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

1. 스데반이 죽고
교회는 박해를 당했다.
흩어지는 그들은 두려움속에 질문했을지 모른다.
‘하나님은 과연 일하시는가?
나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은 유효한가?’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
주님의 약속은 성취되고 있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행1:8)
이 성취의 신비로움은
박해로 흩어진 빌립을 통해
사마리아로 복음이 전해졌으며
이 박해의 중심축에 있었던 사울(바울)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중심축으로 이동한 것이다.
 
사람도, 시대의 흐름도
우리는 내다보지 못한다.
다만 오늘의 아픔과 상황만을 보고 평가할 뿐이다.
나는 그래서 오늘의 판단을 유보하게 된다.
 
2. 사마리아 지역에서 시몬도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된다.
그것도 전심을 다해 빌립을 따라다닐 정도로
열심이 있었다. (행8:13)
그는 마술을 행하여 사람들로 부터
신적인 평가를 받을만큼 탁월했던 자다.
소질이 다분하여 나중에는 돈으로 성령을
값주고 살 수 있다고 믿은 자.
그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원했다.
그는 후에 그리스도인을 더럽히고 교회를 흔들었던
영지주의의 창시자가 된다.
 
큰 능력을 가진 자는
더욱 주님앞에 두려움으로 서야만 한다.
사람은 자신을 스스로 평가할 수 없다.
큰 능력이나 큰 결과를 낸 사람들의
마지막을 살피면 다들 좋지가 않다.
믿음의 어른들중에 인생을 잘 마무리 한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뉘는 편이다.
일찍 돌아가시거나, 그 사람만의 가시를 가지고 있다.
다윗이 기름부음 받았지만 광야가운데
거했던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 만나는 광야에서
나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어떤 삶을 살았던가? 살것인가?

스데반의 죽음은
설교를 채 마치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은 죽음이다.
 
그의 죽음 앞에서
스데반은 말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행7:56)
하나님은 스데반에게
하늘나라의 영광을 보이셨다.

사실 하늘이 열리는 모습은
일반적인 우리 눈으로는 보지 못하는 모습니다.
만약 열린 하늘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나는 부끄러울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비교한다.
누구의 삶이 누구에 비해 
더 나은 삶인가?
내가 좌절하고 낙담하는 이유도
문제 없는 누군가와 비교했을 때
내 모습은 갈등과 패배가 가득하기 때문이 아닌가?

 
눈에 보이는 것과 비교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비교한다.
하지만 마지막에 주님앞에 섰을때
나는 무엇을 부끄러워 할 것인가?

굳이 그때까지 가지 않더라도

지금 열린 하늘 아래서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부끄러워 할 것인가?
 
스데반의 죽음은
비참한 죽음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은 아니다. 라고 말씀하신다.
열린 하늘 앞에서 그는 
자신의 죽음을 도리어 감사했을 것이다.
 
나는 열린하늘 아래서
어떤 삶을 살았던가?
오늘 어떤 삶을 살것인가?
성령충만을 원어적으로 살펴보면
존재하다는 말 외에 가까이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열린 하늘 아래 사는 삶은
내 안에 계신 주님,
그리고 가까이 임재하고 계신 주님을
인정하는 삶이다.

늦어도 가장 빠른 길

유대인들은 성전을 귀하게 다루었다.
그러므로 성전을 모욕하게 되면
신성모독이 된다.
그런데 성전이 거룩한 곳인 이유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어디인가?
 
 
성전 자체가 거룩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룩한 곳이다.
‘하늘이 내 보좌이고 땅이 내 발판이다.’
하나님은 성전이 거하셨지만
동시에 그 모든 것의 주인이었다.
그럼에도 성전 이외의 곳에서는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다.

결국 하나님의 뜻과 대치하고 있는
유대인을 향해 스데반은 말했다.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행7:51)

하나님 편에 서있는가?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있는가?
스스로 알지 못한채 각자의 자리에서 완강하게 서있다.

나는 과연 하나님 편에 서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말씀을 통해 주님의 마음을 배워야 한다.
세상이 가치있고, 성공한다라는 개념과
주님의 가치는 차이가 있다.
이 가치를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주님의 마음을 따라 살아가는것이 아니라면

주님의 이름으로 이것도, 저것도 하지만
선지자노릇까지도 하지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송아지를 만들어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돌아서시고
그들이 하늘의 별들이나 섬기게 내버려 두셨다. (행7:41-42)
주님이 나를 내버려 두시는 것만큼 아픈 시간은 없다.
차라리 당장 아프고 끔찍하더라도
주님이 내 인생에 개입하셔서
내 닫힌 눈과 귀를 열어 주님을 만나기를 
그것이 가장 복된 시간인것을. 가르쳐주세요. 주님.

