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집에서 마음이 허전할 때는

여행을 다닐 때
늘 제 눈을 사로잡는 풍경 중 하나는
바로 빨래입니다.
빨래가 널린 풍경은 언제 봐도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식구는 몇 명인지, 누가누가 살고 있는지
어떤 생김새일지 다 상상이 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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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를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빨래에 스며드는 햇빛 내음 때문입니다.
볕 좋은 날은,
이불을 몽땅 걷어 옥상으로
가지고 올라갑니다.
팡. 팡. 팡.
이불을 소리나게 털고는
햇볕 아래 반나절을 널어놓습니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이불을 가지고 오면
집안은 햇빛 내음으로 가득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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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처가댁에 간 날,
문득, 집이 너무 허전하게 느껴져서
이불을 들고 다시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이불과 함께 옥상에서
봄볕을 만끽했습니다.
아내가 없는 빈 집을 햇빛 내음으로 채우니
마음이 다시 따뜻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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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집에서, 마음이 허전할 때는
햇빛 내음을 집으로 들여보세요.
마음의 물기도 바짝, 깨끗하게 마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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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서툴다해도

저는 해군 출신입니다.
일년은 꼬박 바다 위에서 배를 타고 다녔죠.
해군은 항해를 나갔다 돌아오면
배가 소금물에 부식되지 않도록
가장 먼저 군함을 정비하는 일을 합니다.

이 일을 소위 ‘깡깡이’라고 하는데
배가 출항하고 귀항할 때마다
매번 이 작업을 하기 때문에
해군을 나오면 다들 망치질과 페인트칠의
도사가 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전, 일년이나 배를 타고도
끝까지 페인트칠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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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붓을 잡으면 다 엉망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언제나 다른 일이 맡겨지곤 했죠.
다림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해군 수준의 까다로운 복장점검이라면
다림질에 능해야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전 선임들이 대신 옷을 다려줄 정도로
다림질에도 서툴렀습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을 복학한 후에도
여전히 전 잘하는 것도,
제 마음을 떨리게 하는 일도 찾지 못했습니다.
내가 쓴 편지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서
친구들에게 ‘외계 편지’라 불리었고,
숫기가 없어 사람들 앞에 나서지도 못했으며,
말도 잘 못해서 ‘언어장애’라는
별명까지 붙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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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도 흥미가 없고, 진로는 불투명했습니다.
유일한 취미는 사진이었지만,
색약인 전 사진에 대한 확신과
정체성을 갖지 못했습니다.

‘내가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그런 게 과연 있기나 한 걸까?’

이런 질문과 방황은 그 후로도
계속되었습니다.

십여 년이 흘러,
어느새 전 한 아내의 남편이,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 있습니다.

저녁 준비를 위해 메추리알 껍질을 까는
아내를 도우려 옆에 앉았지만
제가 손대는 것마다 엉망이 되고 맙니다.
아직도 전 잘하는 게 없습니다.
아직도 서툰 것투성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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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이런저런, 크고 작은 서투름 때문에
우리 인생이 실패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요.
이런 것들은 그저 말 그대로
‘조금 서툰 것들’에 불과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실패하는 것은
크고 작은 서투름 때문이 아니라,
그런 자신을 놓아버리고,
절망해버린 자신의 마음 때문은 아닐까요?

아이 하나의 놀라운 가치

소명이는 3.9kg의 우량아로 태어났습니다.
다른 신생아들이 포대기에 파묻혀
병원에서 퇴원할 때,
소명이는 이미 친구들보다
얼굴 하나가 더 나와 있었죠.
6개월이 될 무렵 소명이는 10kg가 훌쩍 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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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무거운 녀석을 매일 안고 다니다보니
아내의 허리와 무릎은 남아나질 않습니다.
아내는 허리를 펼 때마다
‘끙’ 하는 소리를 내고,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제 가슴은 덜컥 내려앉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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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마다 아내에게 안마를 해주고,
자다가 몇 번씩이나 깨는
아이들을 돌보다보니
저 역시, 얼굴이 푸석푸석해졌습니다.
처음 장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땐
남자 피부가 너무 좋다고 좋아하셨는데,
그것도 이제 다 옛말입니다.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지만,
아내와 전 하루하루 아픈 곳이 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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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화가, 반 고흐는
죽어가던 창녀 크리스틴과
그녀의 아들을 보호하면서,
동생 테오에게 이런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냈습니다.

