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바울은

무슨 격려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교제나 긍휼이 있는지를 묻습니다.(빌2:1-2)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리스도 공동체와 닮아있습니다.
만일 그런 모양을 가지고 있다면
같은 생각과 한 마음을 품어서
서로 겸손함으로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자기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돌보라고 권하고 있습니다.(빌2:3-4)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라면,
그런 수고와 섬김과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같은 생각과 한 마음을 품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아니어도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할 때
같은 목표를 품어서 그 일을 추진해 나갑니다.
얼마전에 저도 진행했던 프로젝트를 위해
단기간에 밤을 새며 같은 목표로,
서로 해야 할 업무를 나눠서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에도 수많은 프로젝트들이 있고
그 일을 진행해 갈 때 교회의 담당자들은
자신의 시간과 마음을 쏟아서 한 마음으로 그 일을 추진해 갑니다.
혹, 다른 의견을 가졌더라도
이 말씀때문에 다시 생각을 정리하고 한 마음을 품으려 애쓰게 됩니다.
물론 이렇게 하면 효율적으로 일의 성취와 성과를 얻게 되겠지만
이것 때문에 바울이 같은 생각과 한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바울의 이 말이 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는 말에 그친다면
단지 경영학적인 접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그 이후에 말씀들은 전혀 실용적이지 않은 접근입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자기 일을 돌아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도 돌아보라고 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인지를 선언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바울은 하나님이신 분이
하나님으로써의 기득권이 아니라
종의 형체로 자신을 낮춰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음을 이야기합니다.(빌2:6-8)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부조리한 세상과 오랜 인간 역사에서 만날 수 있는
어떤 왕이나 지도자와도 구별되는 차이점은
예수님의 행적 뿐 아니라 그 분의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위인이나 성인으로써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다고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체이신 온 우주의 신으로써
자신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무릎 꿇어야 하는 이유는

그 분이 바로 온 우주의 통치자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어떤 위인이나 성인,

혹은 어떤 왕이나 지도자의 본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만드신 주인, 우리를 통치하는 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앞서 살핀 권면은
곧 교회에서 일의 성과에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지향점인 우리의 왕, 예수그리스도를 향해 있다고 믿습니다.

이런 맥락을 가지고 바울의 권면을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프로젝트나 과제를 성취하기 위해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그리스도 공동체의 모양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스도를 향한) 같은 생각을 품고
(그리스도의)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그리스도와 같은) 한 마음이 되십시오
그러면 내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빌2:2)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입니다.”(빌1:21)
바울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오늘의 주님을 만나는 것,
그것이 구원이라 믿습니다. (빌2:12)

질문의 답

익숙할 법도 한데,

그렇지가 않다.
이틀간의 일정속에
낮과 밤동안 빼곡하게 강의시간을 구성해 놓으셨다.
차재상 전도사님의 말씀데로
살아간데로 말하면 쉬울 법 한데
그렇지도 않다.
여전히 내 머릿속에는 수많은 의문투성이다.
나이 어린 청년들에게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전달한다던지..
이런 고민들은 둘째이다.
첫째 고민은 과연 내가 전하는 메세지가
유효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
청년들을 사회 부적응자로 만드는 것은 아닌지,
비현실적인 삶으로 이끄는게 아닌가 하는 고민들이다.
그리고 정작 나조차도
매일 고민하고 있는데,
마치 내가 그 고민에 대한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아닐까?
KTX는 내가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도 전에
나를 목적지까지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만난 청년들의 삶은
간단하게 전해 들었지만 녹록치 않았다.
하지만 힘든 심정을 가진 이들에게
전한 메세지에 주님은 은혜를 주셨다.
청년들은 가만히 앉아서 듣고 반응하는데
전도사님과 사모님은 심각할만큼
이틀 내내 눈물을 줄줄 흘리셨다.
왜 그러실까?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청년들과 사역자가
고민하고 그 답을 찾기를 원하는 부분에 대해
주님께서 답해주신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꼭 강의시간에 답해주신 것 같지는 않다.
청년들은 새벽 2시가 넘어갈 때까지
기도하고 찬양하기를 이어나갔다.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만나주신다.
“우리 청년들을 위해 꼭 필요했던 메세지였어요.
무엇보다 우리 부부에게 주님이 주신 메세지였어요.”
눈에 눈물을 가득 품고
기차가 떠날때까지 역사에서 마중하며
이 말을 전해주셨다.
나는 여전히 질문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한다.
내 인생조차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유약한 인생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주님의 일하심은 놀랍다.
오늘도 기도한다.
이 시대 가운데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를 원합니다.
수개월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일이 있었다.
관련된 메세지만 확인해도 위장이 쓰라릴 정도로 힘들었다.
주님이 주신 마음때문에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고
나중에 부끄럽지 않도록 이 일을 잘 마무리하고 싶었다.
주님은 브솔시내에서의 다윗을 생각하게 하셨다.
포도원 일꾼에 대한 말씀을 생각나게 하셨다.(마 20:1-16)
그리고 나는 주신 마음에 순종하려 애썼다.
어리석어 보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의
의와 공평으로 다스리는 법칙을 따라 정리했다.
어제 늦은 밤, 전도사님에게 연락이 왔다.
사모님의 갑작스런 수술과 입원,
수많은 처리해야 할 문제와 어지러운 마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외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이유들.
걷지 말아야 할 수많은 이유가 있지만
‘또 한 걸음 가자.’ 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으니
또 한걸음 걸어보려고 한다고 말씀하셨다.
쉽지 않은 인생이지만
주님이 주시는 마음과 말씀에 순종했을 때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 있다.
평강이 있는 길을 걸을 때
그 길 위에 내가 던진 질문의 답이 있으리라 믿는다.

