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그렇게 되지 않을까?

언젠가 목회하게 되지 않을까?

나는 목사안수를 거절한 후로
목회에 대한 생각을 접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멘토와 같은 이들은 잊을만 하면
그 주제를 이끌어 냈습니다.

아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 안에 작은 소원들이 생기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당장은 아니어도
주님 말씀하시면 그 일을 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을 잘 준비하자고 서로를 응원했습니다.

아내와 나누는 수많은 이야기들 속에
기쁨을 느낍니다.
아내는 항상 준비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만 주님 앞에 온전하면
우리 가정을 통해 주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에는
어떤 시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그 때, 나는 기쁨으로 기다리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내 마음에 묶인 흑암의 세력들을 빛으로 몰아내소서.

선해 보이는 것과의 싸움

말씀에 순종해서
아내를 사랑하려고 결심했을 때,
가장 갈등했던 부분이
선해 보이는 것과의 대결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작업하려 들 때 조차도,
주님께서 그 시간에 원하시는 것이
아내와 시간을 보내고, 또는 설거지 하는 것이라면
나는 작업이나 사역을 내려놓고
설거지 하거나 아내와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픔의 이유는 모르지만

지난 주말즈음부터 이리 저리 마음이 불편했다.
봄을 타는 건가?

여전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데
왜 이렇게 나를 잡아 끄는것들이 많은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확인한 바다.
이게 현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조차도 이 땅에서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데
수많은 장벽들이 존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셨다.
장벽이 존재하지 않는 이 땅은 영적 진공상태이거나, 비현실적인 이상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나라를 꿈꾸는 것이다.

그런데 물리적인 환경외에
추가적인 질문은
마음의 문제이다.
‘내 마음의 문제는 왜 이런가?’
‘물리적인 환경은 나를 몰아세워도
그냥 내 마음은 늘 평안하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
‘지금 내 마음은 왜 이럴까?’

사람들마다 불편할 수 있는 여건은 모두 다르다.
내 경우에는 오해받을 수 있는 상황.
특히 나는 정당하지만 억울한 상황에 대해서 힘들어 할 때가 있다.
어쩌면 자기의가 많아서일 수도 있다.

어쨋든, 그런 연유에서 나는 다윗의 심정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사울왕에게 쫓긴 것 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나발처럼 자신의 마음을 훼손하는 모욕에 대한 부분은 참을 수 없어서
다윗은 부하들에게 칼을 차라. 라고 분개했다.

또는 다윗은 사울왕에게 쫓기는 십여년의 시간을 보내며
사무엘에게 기름부음받은 사실을 아파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주님을 사랑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왕이 되겠다고 나선것도 아닌데 말이다.

 

다른 사람들도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이리 저리 마음이 불편하지 않을까?
내 마음이 불편할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내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다면 두 가지의 유익을 얻을 수 있었을까?

한 가지는
‘나는 기도했을까?’
나는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기도한다.
마음으로도, 내 입술로도 끊임없이 주님을 찾는다.
오 주님..
끊임없이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
심지어 잠꼬대로도 나는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
그것은 이 땅에서의 한계와 동시에
내 마음을 아시는 주님에 대한 갈망이다.

물론 불편하지 않는 마음으로도 여전히 나는 주님을 노래할 수 있다.
꼭 고난과 아픔을 당해야만 기도하는가?
보통의 상태에서도 우리는 기도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절박함과 절실함은
우리가 인간인지라 전혀 다르다.
결국 이 불편함과 부족함이 주님을 향한 나의 갈망을 더해가는구나.
고난이 나의 구원을 더하여 주는구나.
주님을 더욱 바라보게 만드는구나.

나머지 한 가지는,
이 마음 때문에
나의 허기 때문에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거나 위로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 상함 심정을
성경속의 다윗의 심정을 통해 살피고 위로받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주님은 왜 이 마음을 허락하셨는가?
이런 두 가지 유익때문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왜나하면 거미줄처럼 얽혀진 수많은 상황과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속에는 말 그대로 거지같은 내 성질이나 실수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속에서도 여전히 신실하신 주님을 바라보기로 한다.

