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소서

교계와 교회에서
크고 작은 뉴스들이 쏟아졌을 때
그들이 만난 하나님은 거짓된 신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말한 글과 말을 떠올리면
거짓된 신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만난 은혜도 진짜고
그들이 만난 하나님도 맞지만
어쩌면 기억에 관한 문제는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만나주셨는지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지 잊은 것은 아닐까?
 
기억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노아의 때에 홍수가 가득할 때에
하나님은 방주에 있는 모든 이들을 ‘기억’하셔서 
물이 줄어들게 하셨으며 (창 9:15)
노아와 언약을 맺으실 때도
무지개를 보고 이 언약을 ‘기억’하셔서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창9:16,29)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실때도
아브라함을 ‘생각(자카르)’하셔서 롯을 구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실 때에도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하신 후 돌보십니다.
 
하나님이 사울 왕을 버리실 때
사무엘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삼상 15:17)
사울이 왕이 되기 전에 
그는 얼마나 신앙과 성품이 준수했는 사람인가요.
하지만 그가 어떤 존재였는지 
왕이 된 이후 잊어버렸습니다.
 
어떤 면에서 크고 작은 뉴스 속에
이슈들은 일반 사람들의 일상 속에
일어날 수 있는 범죄나 실수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유난히 분노하거나 실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여러 가지를 추론하지만
그중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게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다는 이유 입니다. (민 20:10-11)
모세의 기나긴 순종과 하나님을 향한 열심에 비해
지팡이로 반석을 친 사건은
얼마나 작고 사사로운 일인가요?
그런 이유로 가나안땅을 들어가지 못한다면
약속의 땅에 발 디딜 수 있는 사람은
이스라엘에서 몇 명이나 있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눅12:47-48)
 
예수님은 주인의 뜻을 아는 자를 말씀하십니다.
주인의 뜻을 아는 자라면
그 뜻을 아는 만큼의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온유와 소명이가 똑같은 잘못을 했지만
첫째가 조금 더 꾸지람을 듣는 이유는
같은 행동을 했더라도
첫째는 잘못된 행동인 것을 알고 있는 반면에
둘째는 첫째를 모방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의미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들에게
그만큼  많은 것을 요구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때문에 사사로울 수 있는 일에도
주님은 더 많은 책임을 묻게 될 것입니다.
 
과할 정도의 책임을 물으신다면
주님의 마음을 많이 알고 있는,
주님께 많이 맡은자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사울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시절처럼
다윗에게도 양을 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이새의 막내아들에게
기름부으신 하나님은 그가 왕이 되기까지
길고 긴 여정을 광야에 두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나를 구원하시는 이가 누구인지
그가 왕이 된 이후에도 기억하게 하시려는
주님의 사랑이 아니었을까
 
내게 광야의 시간이
필요한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것 같습니다.
 
 
#나는누구? #하나님은어떤분? #스스로를작게여길때 #하나님이기름부으셨다
#나의나된것은 #주님의은혜입니다 #많이맡은자에게 #많이찾을것입니다
#그래서더욱은혜를구합니다 #기억과잊혀짐 #자카르 #주님의구원열쇠
 
 
– 주제를 따라 쓴 탄탄한 글이 아닙니다.
매일의 큐티 본문을 묵상하며 쓴 일기를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다시 풀어쓴 글입니다.
 
가끔 반박하는 문자가 와서..
함께 주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정도로만 봐주세요. ^^

골리앗을 상대할 때

가까운 지인 가족과 따뜻한 시간을 보내다가
자연스레 기도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른들만 있으면 말씀 하나에도 기도할 수 있겠지만
네 명이나 되는 어린 아이들이 함께 있어서
맥락을 가지고 기도하는 게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성경 구절을 쉬운 성경으로 읽었습니다.
 
“사울은 자기 옷을 다윗에게 입혀 주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의 머리에 놋투구를 씌워 주고,
몸에도 갑옷을 입혀 주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칼을 차고
몇 걸음 걸어 보았지만
투구와 갑옷이 거추장스러워서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했습니다.
“이 옷을 입고 갈 수 없습니다.
거추장스러워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투구와 갑옷을 다 벗어 버렸습니다.
 
다윗은 막대기를 들었습니다.” (삼상17:38-40a)
 
골리앗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모욕했습니다.
어린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는
자신이 골리앗을 상대하겠다고 사울왕에게 나갔습니다.
사울왕은 말렸지만 다윗은 목동으로 사자와 곰에게서
어떻게 양들을 지켜냈으며
하나님이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를 말합니다.
사울왕은 다윗을 허락하며 자신의 투구와 갑옷을 벗어 주었습니다.
 
