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시점

두 번에 걸친 바벨론의 침공으로
많은 이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얼마의 사람은 예루살렘에 남았습니다.

?
예루살렘에 남은 이들은?
자신을 축복 받은 이라고 여겼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이들을?
그들의 죄로 말미암은 결과라고 정죄했습니다.
?
하지만 하나님은 생각은 다릅니다.
이 땅에 벌어지는 사건의 한 단면으로
우리는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승우의 소설 <생의 이면>을 보면
나중에 신학교를 다니게 되는 주인공이
왜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되는지를
독자는 이해하게 됩니다.
독자는 전지적 시점으로 주인공을 살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의 인생과 마음을
주님이 살피시고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성소는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거룩한 곳,
예루살렘에 남은 이들의 전유물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쫓겨 간 그곳에서 성소가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겔11:16)
그리고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허락하십니다.
?
주님이 부으시는 마음,
오늘도 내일도, 매일 주님을 바라면
주님은 허락하십니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주님이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2:13)

매일 아침 이 말씀으로 기도합니다.
내 안에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내 안에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요.
그 하나님이 당신의 기쁘신 뜻을 위해
내게 소원을 두시고, 그것을 행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날마다 이 말씀을 이루어 주세요.
오늘도 당신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내게 소원을 주시고, 이루어 주세요.
라고 아침마다 기도합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일상을 살아갑니다.
뒤틀리고 타락한 시대를 만나게 되지만
그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통해
거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
당신의 빛들을 빚어나가실 것입니다.

광우

한 가정을 돌보는 것도 힘든데
적게는 수십명, 많게는 수천명의
단원을 돌보고 사랑할 수 있을까?
광우는 몇 개월 전에 출간한 자신의 책 ‘핸즈업’의 시작을
그렇게 말도 안되는 이야기로 시작했다.
광우가 캄보디아의 공항에 도착했을 때
100여명의 아이들이 공항에서 PK노래에 맞춰
주님을 향해 손을 들고 춤을 추었다.
캄보디아의 빈민촌 아이 10명이
100명을 가르쳤고, 그들이 다시 3000명의 제자를 길러낸 것이다.
이렇게 세계 곳곳에 춤추는 예배자들이 자라나고 있다.
바로 이런게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
교회는 쇠퇴기를 맞이했다고 모두들 입을 모으고 있는 지금,
또 다른 영역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만큼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생명이 자라나는 자궁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혹은 변두리에 광우가 있다.
광우는 내 친구다.
한달간 실크로드를 횡단하며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고 지지했다.
내가 아니었으면 이것 저것을 못했을거라고 엄살을 부리지만,
내가 아니었어도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가며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쏟아낼 것이다.
그 열정이 결실을 맺게 되어 이제 새로운 앨범이 나오게 되었다.
앨범이 제대로 준비되기 전부터
앨범에 실린 곡들을 어떤 마음으로 담았는지 내게 쏟아냈다.
시큰둥하게 듣고 있는데 광우는 그 큰 덩치에 눈물을 찔끔거리기까지 했다.
무슨 이야기를 들려줬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을 향한, 사명을 향한 진짜 마음을 담았다는 것은 알게 되었다.
가사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주의 은혜 복음증거 마치려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여기지 아니 하노라.”
광우의 둘째 딸이 생명이 위험할만큼 앓았던 시간이 있었다.
자신의 아픔은 견딜 수 있지만 자녀의 고통은 부모로써 참기 힘들지 않은가?
야곱이 주의 천사와 씨름한 것처럼
당시 그는 몇 번이나 이 노래에 담긴 진심을 확인하고, 고백하고 또 고백했다고 한다.
노래 제목은 바울의 고백이지만, 사실은 장광우의 고백이기도 한 노래이며 앨범이다.

