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마가 다락방

언제 구원을 받았습니까?
나는 그것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이날입니다. ‘
라고 확정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존재일까?
동시에, 기억되는 지점들이 있어서 어느 지점이 구원 받았다고 말할
지점인지 알지 못한다.
 
예수님을 알았을 때인지,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신 분이신 것을 알았을 때인지,
죄인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달았을 때인지,
성령님을 인정한 이후 부터인지..
 
사마리아에서 사람들은 세례를 받았지만
제자들로부터 안수를 받고 난 후 성령을 받았다.
가이사랴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해 증언할 때
고넬료를 포함한 이방인들은 성령을 받고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높였다.
그 후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행10:47)
 
일반적으로 알려진 수순이 있겠지만
하나님은 그 수순을 따라 일하시지 않는다.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는 이 순간은
마치 마가 다락방의 사건과 닮아 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통한 당신의 구원사역이 있지만
동시에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이라는
당신의 뜻을 이루어 나가신다.
 
이들이 성령충만하게 된
베드로의 설교의 핵심은 무엇인가?
곧 예수님이 심판주인 동시에 구속자라는 사실이다.
믿는 자에게나 믿지 않는 자에게나
산 자에게나 죽은 자에게나 예수님은 재판장이며 심판주이시다. (행10:42)
동시에 그를 믿는 사람을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시대적인 언어와 눈높이를 맞춰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단순하며
삶의 규모와 가치들은 복잡 다단하며
순종해서 살아가는 삶의 형태는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향은 단순하다.
 
내가 살아가는 이 하루,
누구 앞에 서있는가?
고넬료가 말한대로
“지금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있다” (행10:33)
그리고 그 분은 사람들이 판단하는
그 잣대, 외모로 우리를 보지 않는다. (행10:34)
주님 앞에 서 있는 나는,
그리고 내 마음의 방향은 어디를 향해 있는가?

하나님 앞에 서있다

1.
2007년. 그 이전부터
길을 걸으며 기도했다.
버스를 타고 행선지를 향할 때도
설거지를 하거나, 샤워를 할때도
마음이 가난해서 어찌할 수 없을때도
마음으로 기도했다.
그 기도를 통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내 마음의 방향이 주님을 향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고넬료는 베드로에게 듣기를 청하며
다 하나님 앞에 와있다고 말한다. (행10:33)
하나님의 하신 일을 들려주는 자리,
그 곳에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가 그 곳에 있기 때문이다.
 
거리마다
내게 익숙한 곳마다
내 일상에 드려진 모든 기도의 시간속에
주님의 임재가 그곳에 있다.
그래서 일상을 살아가지만
나는 하나님 앞에 서있는 것과 같다.
 
2.
둘은 한 사람이 될 수 없다.
게다가 한 사람으로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사람이 되는 신비.
주님 안에 가능하다고 말씀하신다.
 
베드로가 하나님께 순종해서
자신의 유대적 배경, 신앙적 가치, 신념앞에서
익숙한 것과 결별하였다면
 
고넬료는 하나님께 순종해서
로마군대의 장교로써의 권위를 피지배계층에게
엎드려 절함으로 기득권을 내려놓았다.
 
한 사람만의 순종만으로 이루어 질 수 없는 만남
곧 바울이 말한 바
그리스도의 피로 전에 멀리 있던
둘을 하나로 만드셔서 한 새사람,
하나의 새로운 사람을 이루신다.
 
순종과 그리스도의 피.
곧 은혜와 반응이다.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

1. 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한 것은
밖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고넬료는 그 외적인 열매로써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였다. (행 10:2)
 
하나님은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기도와 구제을 별개의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현이 기도로써,
이웃을 사랑하라는 표현이 구제로써 나타난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어떤 하루를 살았던가?
 
(더더구나, 당시 모든 민족이 두려워 떨던 로마의 군인,
그것도 전략적 요충지, 가이사랴 장교 고넬료.
피지배계층을 향한 긍휼
아버지의 마음이 부어져야만 가능하다. 기도를 통해)
다시 아프리카를 향한 우물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주님, 도와주세요.
 
 
2. 고넬료의 이야기는 교회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오랜시간동안 깨끗한 것과 속된 것에 대한 (레11)
전통 관습으로 자신을 지켜온 베드로의 생각을 깨뜨리기 위해
하나님은 세 번의 환상을 보여주신다.
이제 깨끗하고 속된 것의 구분은 관습이 아니라
주님의 주권 가운데 있음을 말해준다.
 