‘왕의 투구와 갑옷’
전쟁에 긴요하게 사용할 수 있는 왕의 하사품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 그것들을 벗어둡니다.
골리앗을 상대하려면,
목숨이 위태로운 전장에는
이것저것 보험들이 필요하고 
아이템 하나가 아쉬울텐데
그저 자신에게 익숙한 막대기 하나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인생과 살아갈 인생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수많은 싸움 앞에서
사울의 투구와 갑옷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육아를 하게 되면 
이웃집 아이들의 사례와 교육을 비교할 것이고,
아이들이 자라게 되면 자신의 취업과 미래를 준비하며
싸움에 이기기 위해 내게 맞지 않는 투구를 쓰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내 몸에 맞지 않지만 갑옷을 입게 되면
싸움에 보다 유리할 거라는 마음이 생길테니까요.
우리 인생에 끊임없이 만나게 될 갑옷과 투구를 생각해 봅니다.
 
물론 앞으로의 거듭된 싸움에서 
다윗은 검술과 창을 연습하게 될 것이고,
새로운 전술과 전략도 배우게 되겠지요.
하지만 골리앗을 상대하는 이 중대한 싸움에서
그가 들었던 막대기를 주목하게 됩니다.
그래서 새해의 첫 걸음에
막대기를 놓고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이 아시겠지요.
내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면
드문 기회와 값비싼 첨단 무기라고 할지라도 
거절하게 도와주세요.
큰 산과 같은 골리앗과 마주 대할 때도
주님이 내게 들려주신 막대기면 충분합니다.
 
 
#큰산같은어려움 #골리앗을상대할때 #보험과아이템이아니라 #왕의투구와갑옷을거절할수있을까 #익숙한막대기하나 #주님이함께하신다면 #막대기가줄수있는평강 #거절하는지혜 #가볍게전투할수있는분별

나의 등불

외국어 영역 답안을 체크하는 공란이 부족해서
마음이 어지러웠습니다.
문제지에서 몇 번을 확인하고는
막상  5번부터 답안지를 밀려서 작성했습니다.
다시 시작하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이라 
수능날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음이 어지러웠습니다.
 
나는 며칠 동안 집을 떠나 여행했습니다.
여행한다고 적어놓고 떠났지만
부모님은 며칠 동안 친구들을 수소문하며 걱정하셨지요.
어린 나이에 경험한 세상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 후 원치 않았던 대학에서 공부하다가
선생님이 되고 싶어서 다시 시험을 준비했는데
이번에는 신체검사에서 떨어져 선생님이 되지 못했습니다.
다시 원치 않았던 대학과 학과에서
마음을 붙이지 못한채 시간을 보냈습니다.
내 인생은 초반부터 이리저리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흔들린 인생을
이십 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흔들린 인생이 아프지만
그 아픔은 나를 만들어 주는 기초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흔들림이 가치 있으니
보약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흔들림은 아프고, 그것은 나를 짖이겨 놓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그 흔들림이 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패가 실패로 끝나면 우리는 숨 쉴 수 없겠지만
실패는 또 다른 길 일뿐입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인생은
지금 내 발 앞을 볼 수 있을 뿐
주변을 돌아볼 여유도 없고,
인생의 내일을 알 수도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돌아보면 오늘은
그저 수많은 길 중 하나였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윗의 삶은 쉽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이자 선지자인 
사무엘이 다윗의 동네에 찾아온 날,
그래서 온 동네가 떠들썩하게 잔치를 벌어진 날에도
다윗은 초대받지 못하고
들판에서 양을 지키는 막내였습니다.
꿈도 없고, 미래도 보이지 않은 그를
하나님은 주목하고 계셨습니다.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리이다” (시18:28)
아무도 알지 못 했던 다윗의 인생에
주님이 찾아와 주셔서
그의 인생에 등불을 밝혀 주셨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삼상16:7, 12)
스스로도 알지 못 했던 그의 인생의 계획을
주님을 알고 계셨습니다.
 
골리앗을 쓰러트리고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었지만
그의 인생은 쉽지 않았습니다.
절대주권자였던 왕으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당해야만 했고
그를 지켜주던 사람들은 
죽거나 위험에 처해야만 했습니다.
끊임없는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그는 사울왕의 목숨을 지켜주거나 선의를 베풀었지만
세상은 자신의 의로움과 반대로 여전히 적대했습니다.
 
끝없이 흔들리는 다윗의 인생 속에서
그는 끊임없이 아파해야 했습니다.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시18:4-5)
 
사망의 줄, 불의의 창수,
스올의 줄, 사망의 올무..
이렇게 무거운 말들이
다윗의 삶을 묶고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전쟁 같은 인생입니다.
 