그대에 기대어

아내에게 이런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나와 결혼한 것 후회하지 않아?”
“응? 어떤 후회?”
“뭐. 예를 들면 갖고 싶은 것을
못 가진다는 것? 불안해 할 수 있는 삶?”
“내가 뭘 갖고 싶은지는 알고 묻는거야?”
아내가 웃으며 내게 질문했습니다.
“”나는 오빠와 아이들과 함께 있는
이 시간을 가져서 행복해.”
손에 잡히지 않은 행복을 말하는
아내의 대답에 내게도 행복이 전해져 왔습니다.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하나님께 많이 물었습니다.
사랑이 무엇일까?
일중독자였던 내가 사랑을 이해하기란 어렵고도 위협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조금 사랑이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
신혼초에 아내와 함께 기도할때
하나님은 내 마음에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명경은 사랑이 많고 지혜로운 여자다.”
나는 하나님이 주신 마음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살아가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면도 만나게 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은 하나님 같지 않아서
한결같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수없이 흔들리는 영혼입니다.
그런 아내를 보고 내 마음에 날마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사랑이 많고 지혜로운 아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기도와 실제의 모습은 이격이 있었지만
믿음으로 그것을 날마다 고백했습니다.
어느새 시간이 8년이나 흘렀습니다.

요즘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놀랄때가 많습니다.
내 믿음에 아내가 의지하는게 아니라
아내의 믿음에 내가 의지하는 것은 아닐까?
앞으로도 수없이 흔들리겠지만
그렇게 서로에게 기대어 가며 살아가는 것,
사랑의 작은 한 부분을 알아갑니다.

에스겔의 걸음

에스겔에게 허락하신 사역은

사람들에게 동의를 얻기 힘든 길이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장치, 혹은 은혜로써
하나님은 반역하는 족속들앞에
두려워하지 않도록 에스겔의 이마를
단단한 금강석 같이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이 사역이 얼마나 쉽지 않은 길이었는지
에스겔은 근심하고 분한 마음을 가졌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사역자가 어떻게 이럴수 있을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쓰임받길 원하지만
한편에선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고 싶기도 합니다.
에스겔은 그의 아내가 죽었을때조차
슬픔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특별한 선지자로써의 삶을
살수 있었던 이유를 찾는다면
짧은 한 구절에서 찾겠습니다.

“내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가니
여호와의 권능이 힘 있게 나를 감동시키시더라” (겔3:14)
여호와의 권능이 힘 있게 나를 감동시키시더라는 이 말을 직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다윗이 울 기력이 없을만큼 울었을때도
여호와를 힘입어 일어났고,
바울이 계속된 핍박으로 더이상 걸어갈 수 없을때
주님이 곁에서 힘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계획한 먼 미래의 삶을
하나님이 다 알려주셨다면
우리는 감히 오늘 한 걸음을 뗄 수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주님의 권능이
나를 힘 있게 감동시킨다면
오늘의 걸음은 걸을 수 있을거라 믿습니다.

믿음의 사람들과

이번주는 금요일(6.24)에 전시장에 있을 예정입니다.
점심약속외에는 아직 정해진 약속은 없으니
편하게 방문하셔서 교제나누시면 될 것 같습니다.

지난주에는 아현동, 인천, 예산, 멀리 포항에서 오신 분들과
짧게, 또는 긴밀하게 만남을 가졌습니다.
믿음의 사람을 만나는 일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듣다보니 하루가 다 지났습니다.

틈틈히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다 스스로에게 질문합니다.
내가 전한 말씀은?주님이 그대로 이루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성품에 기대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는 과연 믿는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순간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묽어지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다보니 믿음의 사람을 만나는 일은
내게도 감사한 일입니다.
혼자 설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고난과 절망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몸을 이루는 것 또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십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그리고 함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주님의 마음..

몇 번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
내 마음은 이 결정을 내렸을 때
어떤 방향으로 흐를 것이라는
짐작과 예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까운 이의 마음을 지켜주지 못하면
더 멀리 가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나는 그것을 택했습니다.

기도해보았습니까?
그 기도가 명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서로의 이익을 담보하기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는 속셈도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잘 한 것일까?
주님, 내 마음에 말씀해주세요.
표피적인 것에 내 결정과 관심을 쏟지 않고
아버지의 마음을 주세요.

부끄러움과 맞선 시간

강의를 마치면 가장 어린 아이에게 묻곤 합니다.
“지금 선생님이 무슨 말 하는지 이해할 수 있겠어?”

바보같은 고백이지만
이십대 중반이 넘어서야
왜 예수님이 어린양이신지 알게 되었습니다.
모태신앙이라 어릴적부터 이런 가사의 찬양을 불렀을 뿐 아니라
찬양을 부르며 눈물도 흘렸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모른채 교회서는 직분을 맡으며
모든 것을 알고 있는것처럼 행동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나이가 들어서
아무것도 모르는데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어른이 될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담당 전도사님에게 용기내어 이렇게 물었습니다.