나는 무엇으로 거룩하고 속된 것을
깨끗하고 더러운 것을
하나님의 사역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가?
아합왕국에 있던 오바댜는
악한 왕조에 신하로 있었지만
비밀스럽게 여호와의 선지자 백 명을
굴에 숨겨 떡과 물로 그들을 돌보았다. (왕상18:13)
 
하나님은 에스겔 선자자에게
상징적으로 인분 불을 피우고 그것을 먹게 하였다.
에스겔의 부탁으로 쇠똥으로 인분을 대신하긴 했지만 (겔4:12,15)
상황과 상관없이 문자적으로 거룩과 속된 것을 해석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 판단은 주님께 속해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행10:15)

너의 솜씨를 기뻐한단다

“도르가는 옷을 잘 지었구나.
그래. 너는 그 일을 통해 나의 일을 하는구나.
성경에는 고아와 과부의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는단다.
구약의 저편에서 부터 
가까이에는 집사가 세워지는 순간과 도르가에 이르기까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이 있단다.
너는 너가 할 수 없는 일들을 
내다보고 따라하거나,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네게 준 은사대로, 내가 네게 준 마음대로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것,
그것이면 나는 똑같이 기뻐한단다.
 

열등하다고 여기는 것은
너희의 세속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가치관 때문이지
결코 나의 가치 기준이 아니란다.
그래. 도르가는 옷을 잘 짓는구나.
과부들을 위해 만든 옷깃에 리본과 패턴이 참 아름답구나.
너의 그 솜씨를 보고 내가 웃는단다.
왜냐하면 너는 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이야.
내가 세상을 만들때의 솜씨의 부분 부분들이 네게 녹아있구나.”

 
때로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오고
때로는 바울과 같은 주님의 그릇이
역사속에서 크게 일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눈에 보이지 않은 작은 구석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만들어진다.
하나님의 나라를 물량공격으로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일상속 거룩함, 주님의 백성들을 삶을 
놓아버리게 된다.
 
주님이 우리의 중심이 되어야지
사역이 우리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 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물가운데, 불가운데 걸어갈 수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그 분이 내게 말씀하실 때
나는 가만히 아이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나는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 
이유를 알지 못하는 시간동안 주님께 물어야 한다.

걸음마를 하고 자라나기까지

1. 시간은 상대적이다.
느리게 흘러가는
긴박한 시간속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던
사울이 이제는 상황이 뒤바뀌어
유대인들의 살의앞에
사울은 광주리에 숨어 성벽을 내렸다. (행9:25)
복음으로 이제 그를 따르는
새로운 제자들이 생겼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지고 있다.
 
수많은 목숨의 위협앞에
그는 자신의 목숨을 아끼고 있지만
사실은 자신의 목숨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향후의 걸음, 복음의 기회를 살리고 있는 것이다.
긴박한 순간에 나의 행동이 이런 저런 목적이다라고
명확하게 구분지을 수 없다.
우리의 긴박한 순간에는
그저 본능으로 결정하고, 본능으로 움직이게 되기 때문이다.
 
다만, 그동안의 기도들,
그 기도는 우리 삶의 방향을 만든다.
그 기도의 방향을 따라 주님이 이끄신다.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시고
도울 사람을 붙여주시고
숨가빴던 시간이 다 흘러간 후에야
겨우 하나님의 은혜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해서
긴박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 잘될거야. 라고 마냥 응원할 수 없는 것은
주님의 계획이 다르고, 사건을 치르고 난 후와 그때의 감정은
전혀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켜보고 기도하고 위로하고
주님 바라보기를, 마치 처음 그렇게 하는 것처럼
주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이다.
 