시편 18편은 그 모든 시간이 지난 후에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지은 시로 유명합니다.
성경의 시편 18편 앞에는 
이런 문장이 친절하게 적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전쟁 같은 삶, 전쟁 같은 인생을 마치고
수십 년이 지나 다윗은
자신의 시간을 돌아보며
시편 18편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다.” (시18:1-2)
 
그분이 우리 하나님, 우리 아버지 입니다.
 

빈 자리

나는 도무지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베란다에 매달려 보기도 하고
학교 다닐 적에는 답안에 장난도 쳐보고
하루는 재미있었지만
그 재미가 며칠을 가지 않습니다.

허기진 세상에서
재미를 쫓거나
허무를 느끼거나
둘 중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었지만
그 분은 내게 무관심한 분이거나
무능력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빈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도 채울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그 자리를
채울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또한 하루 이틀이 아니라
긴 시간을 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사람이라면,
그 꿈이 이루어진다면,
나는 만족할 수 있겠다고 믿어 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전 미문 앞에 구걸하는 사람은
나의 모습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금으로도, 은으로도 채울 수 없는
허기를 주님이 채우셨습니다.
언젠가 촬영 때문에 미국에 있을 적에
주님이 내 마음에 물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솔로몬에게 물으신 것처럼

“너의 소원이 무엇이니?”

나는 그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주님이 보고 싶습니다.”
 
내 소원은 정말 그것이었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대하며
주님을 보는 날에

우리는 그 기쁨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16:8)
 
이 말씀이 너무 좋아서
메일을 보낼 때마다 
내용 아래에 함께 보내는
발신서명으로 적어 놓았습니다.
흔들리고 또 흔들리는 현실 앞에서도
내 영혼이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_여호와를_내앞에_모심이여 #성전미문앞에_구걸하던_나 #연인이_할수없는_그것 #주님만이_채울수있는_빈자리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만으로

주일 오후에 온유는
교회에서 ‘어와나 ‘라는 프로그램을 하고 있습니다.
마칠 시간에 맞추어 온유를 데리러 갔다가
멀리 앉아 있는 딸아이와 눈이 마주치자
사람들 몰래 하트를 보냈는데
그 찰나를 선생님 한 분이 사진으로 찍었나 봅니다.
사진을 받아보고 아내와 함께 배꼽이 빠지도록 마구 웃었습니다.
내가 저런 표정으로 딸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나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와나에서는 매 주 말씀을 암송하는데
복습하는 단계라서 이번 주에는
말씀 9개를 암기해야 했습니다.
교회로 향하는 내내 차 안에 말씀이 가득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며 여러 질문들이 생겼습니다.
시국과 관련된 대통령과 그 책임에 대한 답답함들,
여러 정치적인 심각한 문제를 너머
그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교회의 문제까지 함께 뉴스로 접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해 계속 질문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지만
왜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없는 선택을 해나가는 걸까요?
만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믿음의 걸음을 걸을 수 있는 것일까요?
 
현실에서뿐 아니라 성경에서도
수많은 경우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뿐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
내가 이루게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삼하3:9)
 
하나님이 하실 일을 내가 이루게 할 것이라는 이 말은
아브넬의 멋진 믿음을 드러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이스라엘의 군대 장관 아브넬이
자신의 치부를 지적한 그의 왕 이스보셋을 협박하는 말입니다.
다윗을 대적하던 적군조차도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현실속에서는 각자 자신들의 기득권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자칫, 정치적 이념이 신앙의 옷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하나님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았고
그가 왕으로 있을 때 통일 이스라엘은 놀라운 번영을 경험했지만
그는 무엇을 결정하고 어떻게 살아갔나요?
 
우리는 자주 기도합니다.
‘주님이 살아계신 것을 보여주세요.
주님의 마음을 보여주세요.’
하지만 주님이 당신을 드러내시고
그의 마음을 보이셨을 때
우리는 과연 그분의 마음을 따라 순종할 수 있을까요?
 
‘당신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저자인 유석경 전도사는 아버지가 직장암으로 돌아가실 때 
‘어떻게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가능한가?’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본인도  직장암으로 심각한 아픔 속에 있다가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게 가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품에 안기기 전까지도
그녀는 감사와 찬양을 멈추지 않고 말합니다.
 
“숨이 멈추고 단 한 번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되지 않으니깐,
정말 나는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았다.
..아버지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시고
계속해서 진리의 말씀과 아버지의 사랑을 전할 수 있도록
하루하루 생명을 주시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다.”
 