“저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요.
알고 있는거라고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돌아오는 답변이 놀라웠습니다.
‘다 알고 있네. 그러면 됐다.’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내용이지만,
이런 서술 자체는 불신자도 알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언어가 가득했던 세상에서 오랫동안 자랐습니다.
누구도 이야기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 또한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그 주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신지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몇 년전엔 사람들을 모으고 매주일 밤마다 시간을 정해서
캠과 마이크를 가져다 놓고 사람들에게 주님을 말했습니다.
종교적인 언어가 아니라 주님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아서
왜 예수님이 어린양이신지, 용서, 영적전쟁, .. 을 말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모니터앞에서 애타게 기도했던 시간들..

거의 반년이 넘도록 부끄러움과 맞섰던 시간이었습니다.
다시 하라면 못할 장면들이지만
그 분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를 매일 고민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가지고 계신 의문과 답답함을
주님께 여쭤보세요.
그것은 당신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기도제목입니다.


내가 경험한 의문과 답답함에 주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느끼는 의문 앞에서 주님께 질문해 보세요.
“주님의 마음을 구합니다.
주님은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어떻게 하길 원하시나요?”

질문에 명쾌한 답변을 주시진 않지만
계속된 질문을 통해 주님은 당신의 마음을 나눠주실거예요.

감동을 따라 노트에 생각나는 말과 문장과 생각을 적어 보세요.
‘내가 할 수 있을까요? ‘, ‘그 이후에 벌어질 어려움’
이런 고민은 나중으로 미뤄도 됩니다.
‘기도하게 되면 아마 주님은 나를 이런식으로 내몰거야.’
순종하지 않으려고 주님의 마음을 구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는 마세요.
우리는 누구도 주님의 뜻을 명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기도하지 않게 만들려는 사단의 계략입니다.

 

부담과 두려움 조차,

책이 나온지 아직 며칠 되지 않았지만
사람들에게서 여러 절절한 메세지를 받았습니다.
벌써 작은 변화와 은혜를 만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마음에 부담이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나는 죽었습니다. 라고 고백하지만
여전히 이 책의 주제가 가지는 부담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게 됩니다.

오전에 아내와 함께 기도했습니다.
이 책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부담과 두려움은 아내에게도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아내에게 책을 가장 먼저 선물했는데
아직까지 아내는 첫 장을 펼치지 못했습니다.
다음주에 숨을 고르고 읽을 생각이라 합니다.
우리 부부에게 이 책은 상당한 부담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책을 통한 기대가 있습니다.
오전에 기도한 것처럼
이 책을 통해 이루실 아버지의 마음.
아파하고 깨어진 가정과 청년들에게
아버지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책에 쓴 것처럼
문제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문제가 있지만 그 문제를
주님앞에 가져가려 합니다.
이런 형태의 두려움 조차 처리하지 못할 정도로
주님은 작지 않으십니다.
모든 문제 이면에 감사가 있음을
나는 도리어 감사를 택합니다.

그리고 내 영혼에 선포하겠습니다.
주님이 나의 주님이십니다.

p.s
유기성 목사님이 칼럼에
책에 대한 소개를 적어 주셨습니다.
출판사 직원들도 이렇게 따뜻하게 적어주신 목사님은 없었다며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이 책을 진행하며 고마웠던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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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얼굴을 봅니다.

중국에서 잠시 한국에 들른 선교사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나자는 약속.
한국에 머물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서
급하게 잡은 약속이지만 흔괘히 집을 나섰습니다.

나는 이 분을 만나서
어떤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이 만남을 통해 어떤 일을 하실까요?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나는 지금 이 시간을 기대하며 순종할 뿐입니다.
아무것도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지만
나는 매일을 기대하겠습니다.

내 모습을 살피면
나는 어느 것 하나 할 수 없습니다.
할 자신도 없구요.
하지만 주님을 바라봅니다.
최소한 기도해드릴 수 있겠네요.
그러면 이 분을 통해 주님 뜻 이루시겠지요.

매일의 시간을 경영하시는 주님,
주님의 얼굴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