일상의 걸음, 거룩한 땅

알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 알았다면
우리는 그런 말도, 그런 행동도 하지 않았을텐데요.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에 
불꽃이 붙었습니다.
불에 타서 사라져야 할 가시나무는
계속해서 불타오르고
주님은 그 앞에서 모세에게 말합니다.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출3:5)

바로의 명령으로
히브리인 남아들은 다 죽임을 당해야 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계획을 이미 시작하고 계셨습니다.
바로의 딸에게 건짐받은 모세는
당시 최고학문이었던 이집트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광야로 내몰림으로써 무능력한 인생을 철저히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40년의 시간.
그 시간은 모세로 하여금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만듭니다.
그때 시내산 광야에서 모세는 소명을 받게 됩니다.

어디가 거룩한 땅인가?
무기력하게 광야에 머물던 모세의 일상에
주님이 찾아오시자, 그 곳은 거룩한 곳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머물고, 주님이 일하시는 곳이
바로 거룩한 땅입니다.
이미 40년의 시간동안 머물던 곳은
주님이 찾아오시자 그는 신을 신고 머물지 못할 성전이 되었습니다.

 
내 안에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만물보다 부패해서
불에 타서 사라져야 할 
나는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의 임재가 머무는 곳,
내가 바로 그 곳입니다.

무능력하고, 무기력하게 

걸어다니는 나의 광야, 일상이 머무는 곳에
주님의 뜻과 계획이 있습니다.
모세의 40년이 내게 어느 지점이 될지 알지 못하지만
가시나무 떨기에 여전히 타오르는 불꽃을 
내보이는 곳은 
아주 먼 땅이라던지, 거룩해 보이는 지점이 아니라
일상이 이어진 시간과 공간 입니다.
내 부끄러운 시간과 발걸음들이 연결된 지점이기도 합니다.
 
나는 알지 못하지만 오늘 내가 선 곳, 
부끄러운 지점 가운데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일상의 걸음이 곧 거룩한 땅입니다.
 

문제는 풀면 된다

이 땅에 완전한 교회는 없다.
초대교회를 그 모델로 삼지만
그조차도 완전하지 못하다.
교회 안에 헬라파와 히브리파 사이의 알력이 생겼다.
하지만 문제는 풀어내면 되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 문제가 없는 것을 꿈꾸게 되면
현실속에 우리는 계속 낙담할 뿐이다.

문제는 적절하게 풀어내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가정안에는 늘 문제가 있다.
사랑해서 만난 사이인데 
문제가 없을줄로 생각했는데
남편과 아내 사이에 문제가 생긴다.

 

문제가 생겼다고 그자체를 비난하게 되면
문제는 더 큰 문제로 불어난다.
문제가 생겼다는 게 근본적인 잘못이 아니라
잘못된 전제를 가지고 있는게 문제다.
생긴 문제는 적절하게 풀어내면 되는 것이다.

 

사도들은 구제사역으로 인해
말씀 사역을 소홀히 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했다. (행6:2)
이는 기도와 말씀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반증이다.
굳이 이 말을 하는 이유는
기도와 말씀만큼 소모적이고 실용적이지 못한 
것도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마음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면
주인을 알아 가르치고, 그 분과 대화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한편으로
기도와 말씀이 중요하다고 해서
나머지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구제사역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이를 따로 충원했다.
오직 기도와 말씀에만 몰두한 것은 
말씀을 전하는 사도의 역할로의 구분으로 이해해야 한다.

 

일을 맡길 때 지혜롭기만 한 사람이면
실용적인 선택만을 따를 수 있다.
성령충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일처리가 탁월하지 못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곱사람은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자들이었다.

 

지혜와 믿음과 신앙, 삶의 모습의 관계.
완전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겠지만
어지러운 시대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주님이 부으시는 믿음과 지혜와 존경받을 어른이 
세워지기를 기도한다.

 

문제가 생기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이런 시간을 통해
유대교의 지도자였던 제사장 무리들까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제사장 무리들을 말과 말로써
설득하고 포섭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그들의 변한 삶을 통해
그들 안에 ‘진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주변 사람들은 우리를 지켜본다.
아무리 말을 해도 
말 자체는 힘이 없다.
수많은 말들 속에 걸어가는 걸음. 삶을 통해
사람들은 진짜를 알게 된다.

믿음과 생각은 진공상태에 있지 않다

밤중에 잠을 자다가 깨어났다.
주님, 주님, 당신의 도우심을 구했다.
나의 고난 받는 것이 무엇인가?
고난 받는 것은 당장 생각나지 않더라도
불편하거나 불만인 것들은 더러 있다.
 