느헤미야와 공동체의 회복

예배를 드리며 얼마나 기뻤는지
무리중 가장 어린 아이들까지도 그 즐거움에 함께 했습니다.
예배의 기쁨이 소리가 되어 멀리까지 울려퍼졌습니다.
예배를 형상화할 때 가장 모범적인 답안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날에 무리가 희생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큰 기쁨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부녀와 어린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에서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습니다.” (느12:43)
 
예배의 회복은 주님의 말씀에서 시작되었으며
또한 자신 뿐 아니라 조상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귀기울이지 않았음을
자각하고 회개하였습니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느8:9)
 
“우리에게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의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는 잘못했지만 주께서는 성실히 행하셨습니다” (느9:33)
 
이만큼 건강하고 성공적인 
신앙 회복운동을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요?
주님을 바라보는 소수로 인해
온 회중은 바른 신앙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총독으로 거주한 지 12년째,
잠시 아닥사스다 왕에게 다녀오는 동안 
문제들이 연속적으로 발생합니다.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을 방해했던 도비야에게
제사장 엘리아십은 거룩한 성전의 방을 내주었습니다.
또한 백성들은 레위사람들을 돌볼 십일조를 내지 않았고
레위 사람들은 생계가 어려워지자
성전의 직무를 버리고 자기들의 밭으로 가버렸습니다.
 
나는 이 짧은 본문 속에서 탄식이 나왔습니다.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한계를 본 때문입니다.
예배로 인해 주님 앞에 기뻐했던 백성들이지만
보이지 않는 방향과 현실에서 부딪히는 한계들로 인해
백성들은 아주 짧은 시간에 범죄했던 선배들의 길을 따르게 됩니다.
 
출애굽을 하며 주님의 구원에 소고치며 감격했지만
모세의 부재앞에서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길 것이다.'(수24:15) 라고 말했을 때
온 백성은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성경은 사사기의 시작부터
이들의 욕심과 완악함을 낱낱이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게 우리의 민낯이어서 부끄럽습니다.
 
말씀 앞에 회개하고 예배로 인해 감동받을 수 있지만,
현실속에 살아가게 될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권세를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게 됩니다.
이스라엘 뿐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게는 자정능력이 없습니다
매일 싸우지 않으면 나도 거룩한 성전뜰의 큰 방을
불의한 도비야에게 내어주고 말 것입니다.
도비야에게 성전을 내준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성전을 지켜야 할 제사장이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 또한 성령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공간,
내 마음을 종종 도비야에게 처소로 내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돌아온 느헤미야는 
이 악한 사실을 알고는 
단호하고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해 나갑니다.
먼저 도비야의 모든 살림을 거룩한 곳에서 내쫓습니다.
그리고 정직하고 믿을 만한 사람을 책임자로 임명하여
레위 사람들의 직무가 지속되도록 했습니다.
느헤미야의 복귀로 공동체는 다시
거룩함을 유지하게 될것 입니다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느헤미야가 세워둔 믿음직한 책임자가 사라지고 나면,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 느헤미야가 떠나고 나면 어떻게 될까요?
결국 그가 만들어 놓은 건강한 공동체도 사라지지 않을까요?
 