 
2. 사울은 이제 자신이 적대했던 제자들에게
손 내밀며 사귀기를 원했다. (행9:26)
사도행전 본문에는 언급하지 않지만
그의 서신서를 보면 사울은 아라비아와 다메섹을 거쳐
3년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사람은 복음으로 한 순간에 변할 수 있다.
동시에 사람의 변화는 시간이 필요하다.
사울에게도 적어도 3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눕고 기고 걸음마를 거치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하며
겨우 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꽤 긴 시간이 흘렀지만
제자들은 사울과 사귀기를 두려워했다.
제자들조차 마음에 거리낌과 두려움이 있었다.
사울의 핍박은 실제적이었고
그 핍박을 직접적으로 당한 피해자들이
이들이거나 직간접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상처는 우리의 감정을 건드린다.
사람은 옳은 것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니라
옳다고 느껴지는 것을 따라 걷게 된다.
믿는 자들을 볼 때, 교회 지도자들을 볼 때
우리는 그들을 마치 성인으로 기대한다.
그 기대가 깨지면 전에 없던 실망을 하게 된다.
직분과 역할의 구분, 연약함을 품은 한 사람이다.
 
다만, 바나바에게 하나님은 그런 성품과 은혜를 주셨다.
사울은 공동체에 이어주는 다리,
화평하게 만드는 직분을 가진 자.
위로의아들, 바나바의 역할은
한 사람을 공동체 가운데 세워주는 일을 맡았다.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아니라, 드러나야 하는 사람을 드러내는 일
화려한 무대 위의 대단한 메세지를 가진 자 뿐 아니라
갈등하고 깨진 관계속에서 서로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한 사람.
나는 오늘 누구의 바나바인가
 
 
3. 다소 출신 사울은
다소로 향했다. (행9)
자신이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이 복된 소식을
다른 곳 보다 먼저 자신의 출신지에서 부터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울이 예루살렘을 떠난 후 교회는 평안을 찾았다.
사울이 떠난 후 소란이 잦아들었던 때문일까?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율법에 능했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사울이
이제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예루살렘을
흔들어 놓고 떠났다는 사실이다.
사울의 행적을 보고 의문을 표했던 사람중
상당수가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갈등이 있지만, 문제 같아 보이는 그 갈등을 통해서
결국 주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시니까..

하나님의 큰 그림

1. 아나니아는 그저 용기내어
원수를 만나는 수준이었지만
하나님은 우리 생각 이상의 그림을 가지고 계신다.
 
후에 바울은 마케도나 사람의 환상을 보게 된다.
‘와서 우리를 도우라.’
그가 만난 사람은 옷감 장수 루디아였으며
순종했던 그곳에서 바울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작은 시작점들은 구원을 낳게 된다.
교회의 시작점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2. 각각의 역할이 있다.
바울은 세계선교에서 구심점이 되었지만
동시에 많은 고난과 박해를 감당할 수 있었다.
이후의 시간을 조명하기 위해서는 앞서 사울의 시간을 살펴야 한다.
그리스도인 중 누구도 사울에게 다가서기가 쉽지 않은 때에
하나님은 아나니아를 사울에게 보낸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함으로 그는
다시 보게 되고, 새로운 사명의 길을 걷게 하신다.
아나니아의 역할은 성경에 더이상 기록되지 않지만
성경 전반에 기록되고, 조명되는 역할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재화가 한정되어 있어서
1등이 가장 많은 것을, 2등, 3등으로 갈수록
더 많은 가진 가지지 못하고, 칭찬 받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재화가 한정되어 있지 않으며
하나님의 판단기준은 우리와 같지 않다.
내게 주신 소임이 작더라도, 작은 것에 충성하는 것,
지금 아나니아에게는 사울을 만나 안수하는 소임이 주어졌다.
 
3. 아나니아는 주님에게
사울에 대해 설명한다.
‘주님 그가 누구인지 모르십니까?
주님, 이 자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이며
지금 이 자가 여기에 온 목적을 알고는 계십니까?’
주님, 내 처지를 모르십니까?
주님의 시간을 우리는 내다보지 못하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의문한다.
 
의문하되, 우리는 순종해야 한다.
주님의 시간 너머를 기도하며.
기도하면 보이지 않는 곳에 길이 생기고
그 길을 따라 걸을 수 있을뿐더라
그것을 믿음으로 내다볼 수 있게 된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행9:15)
유대인 위주였던 하나님 나라 사역이
이제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거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
아나니아를 비롯하여 사람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하지만 가장 합당한 그릇이다.
 
나를 힘들게 했던
그리고 공동체 내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던 사람이 있다.
그 사람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않겠다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지금 그는 .. 주님의 놀라운 도구로 쓰임받고 있다.
그는 그 완고하고 모두가 꺼려하던 지역을
위해 주님이 주목하고 계셨던 그릇이었다.
 