모든 것이 주어져도 그 분의 마음을 따라
살아가지 못할 것 같은데
모든 것이 결핍된 고통 속에서도
누군가는 그분의 사랑이면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딸을 향해 하트를 보내는 사진을 보며
당신의 자녀를 향한 주님의 마음을 생각합니다.
부족하고 부끄러워 내 마음은 간절하게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허락해 주세요.
말씀을 통해 그분의 길을 가르쳐 주세요.
그 길 위에서 온통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게 도와주세요.”

눈을 떠요 아프리카


 

장인어른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내 명경의 얼굴을
매일 더듬어 만지며
사랑하는 딸의 생김새를 그려야만 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눈이 불편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렇게 보냈을까요?
캠프에서 만난 조그만 아이 하나가
작은 손으로 내 얼굴을 더듬어 만졌습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렇게 보내야 할까요?
 
아프리카에는
의료진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어떤 나라에는 안과의사가 단 한 명 뿐입니다.
 
시각 장애인중 90%가 저개발국에 있으며
특히 아프리카 국가에 거주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한국에서 비전케어가 방문한다는
소식을 라디오와 신문에서 전해 듣고
하루를 꼬박 걸려서 찾아온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답답하고 어두운 시간을 뒤로하고
이십여 분의 백내장 수술로
단 하루 만에 앞을 보게 되는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이고 드라마틱한 이야기인가요?
비록 새벽부터 밤까지
의료진들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수고했지만
여전히 입가에 미소가 흐르는 이유는
이런 기쁨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수혜를 입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더욱 힘을 내는지도 모릅니다.
 
국제 실명 구호 NGO로써
너무 귀한 사역을 해나가고 있는데
제대로 된 영상이 없어서
아프리카에 머무는 동안
후배 박대훈과 몇 편의 영상을 틈틈히 만들었습니다.
 

어두운 곳곳마다
빛이 비치기를
기도하며..
 
#비전케어 #수고했어요
#눈을떠요 #아프리카
#Restore_Sight #Share_Vision
#비전루트_아프리카9개국_약8000Km

살아가는 아이로

“지금 온유는 뭘하고 있을까?”
아내와 틈나면 온유가 보내고 있을 시간을 궁금해 합니다.

온유가 처음으로 2박 3일동안 집을 떠나
여름성경학교를 갔기 때문입니다.
전날 밤, 온 가족이 온유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조금전에도 아내와 함께 기도했습니다.
좋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기를,
믿음의 사람들을 만나기를,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기를..

우리가 기도한다고 아이가 귀가했을 때
눈에 띄는 대단한 변화를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은 의미 있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자라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조금의 변화라도, 그 변화가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제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아이에게도 충분한 시간이 필요할 거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 시간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 아이를 임신하고 아내와 함께 기도할적에
주님이 주신 마음이 있었습니다.
‘다음 세대의 용사가 될 것이다.’
남자 아이가 아닌데 용사라는 묵직한 단어에
아내와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방법과 계획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다가올 시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제가 살아온 40년의 시간에도
놀라운 변화들이 가득했습니다.
후배들은 태어날 때부터 MP3가 있었고
다음 세대는 스마트폰이 당연한 것이 되었습니다.
이제 더욱 변화를 예측못할 것입니다.
얼마전 지인의 회사에서 가상현실들을 경험했습니다.
가상현실들은 우리가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상상을 현실로 가져올 것입니다.
시공간을 넘어 상상의 것을 소유하게 될것입니다.
아픔과 절망을 치유할 수 있는 획기적인 도구가 될 수 있을것입니다.
지금 그 프로젝트를 위해 힘을 모으는 중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그것은 치명적인 쾌락의 도구로 사용될것이며
얼마전 뇌과학자들을 인터뷰했을적에 상상했던 것처럼
앞으로 우리는 영화 <인셉션>이나 <매트릭스>의 세계처럼
현실과 상상의 중간지점에서 고민해야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믿음의 선택으로 인해
감당 못할 시련과 시험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를 다음 세대에게
어떻게 이 아이들을 양육해야 할지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은 이 시대를 살아갈 수 있도록
아이를 양육하라 말씀하십니다.
똑똑하고, 성공할 수 있는 아이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님의 마음으로 이 시대를 살아갈 수 있는 다음 세대들이
자라주기를 기도합니다.

카페에서 기도

카페에서 회의를 하다가
문득 주님이 주시는 마음이 있어서
함께 기도하기를 청했습니다.

회의와 전혀 관계없는 흐름속에서
주님이 인도하신 시간은
우리가 전혀 예측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우리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기도한다고 그문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지만
기도하는 동안, 문제는 주님 안에 숨겨지고
드러난 주님의 영광은 우리를 덮었습니다.