아무리 건강한 구조와 형식이 만들어 져도
주님의 사람이 사라지고 나면
형식만 남게 되고 율법주의가 되고 말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속에서도, 유럽의 교회를 보며, 우리 나라의 비어가는 예배당을 보며
위기감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사람이 부재했을 때 공동체의 미래가 두렵습니다.
건강한 구조뿐 아니라 그것을 이끌 수 있는 사람을 위해 기도합니다.
 
어떤 견고한 구조를 만든다고 해도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욕심대로 깨뜨릴 수 있습니다.
반대로, 비록 구조와 형식과 환경이 부족하더라도
주님이 함께 하시는 한 사람이면 충분합니다.
주님이 충분하시기에, 주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면 충분합니다.

주님 사랑하는 한 사람.
주님 바라보는 한 사람.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았다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누군가 내게 이렇게 질문했다.
아무리 고민하고 찾아도 회개할만한 구석을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를 회개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오늘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향해 ‘너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말한다. (행2:36)
이 사실을 근거로 이천년동안 유대인들은 열방과 교회의 조롱과 핍박을 당해야만 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들에 의해 십자가를 지시고 억울하게 죽임당한 것으로 그친다면
그의 죽음과 부활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
질문은 ‘예수님을 누가 죽였나?’ 가 아니라,
‘예수님은 누굴 위해서, 왜 죽으셔야 했는가?’ 이다.
그 분의 죽음이 아니면 처리할 수 없는 문제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에 대한 책임은
유대인에게 돌릴 책임이 아니라 내 몫이다.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교회가, 각 성도가 하나님의 마음에서 떠나 있다면 회개는 당연한 것이다.
죄의 고백을 회개라 가르치지만, 회개는 보다 큰 것이며 구체적인 것이다.
세례요한이 광야에게 회개를 외칠 때(눅 3:7-17)
무리들은 말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회개를 통해 부으시는 하나님의 큰 위로가 있다.
회개하면, 천국이 임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회개는 바로 축복이다.
내가 어떠한 죄인인지 몰랐을 때, 회개는 부담스런 형식이었지만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를 비추셨을 때 회개는 내게 축복이 되었다.
회개는 어떤 사건에 국한되는 문제를 너머,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며, 내 존재의 문제이다.

말과 글과 사진과 그림

나는 좋은 노래와 연주를 듣게 되면 마냥 좋았습니다.
그렇다고 노래를 잘 부르거나, 악기를 다루는 것이 부럽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각자의 은사라고만 여겼습니다.
하지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볼 때면 부러웠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있는 생각을 그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내가 적절하게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찾지 못해서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긴 시간에 걸쳐 내게 말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젯밤에 누워 주님의 하신 일을 찬찬히 생각해보니
정말 예측할 수 없는 계획과 방법과 시간이 있었습니다.

내가 전공한, 잘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없다고 얘기한 영역을 통해서,
적어도 한 번 이상 ‘나는 이 분야는 정말 할 수 없다.’ 고 말한
그것을 통해 주님은 일하셨습니다.
나는 은혜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벌써 10년이 넘게 사진 찍었지만
오늘 사진 찍는 자체가 내겐 감사의 제목입니다.
이젠 익숙해져서 밥 먹는 것처럼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라 말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색약이라지만, 색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나 대로의 색 감각을 가지고 사진을 찍고,
내게 보이는 데로의 색으로 사진 찍고, 그림을 그릴 뿐,
이것을 장애라고 생각해본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나누어 말할 수 없습니다.

“왕이신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내가 날마다 주를 찬양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시145:1-2)
다윗은 왕이지만, 하나님을 왕으로 모십니다.
다윗이 왕이 된 이후에도 다윗은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기억합니다.

자신의 왕이신 하나님을, 다윗은 몇 번에 걸쳐 찬양하는데
특이할 부분은 다윗은 하나님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하나님과 관련될 때의 이름은 그 분의 거룩한 성품이나 사역등을 반영합니다.
결국 이 말은 자신에게 이루신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했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할 뿐 아니라,
자신의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만났고 이를 찬양했던 것입니다.

