서 감사합니다.
집이 크고 작은 것을 떠나서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집이기 때문입니다.

벌써 10년을 사진 찍었지만
오늘 사진 찍는 자체가 내겐 감사의 제목입니다.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긴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감격할 수 있다면,
자격 없는 내게 주신 아버지의 선물인 것을 잊지 않는다면
나는 정말 행복할 것입니다.

내가 색약이라지만, 색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나대로의 색감각을 가지고 사진을 찍고,
내가 보이는데로의 색으로 그림 그릴 뿐,
이것을 장애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분별

가나안에 정착한 후
빠르게 타락해 가는 이스라엘을 봅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으로
앗수르에 의해 이스라엘은 멸망합니다.
앗수르는 여러 점령지 사람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펼치는데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로 이스라엘에서 그들 중 몇을 죽게 되었습니다.

그로인해 앗수르 왕은
이스라엘 제사장을 파견합니다.
그래서 그 땅에 거주하는 다양한 민족의 사람들은
여호와를 섬기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경외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원래 고향에서 가져온 관습에 따라
자기들의 신도 동시에 섬겼다고 말합니다. (왕하17:32-33)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도
문화와 미디어에서 가져온 관습에 따라
하나님과 동시에 섬기고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지난주에 깜짝놀랄 만한 여러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기독교 문화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다원주의의 결과들을 보고 입을 다물수가 없었습니다.
동양철학과의 깊은 접목으로 인해
하나님을 믿지만, 그 밖의 이야기에
긴밀하고 비밀스럽게 제를 올리고 있는
상황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경직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복음의 도구와 통로로 주신
유익한 것도 너무 많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하늘을 바라봐야 할 것 같습니다.

주님 붙들어 주세요.

아이들을 준비시켜서
아침 8시가 조금 넘어서 집에서 출발했다.
집으로 돌아왔더니 저녁 9시가 넘었다.
교회에서 12시간 이상을 머물렀다.
아내는 오늘 몸이 피곤한 상태라
조심스럽긴 하지만, 그리고 교회서 오래 머문다는 것에 대한
가치 판단은 유보해야 하겠지만
이전의 내 모습과 비교하면 괄목할만한 변화일 수 밖에 없다.

혼자서, 주님을 추구하고
교회가 아닌 변방을 떠돌며 사람들과 사귀고 기도해온 내게
이런 구심점과 같은 역할과 경험들은
의미있다. 나는 많은 것을 경험해야 한다.
경험 그 자체가 대단하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뜻이 있다.
그것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이스라엘에서 주님이 내게 심어주신 말씀.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나는 다양한 경험을 해야만 한다.
그것으로 인해 일을 진행해 나가는 법 뿐 아니라
각 사람들의 상태와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모두가 옳아보이는 선택이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선택하기 위한 방법과 경험을 배워나가는 것이다.
내게 경험과 공부는 매일의 일상을 통해서다.
주님 졸리는 밤입니다.
붙들어주세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가이사랴 빌립보는 헬몬산 근처에 있는 도시다.
분봉 왕 헤롯 빌립이 로마 황제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도시다.
황제의 직명 가이사랴와, 분봉왕 빌립의 이름을 갖고 있는
상징적인 이 도시, 지상 최고의 권력을 말하고 있는
이 곳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냈다.

사람들은 로마황제의 이름이 마치 신의 이름인 것처럼
우러러 보지만 지금 작은 한 켠에서 하나님은 당신을 계시하고 계신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마16:16)
내가 믿는 예수님은 이런 분이시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다.
기름부음 받은 자는 세 가지 – 곧 왕과 선지자, 제사장을 의미한다.
우리의 왕이시며 선지자이시며, 또한 우리의 죄를 속죄하신 제사장이신
예수님은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막연하게 예수님을 믿는다 말하지만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것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면
내가 두려워 떨게 만드는 여러가지는 사실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마16:13)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요한, 혹은 엘리야,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여겼다.

예수님은 동일하게 이 시대에도 물으신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4대 성인중 한 명으로 여긴다.
아니면 조금 나은 사람, 전설 속의 한 인물,
또는 역사속에 한 인물정도로 여긴다.

나는 예수님을 내 구원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으로 알았다.
하지만 거기서 그칠 이름이 아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나의 구원자일 뿐 아니라 주님이시다.
그 분의 십자가의 사건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우주적 전쟁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지 않으면
교회는 그저 착한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을 목표로 삼을 지 모른다.
화내지 않고, 잘 인내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을 추구할 지 모른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해 너무나 정확하고 훌륭한 고백을 했지만
그 조차도 다른 제자들과 같이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출해 내시고
왕으로 등극하실 것을 기대했는지 모른다.
사람이 생각하는 훌륭한 무엇, 선한 무엇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마16:21)
말했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16:22)
이 말을 베드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가 지켜주겠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원어를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자기에게로 데리고 와서는 대들듯 말했다.
어리석고 순진해 보이는 예수님을 베드로는 가르치려 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과 그 지혜는
사람에게는 미련해 보일지라도 하나님께는 최선이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25)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3)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한다고 막아선 일이
도리어 하나님의 일을 막아선 것이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마16:23)

베드로가 십자가에 대해 막아선 것은
사탄의 시험과도 같다.
예수님조차도 겟세마네에서 십자가의 일을 앞두고 눈물로 기도해야 할 만큼
그 일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인류의 죄에 대한 댓가, 그 저주와 사망.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혼자서 마셔야 하는 것이다.
마치 광야에서 예수님을 세 가지로 시험한 사단과도 같다.
사단은 이렇게 유혹한다.