시편 63편은 다윗이 유다광야에 있을 때 지은 시다.
이 시는 아마도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급히 도망했을 때 지은 시일 것이다.
왜냐하면 마지막 절에 자신을 왕이라고 표현하는 등을 봐서
그가 사울왕에 쫓겨 다닐 때를 제외하고는
이렇게 광야에서 고난을 겪은 적은 압살롬의 경우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그는 그 곳에서 우리가 춤추며 찬양할 때 불렀던 바로 그 노래를 지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하나이다.”
그는 원수의 멸망이나, 왕궁으로의 복귀, 자신의 생명을 구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인자. 곧 언약적 사랑을 노래하며
주님의 이름을 노래했다.

다윗이 아들의 반역으로 인해
광야로 쫓겨났지만
그의 영성은 광야에 이르렀을 때 다시 생기가 돋기 시작했다.
그는 광야에 있었지만
오늘 우리가 읽었던 말씀처럼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라고 이야기한다.
광야이지만 주님이 함께 하시면 성소다.
이 성소라는 말은 원어로 <코데쉬>라는 말인데
거룩한 장소, 구별된, 거룩함 같은 뜻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각자의 삶이 비록 누추하고 절망 가득해 보이지만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삶의 터전과 이곳이 바로 거룩한 곳, 성소가 된다.

잘했다는 칭찬

동성애를 다룬 영화를 감독한
김광진감독을 인터뷰하고 촬영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곳곳에 각각의 분야와 주신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며칠전에 덕규형의 교수실에 앉아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설명하기 힘들다 말했습니다.
한 분야에 집중하여서 역량을 강화하는게 좋을것인지
작년부터 자주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주님이 주시는 마음에 순종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사람들을 만나고 돌보고, 말씀을 전하고
이 모든 것들이 주님의 때에 어떻게 연결지어질까?
과연 연결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연결되지 않아도
전략적인 포지션을 잡지 않아도
드러나지 않아도
나는 주님 한 분이 보시고 ‘잘했다.’칭찬하시면 그만입니다.

이제 작업을 마무리하고 씻고 자려고 합니다.
방 너머에서 아내의 기도소리가 들립니다.
기도하는 아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과의 사귐

주님, 사랑하고 사랑합니다.
매일의 시간속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습관이 되어 끊임없이 기도하며
주님과 대화하길 즐겼는데
스마트폰과 함께 큰 이슈들이 생기면서
도리어 좋은 습관들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 불안합니다.

문앞에 적어 놓은 글들처럼
영원하지 않는 것들 때문에
영원한 분과의 사귐을 놓치지 않게 도와주세요.

오늘은 주일학교 교사에 대한 책을 구입해 읽었습니다.
한국교회의 궁극적 대안은 주일학교라고 하는데
작은 교회들에게 이 문제는 쉽지 않은 고민일 것 같습니다.
그 대안이 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주세요.

기록하는 삶

지역장 속장 영성일기 세미나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아이들은 모두 뻗어버렸습니다.
다행히 집에 올때까지 버텨주어서 5층까지 안고 가는 수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긴 세미나 기간중에 내가 감사했던 것은
세미나의 내용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약 10여년전 생일에
기도하던중에 주님은 내게 삶을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일에 충성하느라 나는 매일같이 하루하루를 기록했습니다.
당시는 명령에 대한 순종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영성일기를 통해 얻는 유익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거기다 저는 추가로 글을 쓰는 훈련이 되었습니다.
A4용지 한 장의 원고를 가지고 며칠을 고민하던 수준이었는데
매일의 훈련은 눈에 보이지 않을만큼씩 나를 자라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함께 일기를 나누며
많은 선교지에 계신 분들과 주님안에서의 교제가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이 의도하신 일이 무엇인지 다 알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남는 것은 감사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감사를 지금 소급해서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어차피 감사할 제목이라면 굳이 내 눈과 손에 그려진 후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고백을 드리면 좋을 것 같아서입니다.

얀양감리교회서 연락이 왔습니다.
작년에 전시회 할 것에 대한 연락을 받았는데
어떻게 진행하면 좋을지에 대한 문의입니다.
인도와 말레이지아와 아프리카로의 여정이 있습니다.
더 미뤄야 할지, 바쁘더라도 진행해야 할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두려운 감정.