나는 가끔 에덴동산이 그립습니다.
거울을 대면하는 듯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그 사귐,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그 사귐이 어떤지가 궁금합니다.
창세기 2장은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이라 표현합니다.
하지만 창세기 3장에서는 창세기의 저자가 ‘여호와 하나님’이라 칭하는 반면에,
뱀과 여자와 남자는 ‘하나님’이라 칭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엘로힘’이라는 능력자, 심판자의 의미로 통칭적인 ‘신’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바알과 하나님 모두를 신으로 부를 수 있는 것 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능력자이면서도 우리와 친밀하게 관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 나와 관계 맺으시는 분을 뱀은 이간하여 갈라버렸습니다.
나와 하나님을 별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선악과를 먹게 되면 그 능력자와 같은 능력자가 될 것이라 속삭이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에 대한 의존자가 아니라 자존자로 서는 순간,
우리는 변질 되는 것입니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말을 하고 있지만,
긴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감격할 수 있다면,
자격 없는 내게 주신 아버지의 선물인 것을 잊지 않는다면,
나는 정말 행복할 것입니다.

왕이신 하나님,
찬양받기 합당하신 주님과,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왕이신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내가 날마다 주를 찬양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시145:1-2)

이브라힘

제가 참 좋아하는 분이 계십니다.
아랍어, 불어, 영어, 한국어. 4개국어에 능통하신
그리고 수많은 고급 기술과 학력을 가지신 그 분은
두 아이의 아빠로, 아내의 남편으로 아프리카의 어느 구석에 살고 계십니다.

그 가정과 함께 보낸 시간이 가끔 생각납니다.
비염이 심한 아이의 코에 손을 대고 매일 아침마다 기도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후 가끔 그 분으로부터 편지가 날아옵니다.
벌써 두 달 전에 읽은 편지이지만,
곁에 두고 싶어서 책상 옆에 붙여 두었습니다.
읽으면서 마음이 먹먹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고민하는 것은 너무나 실존적인 고민이었기에
내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었습니다.

언젠가 나누어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일상의 시간은 작은 편지 하나 타이핑 하게 놔두지도 않습니다.
바쁜 일들 잠시 내려놓고, 일부분이라도 나누려고 합니다.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이브라힘 입니다.)
무슬림 가정에서 꼬리뼈가 없는 장애아로 태어났습니다.
아주 가난한 가정이었지요.
아버지는 어디론가 가셔서 없고 어머니는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하여 다른 곳에 살고
아이는 할머니의 손에 자라고 있었는데
할머니는 이브라힘 보다 한 살 어린 아이를 출산하였꼬
그렇게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웃음 가득한 아이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걷지 못하고 기어서 다니는 이브라힘은 늘 웃음이 가득하였고 늘 행복해 보였는데
먹지 못해서 늘 배가 고프기만 한 것 같아
한 번은 먹을 것을 가지고 가 주었는데 정말 엄청나게 빨리도 먹어 버렸습니다.
그 아이를 보면서 전 입양이라는 것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입양을 목적하기 보다는 아이의 건강을 위해서 저희 집에 데리고 와 잠시 살았습니다.
그때 마다 이브라힘은 즐거워했고 어려운 아내의 훈련을 이겨 내어
작은 플라스틱 의자를 잡고 걸어 다니기도 했습니다.
먹을 것도 조절할 수 있게 되었고
통통하게 살도 찍고 식사시간이 되면 먼저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모습을 하고 기다리고 하고
기도가 끝나면 아멘을 크게 하기도 했습니다.
혼자서 용변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집으로 보내면 아이는 살이 말리 있고 그래서 또 집으로 데리고 오기를 반복했습니다.
이브라힘 집에서는 저희 보고 이브라힘을 데리고 가 키우라고 간절하게 말하기도 하여
법적인 상황을 확인해보니 외국인 집에서 현지 아이가 자라는 것이
법적으로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이브라힘이 가끔 저희 집을 방문하는 것으로 그쳐야 했습니다.
그만큼 우리 가정은 이 아이를 사랑했고 보살펴 주길 원했습니다.

아이가 배가 아프다고 하여 병원에 가서 검사한 결과
아이의 신장에 결석이 가득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것을 어떻게 제거할까 고민하면서 약도 먹이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기로 했습니다.
로이이라는 의사 선교사님께서 아이의 수술을 도와주기로 했고
카메룬으로 보내어 수술을 하기로 하여
이런 저런 여러가지 검사를 하고 나서
우리는 이브라힘을 카메룬의 응가운데레 라는 도시로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수술을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일차로 오른쪽 신장을 수술하여 결석을 제거했습니다.
결석은 크고 작은 것이 아주 많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요?
수술 후, 우리 집으로 다시 돌아온 이브라힘은 밝아 보였고 웃음을 가득 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잘 먹지를 못하고, 소변을 작은 파이프로 받아내야 했고
수술 한 곳을 소독 해야 했습니다.
얼마 후 이브라힘은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보내는 마음이 너무 아프기만 했습니다.
수술을 하러 갈 때는 이번이 어쩌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우리는 사진을 찍고 기쁘게 병원으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시골집 갈대잎으로 엮어서 만든 집, 먼지 펄펄 나는 그 곳에서
이브라힘이 잘 견디어 낼 수 있을까 생각하고 고민했습니다.