‘내 어떠한 작품도 요람 속에 잠든
한 아이의 가치보다는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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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보기 위해
비싼 값을 치루고,
길게 줄을 서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데,
정작 그는 자신의 어떤 작품도
한 아이의 가치를 이길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저도 그 생각에 동의합니다.
몸은 늘 고단하고,
나날이 기운도 잃어가지만,
매일을 정직하게 자라나는 아이들과
무엇을 비교할 수 있을까요?
무엇과 맞바꿀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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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 인한 충일감이
모든 피로를 잊게 하는 걸 보면,
저도 이제 부모가 되어가나 봅니다.

아내만을 위한 공간

지금은 경기도 광주의 숲속 빌라에 살고 있지만
신혼은 성남의 복정동 작은 곳에서 시작했습니다.

아내는 결혼하고 100일도 안되어
바로 온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이내 둘째까지,
줄곧 출산과 육아에 매달리느라
자신을 위한 시간은 거의 갖지 못했습니다.

전, 엄마가 되고나서 늘 분주한 아내에게
아내만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13평, 작은 우리 집에
아내만의 공간을 마련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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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저리 궁리를 하다,
제 작업실로 쓰는 방 한구석에
책상을 하나 더 놓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힘들었습니다.
저희 집에서 가장 작은 공간에 또 가구를
들여놓기가 쉽지 않더군요.

결국 제가 쓰던 두 개의 모니터 중
하나를 떼어 노트북과 연결시키고
식탁을 반으로 나누어 그곳에
아내의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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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 자기만의 것이라고 할 수도 없는
정말 작은 이 공간.
이 조그만 공간에도 기뻐하는 아내를 보니
마음이 짠해집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아내에게
감사한 마음이 생겨납니다.
이렇게 작은 것밖에 해줄 수 없는 날,
언제나 한결같이 긍정해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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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내게 그런 사람입니다.      

너가 없는 시간동안 나는,

택배 박스 안에
온유와 동생 소명이가
들어가 있습니다.

소명이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것 같은데
온유 혼자 조잘조잘
수다를 떱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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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이소명!
너, 누나가 애기일 때 왜 빨리 안 나왔어?
니가 엄마 뱃속에서 안 나와서
누나는 놀 사람이 없었잖아.
그동안 얼마나 심심했는지 알아?
이런 개구쟁이 같으니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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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이는 이런 누나의 원망을
아는지 모르는지
종일 택배 박스만 뜯고 있습니다.

어떤 확신

따사로운 봄날 어느 오후,
네 살된 딸 온유와 함께 동네 카페로 소풍을 나왔습니다.
밖이 시원하게 내다보이는 창가에 앉아
나는 라떼를, 온유는 쿠키를 주문했지요.

카페 이름은 ‘HANAMARU(하나마루)’입니다.
일본어로 ‘동그란 꽃’이라는 뜻이라네요.
우리가 어렸을 때 숙제를 잘 해가면
선생님께서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주던 것처럼
일본에서는 잘한 작품에
하나마루를 하나씩 달아준다고 합니다.

얌전히 앉아 쿠키를 먹던 온유가
갑자기 생뚱맞은 질문을 합니다.

“아빠, 지금 기쁘지?”

“응?”

“기쁘잖아~”

“뭐가 기쁜데?”

“내가 있어서 너무 기쁘지?”

“응?…응!”

온유는 이제 네 살.
네 살짜리 아이가 어떻게 이렇게 확신에 차서
얘기할 수 있는 걸까요.
내가 얼마나 바보처럼 웃고 있었길래,
아이가 이러는 건지.
순간, 얼굴은 붉어졌지만,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뭉클함이 피어올랐습니다.

내 마음을 맞춘 온유에게
커다란 하나마루를 하나 붙여줘야겠습니다.

온유의 첫 번째 말

첫돌이 지나면 아이들은 조금씩 말을
알아듣고 배웁니다.
그리고 몇 가지 단어를 사용해서
의사전달을 합니다.
‘아빠’ ‘엄마’ ‘시여(싫어)’ ‘조아(좋아)’
‘아내(안 해)’ ‘뽀(뽀로로)’
이런 식으로 의사소통이 되면 그 순간
얼마나 아이가 대견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짧은 문장으로
말을 하곤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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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에 사는 형제들은 각각 첫번째 문장으로
“불 꺼”, “밥 줘”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문장으로 말하면 아빠, 엄마는
아이를 다 키운 것처럼 기쁩니다.