4.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안수하고는 말했다.
“형제 사울아.” (행9:17)
사울은 그의 형제들을 위협과 살기로 등등하여
핍박했던 대표적인 원수였다.
며칠동안 그가 얼마나 변했을지 알지 못하지만
그가 그리스도의 몸이 된 이상, 형제가 된 것이다.
형제로 바라봐준 것이다.
며칠뒤, 사울은 곧바로 여러 회당을 다니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선포하기 시작했다. (행9:20)
이에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은 당혹하게 되었다.
 
누구를 만나야 하나요?
나는 자주 이런 질문을 받는다.
첫째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
곧, 주님을 향한 마음, 사랑하는마음은 일관되어야 한다.
하지만 주님이 말씀하시면
자신을 바꿀 의지와 여지가 있는 사람.
 
내 기질과 성격과 믿음을 주장하는 대신
주님의 믿음을 따라 나는 언제든지 순종하겠습니다.
 

자신의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1.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에 능통했을 뿐 아니라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순종하고 행동하기까지 했던
사울은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던 지난 시간이
도리어 하나님을 박해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행9:4)
 
그가 기존에 이해하고 믿고 있었던
세계, 그 모든 것이 해체되었다.
지난 선지자와 예언자들의 모든 글은
예수님을 정말 만난 순간에 모두 해체되었고
다시 재정립되었다.
머릿속에 철저하게 믿고 있었던 모든 생각은
다메섹에서 모두 해체되었고 예수님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떤가? 
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 아니실까?
그래서 청년부시절 수련회에서 나는 기도를 하다가
멈춰버리고 말았다.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으려면
결국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아야 하며
누군가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을 만나야만 한다.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오답이 지워지고
정답을 찾아가게 된다.
 
  1.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행9:4)
사울은 예수님을 직접 박해하지 않았다.
다만 그를 믿는 이들을 옥에 잡아 넣고 박해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사람들이었고 예수님 자신이기도 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 주님의 백성들은
같은 맥락에서 모두 예수님이시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고전 12:27)
몸이며, 지체일 뿐 아니라 그 분 자체이시다.
가장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으로
여기신다.
 
아프리카 차드에 올해 다시 우물을 만들려고 한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인 동시에
나의 형제이며, 몸된 지체이며, 동시에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예수님은 박해 당하는 자들을 알고 계신다.
자신의 피부의 촉감을 자신이 모를 수 없듯
자신이 당하는 일을 모르는 이는 없다.
예수님은 박해 당하는 자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자신이 박해 당한다고 느낀다.
나의 아픔을 아실까?
그 분이 아신다.
 
  1.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던 사울은 (행9:1)
자신의 믿는 믿음을 행동하기 위해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지역 너머의
외국. 
예루살렘에서 약 240킬로미터나 떨어진
이 곳 다메섹에 까지 향했다.
위협과 살기 뿐 아니라
온갖 지식과 의로써 무장된 사울에게
주님의 빛이 비춰졌을 때
땅에 엎드러질 수 밖에 없다.
사울과 함께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한
무장한 무리들도 이 빛 앞에서 단숨에 무력하게 되었다.
주님의 빛 앞에 무엇이 설 수 있겠는가?
 
나는 무엇으로 가득차 있는가?
내가 가진 것들을 해체하기 위해
나를 무장해제 하기 위해 
주님 나를 만나주세요. 
완전한 의인이라 믿었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죄인들의 괴수라는 말로 자신을 이해했다.
주님의 빛 비춰주세요.
그러면 내 안에 주님의 은혜가 드러납니다.
 

초대 받을 수 없는 잔치에 들다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
나는 그것을 음성으로 들은적은 없다.
다만 누군가의 마음을 알 수 있다면
의사소통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텐데
그것은 꼭 음성이 아니라
마음의 생각일 경우가 많다.
 

말씀과 주변의 정황과 사람들, 나의 상태..
속에서 주님이 내게 말씀하실 때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내 생각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주의 사자가 사마리아에서 사역 중이던
빌립을 광야로 내몰았다.
그가 순종했을 때 에디오피아의 고위관료 내시를 만났다.
마침 그는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고
빌립을 통해 세례를 받게 되었다.