아. 그렇게 걱정하고 있을때 전화가 왔습니다.
이브라힘이 아침에 눈을 감았다는 것입니다.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브라힘이 죽었다는 소리는 믿기지 않았습니다.
정확한 사유를 듣기 위해 찾아갔지만 아무도 없었고
누구 하나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장애를 가진 이브라힘을 모든 가족이 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너무 분노가 나고 화가 났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7살이 넘은 아이의 몸무게가 9킬로도 되지 않은 채 가난과 배고픔으로 살다가
치료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죽은 것이 너무도 슬픈 일이었습니다.
내 자식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너무도 내 마음을 사로잡아
죄책감이 크고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이브라힘을 위해 예배 하면서도 분하고 원통해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무슬림을 주께 돌아오게 하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인가?
이렇게 마음 아파야만 하는 것인가?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다했는데 왜 하나님은 이 아이를 데려가셨을까?
이렇게 귀엽고 순진한 이브라힘을 힘도 없고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아이, 꼬리뼈가 없어 키가 자라지 않는 이브라힘..
힘 없이 늘 외로운 이 아이를 왜!.
살리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왜 하나님은 이 아이를 데리고 가셨을까 생각하면서
난 힘 없는 사람이란 것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이브라힘이 살던 마을을 가보았습니다.
여전히 이브라힘이 없는 마을은 한적했고
아이들은 갈대로 만든 작은 교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브라힘도 그 움막에 있는 아이들 사이에 끼어서 공부하고 소리치고 웃고 해야 하는데
마음이 아프기만 했습니다.

이브라힘을 왜 주님은 아무 말 없이 그 어린 아이를 데려 가셨을까요? ….

… 마을 주민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는 그 곳에 학교를 짓기로 했습니다.
고통 없고 행복한 학교 교육으로 무지를 깨우치고 이브라힘 같은 고통의 아이가 없는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그런 학교를 짓자.
그 학교 이름을 이브라힘 학교라고 하자.
마을 주민들은 모두가 환영하고 그렇게 하겠다고 하여
지금 벽돌을 만들고 있고 모래를 퍼 나르고 있습니다. “

요아스의 실패

교회와 기독교계에서 여러 불미스런 사건들이 발생할때

나는 왜 이런 일이 생겨나는 것일까를 의문했습니다.
지인은 그들이 믿는 하나님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다른게 아닐까? 라는 문제제기까지 했습니다.

나는 ‘경험과 기억’ 때문이라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격하며 하나님을 섬겼을 때
그들이 내놓은 고백과 행동은 진짜이며,
그들의 저작과 작품들 모두 진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경험만으로 하나님을 해석하거나
타성에 젖거나,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잊게 되면서 점차 자신의 감각과 판단대로 결정하느라
돌이키기 힘들만큼 멀어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결국 하나님께 멀어져 버린 사람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이
내가 보낸 수많은 시간과 날마다의 내면을 돌아보아도 동의할 수 있습니다.
아합 가문의 딸인 아달랴로부터
성공적으로 정치와 종교의 개혁을 이루어 낸
요아스왕과 여호야다의 경우를 살펴도 이해안되는 장면이 너무 많습니다.
40년 장기통치를 이루어낸 요아스왕은
성전을 수리하게 됩니다.
유다의 역사에서 성전에 손을 댄 사람은
다윗과 솔로몬, 요시아 정도로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성전 수리가 왕권강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는 하지만,
오직 그 목적이었다면 다른 왕들도 앞다퉈
이런 방법을 사용했을텐데 그런 사례를 찾기 힘듭니다.
하나님은 제사장 여호야다가 요아스왕을 교훈하는
모든 날동안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아달랴의 아들들이 바알을 위해