십자가의 길 외에 다른 더 좋은 방법이 있을텐데,
그것을 모색해 보면 어떨까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마16:23)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미련해 보이는 것으로
어떻게 구원을 이룰 수 있을까요?
이 곳 가이사랴 빌립보의 찬란한 문화와 영광을 보십시오.
이 방향이 더 좋지 않을까요?

하지만 주님은 이 시험마저도
단호하게 물리치시고, 그 길을 가셨다.
그리고 그 길위에 주님은 인류를 초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인자가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터인데,
그 때에 그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 줄 것이다.” (마16:24-27)

예수님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신다.
너무나 두려운 말씀이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했지 않은가?
하지만 믿음과 행함은 따로 노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곧 예수님의 길 위에 함께 따라 걷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이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처럼 함께 죽고
그 후에야 우리는 그 분의 부활에도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죽지 않고 부활에 동참할 수는 없다.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다.

그것이 바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
라는 고백이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고백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신다고 약속하셨다.

올해 초 이스라엘에서 가이사랴 빌립보를 만났다.
베드로의 고백을 생각하며 그 곳 돌맹이 몇 개를 주워왔다.
당시의 영광스러웠을 가이사랴 빌립보는 지금 다 무너져
몇 개의 흔적들이 관광객을 맞고 있지만
미비해 보이던 하나님의 나라의 씨앗은
예수님의 약속처럼 큰 나무가 되어 마지막 때를 기다리고 있다.
예수님이 이 믿음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마 16:18)

또한 교회가 이 고백위에 있을 때 음부의 권세은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마16:18)
이 시대에 수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질타하고 있는 이유는
때가 악한 이유도 있겠지만,
교회가 이 고백위에 서있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고백위에 서있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예수님은 놀라운 선물을 주셨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16:19)

열쇠는 열고 닫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묵상하며 하나님은 여러 말씀을 생각나게 해주셨다.
열쇠는 하찮아 보이지만 놀라운 의미를 지니고 있다.

느혜미야가 백성들과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을 때
산발랏과 도비야 등은 집요하게 그들의 공사를 방해하고 훼방했다.
원수들은 성벽 재건 공사를 마치고 수리하지 못한 곳이 없다는 말을 듣고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뇌물을 주면서 까지 느헤미야의 공사를 방해하려고 했는데
그 때는 아직 성문의 문짝을 달지 못한 때였다. (느6:1)
하지만 마침내 성벽 역사가 마쳤을 때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 하여 크게 낙담했다. (느6:16)
이렇게 문이 달리고 난 뒤에야 성은 자신의 구실을 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여호수아가 아이성을 정복할 때도
일부는 아이성의 군대를 유인했고, 일부는 매복했다가
유인당한 아이 군대로 말미암아 열려진 문을 통해 아이성을 점령했다.

“여호수아가 단창을 들어 신호를 보내는 순간
매복하고 있던 이스라엘군이 일제히 일어나
성 안으로 돌격하여 성을 점령하고 즉시 성에 불을 질렀다.

아이군이 뒤돌아보니 성 안에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이때 광야로 도망가던 이스라엘군이 돌이켜 반격 태세로 나오자
아이군은 도망칠 길이 막연하였다.” (수8:19-20)

이만큼 문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만큼 큰 의미를 가진다.
내가 주님을 옳게 고백한다면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열쇠를 가지게 된다.
주님이 약속하신 열쇠는 곧 기도를 통해 역사한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적 세계를 진동케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 가나안 거민들이 있다.
그들은 너무나 커보여서 가나안정탐꾼은 그 앞에 악평을 늘어 놓았고
사울 뿐 아니라 하나님의 용사 ‘요나단’조차 그 앞에 침묵하고 말았다.
하지만 자신과 대적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골리앗을, 하나님과 가나안 거민들을 비교해야만 한다.

“그 땅 백성을 두려워 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하지 말라” (민14:9)

하나님이 주신 작은 돌맹이가 원수를 넘어 뜨리고 말것이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삼상 17:45)

나는 주님이 내게 맡기신 열쇠를 신뢰해야만 한다.
원수는 우리가 가진 열쇠가 작아서 문을 열고 닫을 필요에 의문을 갖게 한다.
실제로 우리 눈에 열쇠가 작고 하찮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열쇠로 열수 있는 문은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열쇠를 가졌다는 것은 이미 전쟁의 승기를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열쇠를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은 다시 우리에게 물으실 것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다른 사람이 무엇이라 말하든
나는 나의 대답을 말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