전, 온유가 이런 단어들을 사용할 때 즈음
이스라엘 여행을 갔었습니다.
온유는 아빠가 3주는 지나야 온다는 것을
다 안다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3~4일에 한 번씩
집에 안부를 전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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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 위치한 보카치오라는 식당에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였습니다.

“오빠, 오빠, 온유가 말을 했어!”
전화를 받자마자 아내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온유는 원래 말 했잖아.”
“아니, 그런 말 말고, 문장으로 말했다고.”
“정말? 무슨 말을 했는데?”
“잠깐만 기다려봐. 온유를 바꿔줄게.
잘 들어봐.”
“응. 온유야, 아빠야, 아빠가 온유 보고 싶어.”
“……”

“온유야, 말해봐. 온유야, 아빠야.”
“…아빠 조아. 아빠 제일 조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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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반대편에서 들리는 딸의 짧은 말에
전 주르륵, 눈물을 흘렸습니다.
온유가 제게 전해준 첫 문장입니다.

“아빠 제일 좋아.”

제 인생에 누가 이런 선물을 할 수 있을까요?
지금도 그때 그 두근거림을 생각하면
마음 한편이 아릿하며 따뜻해져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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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라는 말

지금도 온유는 꿈이 화가일 정도로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지만,
온유가 네 살일 때,
정말 그림그리기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한동안 정체모를 선만 그어대더니
이젠 제법 동그라미도 그리고,
눈, 코 모양도 그려댑니다.

도서관에 있는데 아내에게서
사진 한 장이 왔습니다.
제목은 ‘온유가 그려준 엄마’입니다.
부러운 마음에 제 그림도 부탁했더니
잠시 후 사진이 도착했습니다.
나름 팔과 다리에 귀까지 있네요.

아이가 난생 처음 그려준 제 얼굴을
한참 보고 있는데,
아내가 이번에는 아이의 동영상을
보내왔습니다.
동영상 속 온유는 그림을 그리고는
“아빠가 이 그림을 보면 정말 좋아하실거야!”
라며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온유야, 아빠 예쁘게 그려줘서 고마워!”
아이에게 고맙다고 말하자,
아이는 세상 모든 것을 얻은 듯
신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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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온유는 종이만 보면 그림을 그려
누군가에게 선물을 하려고 합니다.
아직 말도 잘 못하는 소명이부터
동화책에 나오는 전설의 멧돼지와
구로구 온수동에 살고 있다는 늑대도
그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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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전, 이 그림이 완성되면
전설 속 멧돼지와 구로구에 사는 늑대에게
그림을 주러 다녀와야 한답니다.
‘고맙다’는 말을 아이에게 꼭 전해줘야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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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그림을 그려주는 아이에게
가짜 우체부 노릇을 하며,
매번 고맙다고 말하는 것도 슬슬 꾀가 납니다
역시, 아빠 노릇은 쉽지 않아요.
그래도, 실은 오늘도 이렇게 말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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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야! 고마워!
오늘도 이렇게 아빠 곁에 있어줘서.”

나는 어떤 참회록을 써야 할까

용정.

이곳은 시인 윤동주의 고향이다.

저 멀리 나 있는 길에 윤동주 생가가 있고,

저 길을 따라가면 안중근 의사가

저격연습을 했다는 선바위가 있다.

소달구지 덜그렁거리고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여

벼타작 하는 모습.

흙먼지 폴폴 날리는 이 아늑한 풍경 어딘가에서

윤동주의 시에 나오는
개구쟁이 꼬아 아이 만돌이가

뛰어나올 것만 같다.

‘용정종합고중’

가난하고 희망 없어 보이는 중국의 조선족 아이들을

교육하고 가르치기 위해

한국와 멀리 외국에서 건너온 선생님들이 이곳에 세운 학교다.

“선구자들이 간 길이 저희의 길과 같습니다.
교육과 믿음을 통해
어둔 세상을 깨우는 것이지요.

이 학교 교장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다.

나라 잃은 암울했던 시절 민족을 위해

피 흘리고 땀 흘린 길과,

지금 이 외진 곳에서 희망 없이 시들어 가는 아이들을 교육하고

길러 내는 길은 똑같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란 거다.

이곳뿐 아니라 지구 곳곳 어딘가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고

의미 있는 불빛을 키워 내려는 많은 이들이 있겠지.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윤동주는 참회록에서 만 24년 1개월 나이에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보다 훨씬 많은 나이의 나는 지금

어떤 참회록을 써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