여호와의 성전을 약탈한 후 (대하 24:7)
요아스는 제사장들을 통해 성전을 수리할 것을 명령했지만
제사장들은 상당한 시간이 지나도록 미온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의아스러운 것은 제사장 여호야다마저도
이들과 같은 행동을 취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왕은 제사장들을 거치지 않고 공사를 맡은 이들에게
보수비용을 넘기는 방법을 사용해서 성전수리를 이루어 냅니다.
성경은 제사장 여호야다를 흠이 없는 사람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성공적인 개혁을 이루어 냈고, 요아스왕을 주님 앞에 바르게 지도해 내지만
그또한 제사장 무리들과 같은 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성전의 파손한 데를 수리하지 아니하였느냐” (왕하 12:7)

요아스는 성전을 수리하는 과정을 통해
제사장보다 더 나은 신앙적 결단과 믿음을 보여주는듯 합니다.
그때쯤 아람 왕 하사엘이 가드를 함락시키고 예루살렘을 향했을 때

요아스왕은 모든 성물과 성전과 왕궁에 있는 금을 조공으로 바쳐야만 했습니다.

그 후 요아스왕은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은 후
곧바로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우상숭배를 장려했습니다.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 선지자가 높이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어찌하여 너희가 주의 명을 거역하느냐? 너희가 형통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주를 버렸으니, 주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다.”(대하 24:20)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서

다시 여호와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려고 선지자를 보냈으나 (대하2419)
요아스왕은 명령을 내려
스가랴 선지자를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로 쳐죽이고 말았습니다.
아달랴로부터 죽게된 어린 요아스를 구해낸 여호세바와,
요아스를 왕으로 등극시키고 평생동안 그를 여호와의 길로 지도한 여호야다 제사장.
은인의 자녀인 스가랴를 돌로 쳐죽였습니다.
성경은 이런 요아스 왕에게 ‘이와 같이 스가랴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베푼

은혜를 기억하지 않고 그의 아들을 죽였다.’고 말합니다. (대하24:22)

결국 요아스왕은 하나님을 떠난 것과 스가랴을 죽인 일로 인해
일년 뒤, 아람을 통해 큰 피해를 입게 되고
상처 입은 요아스왕은 반란을 통해 암살당하고 맙니다.

나는 요아스왕이 이렇게 즉각적으로 하나님께 등을 돌린 이유가 궁금해서

며칠동안 이 본문을 고민하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말하고 있지 않지만,
첫번째 아람 왕 하사엘의 침공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떤 제사장보다 성전을 보수하는데 열심이었던 요아스왕에게
자신의 신앙적 열정과는 무관하게 아람과의 물리적 충돌과
그로 인해 성전의 보화들을 이방인에게 조공바치는 굴욕적인 결과까지

요아스에게 이 사건은 큰 혼돈이었을것 같습니다.

“나도 하나님을 믿어봤어. 누구보다 그를 사랑했고

그를 향한 열정은 종교지도자들보다 더할 정도였어.’

한때, 자신이 믿는 하나님은 비록 아달랴로 부터 죽음의 문턱에서 구원해 내셨지만
전쟁에 있어서 한심할만큼 무능한 분이라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인지했던 것은 아닐까요?

요아스왕은 하나님을 섬기면 이 땅에 아무 고난도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라면 그 분을 섬기는 자신에게는
어떤 고통이나 굴욕도 없어야 한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 생각이 산산히 깨어지자
요아스왕은 자신의 뜻에 반대할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고 난 후
급선회하여 우상들을 끌어들였던 게 아닐까요?
이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강대국의 신들을 끌어와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을까요?

요아스왕의 실수는

자신의 고난이나 실패가
하나님의 무능력으로 말미암았다고 여긴 것입니다.
요아스왕의 실패가 곧 하나님의 실패는 아닙니다.

우상을 끌어들인 요아스에게
요람은 일 년뒤 다시 침공하게 됩니다.

아람군대는 적은 무리였으나
심히 큰 유다의 군대가 그들에게 패배했고
방백들은 죽었으며 물건들은 노략당하게 되었습니다.(대하24:24)
아주 적은 무리의 적군 앞에서도 우상들은 요아스를 전혀 돕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그 우상으로 인해 하나님은 요아스의 반대편에 서셨습니다.
블레셋의 전투에서 하나님의 궤를 빼앗기고, 대제사장의 두 아들이 죽임을 당했을 때
사람들은 이가봇,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다고 말했지만
하나님의 언약궤가 머무는 곳마다 당신의 영광은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삼상6:20)
우리의 실패가 하나님의 실패가 아니며,
우리가 실패처럼 여기는 실패가 완전한 실패 또한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북 이스라엘의 아합가문이 예후에 의해 정리되었고,

남 유다의 왕 아하시야까지 죽게되자,
아합과 이세벨의 딸이자, 아하시야의 어머니인 아달랴는
남은 왕족들을 모조리 죽이고 여왕으로 등극했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과 유다왕국의 역사속 유일한 여왕이었습니다.