수영이는 주중에 신학교 수업을 듣습니다.
신학교 수업은 생각보다 학업량이 많습니다.
나는 신대원을 다닐때 조금 요령을 피우긴 했지만
학기마다 매일 3과목정도가 배정되어 있었고
각 교수님마다 일, 이주일 주기로 책에 대한 과제를 내주셨습니다.
그래서 매주일마다 제출해야 할 과제가 최소 5개는 넘었습니다.
쉽지 않은 스케줄을 아픈 몸으로 들으려하니
몸이 많이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전시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수영이는 여러 두려움 때문에 한참을 울었습니다.
두려움.
두려움은 내가 이십년 이상을 싸워온 대상입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채 두려움을 경험하지만
나는 너무 어린 시절에 두려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감사했습니다.
수영이에게 해줄 말이 있었고, 위로해줄 말이 있었습니다.

주님, 내 모든 감정과 경험을 사용해주세요.
당신이 위로받기를 원하는 사람, 함께 하길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 모든 것들을 사용해주세요.

어떤 전시회

하나님은 얼마나 아름다우신지요.
그제 디스토니아를 앓고 있는 수영이를 만나고
어떻게 이 아이를 도와줄지에 대해 고민하며 기도했습니다.
마음 한 구석에 계속된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 아이의 글로 책을 만들어주는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지만
만드는 과정과 비용 뿐 아니라
누가 이 책을 읽어줄 것인가도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수영이를 주제로 전시회를 여는 것에 대한 감동이 들었습니다.
거의 동시에 솔라갤러리 이영주 관장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내가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보고 주님이 주신 감동을 전해줬는데
내 마음과 거의 같았습니다.
그래서 통화한지 십분도 안되서 잠정적이지만 결정해버렸습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여러 일과 선교 때문에 외국에 나갈 시간이 걸려서
수영이와 함께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이 넉넉하진 않지만
주님이 주시는 마음을 따라 진행해볼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두근거립니다.

시작이 반이라고,
작고 연약해 보이는 한 영혼을 통해
누군가 일어나는 꿈.
주님 감사합니다.

 

솔직한 하루일기

나는 일기를 솔직하게 나누지 못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비정상적인 삶, 이해되지 않는 가치를 말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매일의 삶을 통해 주님은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하시는 분이신지.

지난번 러시아 코스타에서
김병삼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자매가 쓴 글을 전해받았다.
장애를 가졌지만 글을 쓰는 것이 꿈인 아이를 만나줄 수 있겠냐고 했다.
그렇게 한달이 지나 오늘 만났다.
그녀는 디스토니아를 앓고 있는 청순한 이미지의 아이였다.
그에게 오늘 만남은 꿈만 같을정도로 힘이 되는 시간이었다고 한다.
나는 이 아이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어떤 도움을 줄 수있을까?
몸을 고정할 수 없어서 한 번도 제대로 사진을 찍어 보지 못한
이 아이에게, 자신이 얼마나 예쁜 미소를 가졌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아이는 신학을 전공하고 있다. 글을 통해 교회사역을 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나는 조르주루오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다.
자신의 그림을 통한 소원을 말해주었다.
너의 글이 그런 맥락에서 귀하게 사용되길 소원한다고 말했다.
한 사람이 너의 글을 통해 변화된다면
하나님 나라에서는 잔치가 벌어질 것이다.
한 사람의 가치는 우리가 이해하는 그 이상이다.
그렇다면 그 아이 뿐 아니라 나도 오늘 천국잔치를 만난것이다.

아현병원에서 기도했다.
나는 비정기적이지만 의무감을 가지고
이곳에서 기도한다.
아버지의 뜻하신바가 이루어지기를
과연 그날이 올까? 하는 시간들을 보내기도 했지만
주님이 주신 마음에 내 걸음을 쌓아갔다.
아현병원까지는 집에서 1시간 40분 정도가 걸린다.
왕복 총 3시간이 넘는 시간을
기도하기 위해 걸음한다는 것은 꽤 부담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의미있다 하신 일에
시간과 비용을 사용하는 일은 복되다.
왜냐하면 내 꿈과 소원이 예수님께 있다면
내 걸음을 헛되게 하실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걸음을 걷고 기도를 하고 사람을 위로하면
내게 아무것도 주어지는 것이 없다.
나는 내 먹거리를 찾아 땀흘려야 한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주님이 먹이신다.
이 말은 나는 가만있어도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을 멈춰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결혼하기 전에 작업에 몰두할 때
함께 하길 원하는 업체들이 있었다.
나는 오퍼를 다 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정된 시간속에 모든 오퍼를 받게 되면
내가 작업할 시간은 뒤로 미뤄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균형을 맞추는게 관건이었다.
내가 생활할 수 있는 정도를 일하고
또 나머지 시간은 작업하고 주님의 나라를 꿈꾸었다.
사실 결혼하고 나서는 위기감이 들때가 많다.
월급을 받는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는 위기감인데,
말그대로 다음달에 생활비가 어떻게 될지 모른채로
나는 두려워하지 않고 소비해야만 하는 것이다.