 
사도들은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채찍질당한 뒤 도리어 기뻐하며 공회를 떠났다. 
왜냐하면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았다는 사실이
합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행5:41)
 
 
믿음이나 생각은 진공상태에 있지 않다.
어떤 환경과 어떤 전제위에 있느냐에 따라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생각과 판단을 할 수 있다.
 
 
사도들은 원래 용기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중에 가장 나서길 좋아하는 베드로조차
여종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했던 자가 아닌가?
하지만 그들은 달라졌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했기에 그들은 
끝이 정말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끝은 또 다른 심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심판을 하시는 분이 이제 그들 안에 거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상을 심판하신 이가 세상에서 하신 일은
다름 아닌 가장 낮고 낮아지는 일이었다.
사도들은 불편하고 불만을 너머 능욕을 받고 
고난 당하는 일을 도리어 기뻐했다.
그들은 주님 안에서 이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내가 일상 속에 만나는 
수많은 사건들 앞에서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물론 무조건적인 양보나 실패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여러 결과에 대해서는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이 문제는 나는 누구이며, 주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의 믿음은 광야에 있을 때

공회의 심문과 능욕앞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 가말리엘이
제자들을 변호하고 나섰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로 비롯되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해 싸우는 사람이 될것이다.’
내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 말하는 시대,
하지만 내 뜻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있고
나의 반대편에 서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일 수 있다.

압살롬의 반역앞에 
피난하던 다윗에게 
시므이는 돌을 던지며 저주했다.
그 상황에서 다윗은 시므이를 내버려두며 말한다.
“그를 내버려 두어라.
그를 통하여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상황이 내게 억울하다면, 하나님이 갚으신다.”
하나님은 이해되지 않는 상황속에
원수 갚음이 하나님께 속했다고 고백한다.

그의 믿음은 광야에 있을 때 빛을 낸다.

중고서점에서

딸 온유는 책을 좋아합니다.
이제 자기가 좋아 하는 작가의
작품을 골라 읽기도 합니다.
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는 편인데
자기 책을 한 권은 갖고 싶어 하는 눈치라 
중고서점에 데리고 갔습니다.

 

한참을 고르다 선택한 책을 결제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왜 이 책은 접힌 부분이
많으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이 책이 중고책이라는 이야기도,
그리고 헌 책과 새 책의 차이를
이야기해주지도 않았습니다.

딸이 한, 두살만 더 나이를 먹으면
그때 가르쳐 줄 단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품의 이름보다 중요한 게 
제품의 가치이며
겉으로 드러난 모양보다
더 중요한 가치들에 대해서 말해줄 때
이런 이야기를 할 생각입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생각이어도
지금 말해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차근차근, 아이가 충분히 이해할만한 나이와 상황에
말해주어야 겠다는 생각..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내게 은과 금은 없지만
내게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

이 얼마나 놀라운 선언인가?
내게 은과 금이 없는 것은
신자본주의 시대에 
얼마나 슬프고 암담한 상황인가?
도리어 제자들에게 아무 희망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슬프거나 두렵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부활하신 주님을 경험했으며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경험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두려움보다 크신 분이시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예수님은 두려움보다 크신 분이라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

경험하려면 부딪쳐야 하고
경험하려면 말 그대로 경험해야만 한다.
경험하려면 내게 익숙한 것과 결별해야 한다.
그 낯선 땅에서 비로소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 저것 다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결국 둘 다를 가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실패는 빠를 수록 좋다.
옳은 길을 향해 가는 걸음이라면 더더욱.

삶의 방향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죄나 심판에 대한 돌이킴은 
관념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실제적이다.
그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절박함 때문에 사람들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라고 절박하게 도움을 구한 것이다.
돌이키지 않으면 자신은 죽음에 이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을 향해 자신의 존재를 열게 되는 
접점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 여기지 않으면
예수님은 그저 자신의 꿈을 이루는데, 혹은 자신의 어려움을 구조해주는
조력자나 내 말에 귀기울여주는 좋은 친구 정도에 머물기 때문이다. 
여러 조각을 배제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내 인생에 없어서는 안되는 그 접점이라는 것이 있다.
그게 아니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은
내게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접점앞에 나는 상대를 향한 용서, 나에 대한 절망과 기대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등, 여러 가지를 설명하거나 확대할 수 있는
실마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주로 영접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아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더하게 하셨다. (행2:47)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은 것은 
그 결과로서 마땅하지만 
본문에서는 찬양하다라는 말과 평행으로 
사용되었고 능동태여서 다른 사람에게 호의를 갖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곧 구원 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찬양했고
사람들에게는 좋은 태도를 가졌다.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야 할 방향과 태도이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리고 그 분이 나를 향해 행하신 일을 깨닫게 되면
주님을 생각할 때 찬양할 수 밖에 없게 되며
그 분의 마음을 따라 
주님이 내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나도 그들을 향해 사랑의 행위를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