그녀가 유다왕국의 왕좌를 차지했다는 사실은 그 이면에
너무나 충격적인 메세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끊어졌는가?”

하나님은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영원히 유다를 통치할 것이라
약속하셨는데, 다윗의 후손이 아닌, 그것도 바알을 숭배하는
이세벨의 딸이 유다의 왕국으로 등극했으니 말입니다.
아달랴와 백성들은 알지 못했지만
모든 유다의 왕족을 죽일때
여호세바가 어린 요아스를 침실에 숨겨 살리게 됩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6년동안 숨겨서 양육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달랴가 나라를 다스린지 7년째 되던 해에
제사장 여호야다를 통해 극적으로 어린 요아스는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아댤랴는 그의 어미 이세벨의 죽음을 연상케 하며 죽음을 맞게 됩니다.
사단의 세력은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리기 위해
끊임없이 무자비한 공격을 감행합니다.
바로는 이스라엘의 남자들을 모조리 죽이려 하지만
거기서 민족의 지도자 모세가 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탄생때도 헤롯왕에 의해
베들레헴 인근에는 잔인한 살륙이 있었습니다.
시대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역사속에 어떻게 일하시고 계신지
다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대적 상황에 ‘무관심’하시거나 ‘무능력’하시다고 판단합니다.
어린 시절, 나도 하나님을 그렇게 알고 믿었습니다.
내 구원과 영혼의 문제는 책임지시겠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무관심하신 분으로만 여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시간과 방법을 따라 언약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제사장 여호야다는 왕위 즉위식때
백성들과 언약을 맺게 되는데, 여기에 사용되는 단어가
‘카라트 베리트’라는 말로, 어원적으로는 언약을 자르다, 베다라는 뜻입니다.
고대근동지방에서 계약 당사자간에 언약을 체결할 때
짐승을 죽이고 잘라 그 사이를 지나가게 함으로
언약을 체결하는 방식에서 기인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쪼갠 짐승 사이로 당신이 그 사이를 지나셨습니다.
주님이 맺은 언약은 당신께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서 수많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약속에도 불구하고
이세상은 제멋대로인것 같아 보입니다.
마치, 다윗이 앞으로 왕이 될 것처럼 기름부으셨지만
그의 현실은 미치광이 최고권력자를 피해다니는 도망자 신세였습니다.
그리고 다윗 언약은 낡아서
벌써 6년째 그 왕위를 아합의 딸, 아달랴가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낙심합니다.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시간 밖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약속은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어떤 것보다 영원합니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현실이 영원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사40:8)

엘리야 – 예후

갈멜산은 바알을 숭배하는 본거지와 같습니다.
그곳에서 엘리야는 450명의 바알 선지자와 대결을 펼칩니다.
450명의 바알 선지자의 외침은 허공을 쳤으며,
온 백성들은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목도하고
엎드려 소리쳤습니다.
“여호와, 그분이 하나님이시다. 여호와, 그분이 하나님이시다.”
바알 선지자는 그곳에서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3년의 기근이후 이스라엘에 비가 내렸습니다.
극적인 드라마처럼 이제 모든 일이 해결되야 할 시점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드라마와 같지 않습니다.
영적 싸움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살기 가득한 이세벨의 위협앞에 엘리야는 유대광야에까지 도망쳐서
로뎀 나무 아래서 죽기를 간청했습니다.
뜨거운 광야에서, 그늘 하나 만들어 주지 못하는 로뎀나무아래
지쳐버린 엘리야에게서 우리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여호와여, 이제 이것으로 충분하니 제 목숨을 가져가 주십시오.