얼마전에 나는 스스로에게 법인카드를 발행했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그들을 돕고 함께 하는 시간에
인색해질 수 있는 불안한 내 마음을 발견한 것이다.
과연 내가 이렇게 돈을 지불해도 되는 것일까?
그러다가 결정한 방법이 나 스스로에게 직불카드로 이름뿐인 법인카드를 발행했다.
물론 법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장난같아 보이는 이 결정은
놀랍도록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 카드는 사람들을 만날 때 섬기고, 사역을 위한 목적이라고 명명하고
몇 달간 부지런히 나는 이 카드를 긁고 있다.
카드를 발행했을때나 그렇지 않을때나
내가 가진 계좌에서 빠져나가는 돈이지만
어떤 믿음이 생겼다.
그래서 생활비를 써야 할 경우에는 이 카드를
사역을 위한 목적이라는 저 카드를 사용하는 것이다.
직불카드라 내가 미리 입금해 놓은 액수가 동이 나면
나는 더이상 법인카드를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내 마음에서는 몇 십년이 지나도 한도초과는 발생하지 않을 것 같다.

아현병원에서 화요일마다 공간을 내줄수있으니
무엇이든 해보라고 말했다.
나는 고민하며 기도하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게 나는 편하다.
하지만 주님이 원하신다면 나는 그것이 무엇이건 나는 할 것이다.
주님 주시는 마음에 순종해서 인터넷방송으로도 반년간 사람을 모아 예배를 드렸다.
그보다 더한 것도 할 것이다.
다만 내게 중요한 것은 과연 주님이 원하시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기도하자.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자.
결국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영성일기 세미나가 있는 날, 교회로 향하기전에 김우현감독을 만났다.
우현형 생각이 나서 연락을 드리고 찾아갔다.
나는 늘 형이 고마운 존재다.
주님은 내게 고마운 사람들을 붙여주셨다.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선배는 내게 또 하나의 길이다.
나도 길을 따라 걷고, 나도 누군가를 위해 길을 낼 것이다.
길의 폭이 중요하지는 않다.
길이 아주 작아서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만족하실만한 궤적이면 충분하다.

온유가 밤마다 40도의 고열로 시달렸다.
그런 온유를 약먹여서 학교에 보내는 아내도 대단하고
아침에 가방메고 학교에 나가는 온유도 기특하다.
가족이 함께 기도하는데 소명이의 기도가 귀엽다.
“누나의 열이 떠나갔으면 좋겠어요.”
소명이의 기도때문에라도 온유가 빨리 낫았으면 좋겠다.

나는 놀라운 하나님의 나라를 날마다 경험한다.
그 분은 인색하지 않으신 분이시다.
그렇다고 내가 파산하지 않는다는 말도 아니다.
그 분은 우주의 주인이시다.
그 분은 내 아빠다…

하고 싶은 일을 절제

하고 싶은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고 싶은 일들은 대부분 돈이 벌리는 일들은 아닙니다.
그래서 혼자 보는 노트에다 이런 저런 목록을 적어 놓았습니다.
사람이라 한꺼번에 모든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살아가려면 절제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꼭 하고 싶은 일들은 있습니다.
내년에는 이것 저것을 하고 싶습니다.

아내가 회사를 다닐적에 이런 기도를 할 것을 부탁 했습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것처럼
내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여 주시고
그래서 주님의 통치함을 받게 해주세요.
내가 있는 곳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주세요.
반복되는 일상 속에 이렇게 기도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보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원수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의 결단과 의지를 가지고, 조금의 자기 의가 동반되어 가능할 수 있지만,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매일의 반복되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사랑했지만, 변하지 않는 한 사람을 두고 또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반복되는 일상에서 매일 힘을 내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상을 거룩하게 살아가는 힘은 내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주님께서 살게 해주셔야만 우리는 일상을, 하루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것들이 많지만,
나는 오늘도 절제합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를, 그 분의 적절한 때에 또 하나를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