 

우연이라 생각하면
모든 것이 우연이다.
결과가 없으면 헛고생이다.
하지만 결과와 시간을 알 수 없는 
인간의 한계 때문에 평가하는 것들이다.
우리는 한쪽만 알고 있다.
아무래도 내 편에서의 사정만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간섭할 수 없는 세계의 정보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하필이면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는 고위관료를
하필이면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던 그를
하필이면 박해를 기점으로 사마리아로 넘어온 빌립과
하필이면 광야 한 가운데서 만나는 이 절묘한 상황
얼마나 많은 일상속에 우연이라는 말을 하나님을 지워내고 있는가?

 

이 만남을 통해
땅끝에 사는 외국인, 그것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 수 없는 내시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게 된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해 발생했다.
주님의 백성이 된다는 이 당연한 사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다.
자신의 몸을 찢으심으로 찢어낸 그 휘장으로
우리를 초대하신 주님의 사랑이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

며칠째 에스겔을 읽고 있다.
내가 묵상한 이 말씀들이
몇 달후에 만날 청년들에게 살아갈 방향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타락한 이스라엘에 
에스겔을 보내며 말씀하신다.
 
 
완악한 그들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 (겔2:3)
:그들이 완악하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보낸다.
스스로 걸어 간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보내신다.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 있다.
 
 
말하여라. 듣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2:4-5, 7)
다만 선지자가 왔었다는 사실만큼은 알게 될 것이다.
듣듣지 말든지 네가 상관할 게 아니다.
: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원하시는 것은
말하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다. 
말을 해서 그들을 바꿔 놓으라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다.
 
 
두려워 하지 마라. (2:6)
: 두려워 하지 않을 상황이니
두려워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가시밭길을 걷고, 전갈 가운데 있더라도
그럼에도 두려워 하지 말라는 말이다.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과 순종의 영역이다.
 
 
다만, 주의하라. 두루마리를 받아 먹어라. (겔2:8)
: 너도 그들처럼 패역한 종속처럼 되지 않도록.
구별되는 지점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이 아니다.
패역한 족속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들은 누구인가? 
누구보다 종교적인 사람들이다.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생각하였으니 망할지어다

1. simony_ 성직매매. 라는 말이
시몬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는 돈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는 이 능력으로 자신이 경험한
주술적 행위를 통해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
그를 주인으로 모신다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기 위한 게 목적이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주님을 향하도록 하는 것,
곧 자신은 사라지고, 주님이 드러나는 것.
시몬은 하나님을 사용해서
자신의 자아성취를 이루는데 목적이 있었다.
 
시몬의 잘못된 생각을 향해
베드로는 ‘생각하였으니’ – ‘망할지어다’라고 꾸짖는다.
도둑질, 살인 등과 같이 드러난 사건만을 주목하는 우리에게
성경은 생각을 통해 망하게 될것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곧이어 회개하고 기도하라고 권면하는데. 그 결과로는
생각을 용서해 주실것이라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 대한 가치를 기억해야 한다.
신자본주의 시대 온갖 눈에 드러나 보이고, 매매할 수 있을만한 가치에
주목하는 것과 별개로 주님의 가치를 계수해야 한다.
 
2. 시몬은 사마리아의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는 다는 것은 주님을 주인으로 모신다는
고백과 다름아니다. 하지만 이 고백으로 인해 만들어진 교회에
신자인지 모호한 사람들이 함께 있다.
 
알곡과 그렇지 않은 것에 관심을 둘 필요는 없다.
이유는 누가 가라지인지 우리 눈에는 알 수 없다.
한참 나를 괴롭혔던 후배는 놀라운 선교사역을 하고 있다.
바로와 바울은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분별과 심판은 주님의 날에 있다.
예수님 조차 가만두어라. 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주님의 역할을 대신 할 필요는 없다.
 
3. 사마리아는 유대와 원수 사이였다.
하지만 복음 안에서 그들은 가족이 되었다.
실제적으로 말씀 안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사고를
깨뜨리고 있다.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주님의 의와 사랑이 성취된다.
이 시기는 교회가 핍박당하는 시기이다.
 
문제가 없어야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삶 가운데 끊임없는 문제들,
핍박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뜻은 주님의 마음을 품고, 말씀에 순종하는
이들을 통해 거침없이 확장되고 이루어진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