저는 저의 조상들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왕상 19:4)
불로써 응답하신 여호와 앞에 아무 변화없는 이스라엘과
여전히 기세등등한 이세벨의 날카로운 칼날,30
자신의 수고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혀 변하지 않는 세상의 견고함. 그 앞에서의 무력함.
지쳐있는 엘리야를 하나님은 위로하십니다.
마치 혼자서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짊어지거나 해결하려 하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남은 칠천 명을 말씀하십니다.
이 전쟁의 주인공은 엘리야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갈멜산에서의 전투 앞에서 성경은 오바댜를 통해
여호와의 선지자 백 명을 아합왕에게서 숨겨 돌본 이야기를 말합니다.
엘리야를 통해 전면에서 드러나게 일하는 것만이 사역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 이면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상황은 우리가 예상한데로 전개되지 않지만,
그것으로 낙심하지만,
하나님이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커다란 영적 승리로 모든 것이 바뀌어 질 것 같아 보이지만
사람과 세상의 변화는 쉽지 않습니다.
진정한 승리는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오늘의 순종이며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다음 할 일들을 알려주시는데
그 중 하나가 예후에게 기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는 것입니다. (왕상 19:16)
이후, 예후는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는 말로써
아합에 속한 사람들과 유다왕 아하시야의 친족들을 숙청했으며
바알 숭배자를 죽이고 바알 신당을 허물어서 변소로 만들어 버립니다.
결국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예언한 것처럼
예후를 통해 아합가문과 이세벨을 철저하게 심판하셨습니다.
“내 마음에 있는 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은즉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사 대를 지내리라” (왕하10:30)
예후는 오므리 왕조와 바알 종교를 뿌리뽑는 심판의 도구로 하나님께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역 그 자체에 철저하게 매몰되었던 것 같습니다.
성경은 그를 무섭도록 정직하게 평가합니다.
“그러나 예후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법을
지키는 데는 마음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죄 짓게 한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못했습니다.” (왕하10:31)
여로보암은 하나님과 함께 금송아지를 섬기는 종교 정책을 펼쳤는데
예후도 이 정책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예후 왕조로 추정되는 시기의 당시 유물를 보면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다른 신도 함께 섬겼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섬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왜 사역에 실패했느냐고 따져 묻지 않았습니다.
낙심한 그를 위로하셨으며,
혼자서 사역했다고 지쳐 있는 그에게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서만 일하는 것이 아님을
남겨 놓은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예후의 사역은 성공했고, 혼자서 모든 것을 다 이룬 것 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다 이루었다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역이나 공적으로도 그 자체가 주님의 기쁨일수는 없습니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을 내가 돌볼 것이다.” (사66:1-2)

하나님은 어떤 사역을 이루어 냈느냐가 아니라

지금 내 마음의 상태를 물으십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당신의 말앞에 떠는 자를 돌보십니다.

기드론 시내에서

원수 갚는 일은 주님께 속한 일입니다.
마음이 아플 때 주님의 십자가를 더욱 생각합니다.
구세주임를 증명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군중들 앞에서 아무 변명 없으신 주님을 생각합니다.
나의 정당함을 내려 놓는 일은
공의롭거나 정의로운 일을 해내는 일보다 힘든 일입니다.
멋진 일을 이루는데 주님께서 도우시는 것 뿐 아니라
나의 정당함을 포기하는 일에도 주님은 도우십니다.
정확하게 들여다 보면, 나의 정당함 따위는 애초부터 없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바울 조차도 죄인중의 괴수라고 말할 정도로
은혜를 알수록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 그 실체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에 쫓겨 기드론 시내를 통곡하며 건너 광야로 향했습니다.
맨발로 도망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제사장 사독과 레위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고 피신하려 할 때
다윗은 사독에게 ‘하나님의 궤를 성으로 도로 메어 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성으로 돌려 보낸 후, 그는 맨발로 광야를 향합니다.

사울의 족속인 베냐민에 속한 시므이가 도망하는 다윗을 향해 저주했습니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다윗과 그 일행은 성경에서 찾기 힘들정도의 저주를 당합니다.
신하 아비새는 시므이의 머리를 벨 것을 다윗에게 청합니다.
그 때 다윗의 대답이 놀랍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한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삼하16:11)
다윗은 자신에게 부어지는 저주까지도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이해합니다.
시므이는 다윗과 일행이 도망하는 동안
산비탈을 타고 계속 따라오며 저주하고, 돌을 던지며 띠끌을 날렸습니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보시고,
오늘 그의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삼하16:12)
시므이를 단칼에 죽일 것을 청한 아비새에게 다윗이 덧붙인 말입니다.
왕궁에 있던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광야로 쫓겨 나왔을 때 하나님 앞에서의 다윗의 영성은 회복되었습니다.

삶의 일상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충동케 하는 수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이 일들이 우리의 부족함이든, 오해이든, 적대감이든
내 마음이 광야에 와닿을 때, 주님의 방법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