기도하기를 머뭇거렸던 이들의
목소리와 울림이 간절해집니다.

도무지 해결될 것 같지 않은
모든 문제 앞에
기도하기를 멈추고
문제더미 앞에서 뒷걸음질쳐
회피하려는 우리 심정에
주님은 노크합니다.
‘이 문제도 내게 속해 있어.’
네. 주님께 속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알지만 손 모으지 못한
연약함 또한 기도를 통해 알게 됩니다.

내가 기도를 청했던 이가
기도가 끝난 후 몇 번이나 물었습니다.
“왜 제게 기도를 청하신거예요?”

회복의 시작이 놀라운듯, 궁금해서 묻는 그의 질문에
나는 딱히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내 마음에 1%만큼의 작은 속삭임이었나 봅니다.
바람결 같지만, 주님의 마음이라면
나는 그 마음에 귀기울여 보고 싶었나 봅니다.

우리 인생에 주님은 수없이 말씀하십니다.
바람에 귀기울이면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되겠지만
방향이 주님께 향한다면
생각지 못한 회복과 부흥을 허락하실거라 믿습니다.

내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자신이 감옥에 갇히게 된 사실로 인해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그는 자신이 사는 것과 죽는 것을 비교하며
사는 것은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은 유익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흔히 말하는 것처럼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기에
죽는 것도 좋다는 의미로 읽히지 않습니다.
다음 구절에 있는 내용처럼
육신으로 사는 것이 열매 맺는 일이라는 말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려면
사는 것은 그리스도, 죽는 것은 열매 맺는 일로 구분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고백은 정말 내 가슴을 흔드는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 생각대로 다시 표현해 보자면,
감옥에서의 바울은 죽는 것이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립고 바라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본향에서 왕을, 연인을 마주 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는 것은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어젯밤 잠들기 전부터 이 문장을 계속 읽어 나가며
부끄러운 자신을 마주 대합니다.
언젠가 미국에서 머물던 숙소에서
잠결에 주님이 ‘내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는지’ 물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지체 않고 대답했습니다.
“주님, 주님을 보고 싶어요.”
그 고백은 진심이었습니다.
온통 회의적이기만 한 세상에서, 그리고 모순된 교회에서
실망하고 회의하며 나는 더욱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절망 같은 세상에서 오직 예수님은 빛이 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으며 우리는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책임을 받았습니다. (빌1:29)
어떤 특정한 것이 고난이라기보다는
모순된 세상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해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다만 주님이 나와 함께 하기에
이 땅에서의 삶은 또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그리고 한 사람의 인생에 주님은 뜻과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런 중첩된 소망과 절망과 감사와 회의를 품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본향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나그네에게 참 많은 욕망이 가득합니다.
하덕규님의 노래 가사처럼
내 속에는 왜 이렇게 내가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앞서 살펴본 바울의 고백은 나를 부끄럽게 한다.
그는 주님이 그저 나를 도우시는 분이라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바울을 노크하면 주님이 손 흔들며 나오실 것 같습니다.
“내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빌1:21)

에스겔의 부정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인한

메세지를 여러가지 상징적인 행동으로 명하셨습니다.
물과 음식물을 먹는 때와 먹을 양까지 제한받은 채 
에스겔은 밧줄로 묶인채 바닥에 누워 예언해야만 했습니다.
더군다나 사람의 똥으로 불을 피워 보리빵을 먹는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여야만 했습니다.
에스겔은 지금까지 자신을 더럽힌적이 없음을 
호소함으로 하나님은 인분 대신 쇠똥을 허락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파숫꾼으로 세운 에스겔조차도
자신을 부정하게 만드는 일에 이토록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하나님앞에 범죄했다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까지
정결예식을 따라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따라 살아갈 때
이스라엘 백성으로의 정체성을 지키게 된것입니다.

니콜라스 월터 스트로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통은 죽은 사람들의 살아 있는 신앙이요.

전통주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죽은 신앙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통이라고 믿고 지켜왔던 정결예식에서

하나님 경외함을 제외한다면 말그대로 전통주의가 되버립니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정체성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사건으로 하나님앞에 범죄했을때

하나님은 심히 노하시며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출33:3)
이에 모세는 주님께 은총을 구하며 말했습니다.

“주께서 친히 가지 않으리려거든 우리를 이곳으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출33:15-16)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정체성을 가지는 지점은

바로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과 친히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모세는 하나님없는 가나안은 아무 의미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없는 가나안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없은 정결예식은 아무짝에 쓸모없는 전통주의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부정하게 만듭니다.

그들이 다시 정결해지거나,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다시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