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리며

나는 결코 작가를 꿈꾼적이 없습니다.
‘나는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나 할까.’
이 물음으로 내 인생을 회의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사랑해서,
당신이 이끄시는 걸음을 걸어가다 보니
어느 순간 나는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이렇게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사람이 계획할지라도 그 길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이것을 깨달았다면
내 자녀에게도 그렇게 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율배반적이며 이중잣대를 들이대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녀들을 방임하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다양성 가운데서
하나님이 각 사람들에게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스무살 언저리가 되면 대학을 가게 됩니다.
그 때까지도, 그 후로도 자기 길이 열리지 않더라도
만일 아이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 가운데 있다면
그것은 옳게 가는 것입니다.
느려보여도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에게 계획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으며, 다윗이 그랬습니다.

부모에게 아이는 생명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아이를 위해 부모는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아이들의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사울왕은 블레셋의 위협 앞에 자신의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싸웠고, 전쟁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했습니다.(삼상13)
왜냐하면 사무엘을 더 기다리다가는 전쟁에서 패배할 수 있다고 직감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전쟁에서 이겨야 했고, 자신의 백성을 지켜내야 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이 오해한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에게 무관심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내 인생을 위해, 아이를 위해 전쟁하면서
마치 하나님이 내 인생에, 아이들의 인생에,
그리고 자신의 백성들에게 무관심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사울은 당장 그 전투에서는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무엘은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임금님의 왕조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할 것입니다”(삼상13:14)

사울왕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백성이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임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아이들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주님께서 사무엘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 말씀하신다면
블레셋의 위협앞에서도 기다리는 것이 궁극적으로 전쟁에서 이기는 비결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항상 옳으실 뿐 아니라, 계획하시고
또 당신의 계획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평범한 일상

내일 할 일까지 오늘 밤에 다 해치워 버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주님이 주신 마음의 감동이 있어서
회의를 서둘러 정리했습니다.

“실용적인 관점에서는 바보같지만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함께 해주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는 너무나 중요한 것 같아.

언젠가 주님은 내게 그것을 부탁했습니다.
집을 나갈 때, 들어올 때 아이들을 안고 기도해주는 것,
잠들 때 아이들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해주는 것들.
막내 소명이가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가
내 손에 자기 머리를 들이밀때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모릅니다.
주님은 내게 얼마나 긴 시간을 함께 해주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바쁜 시간에도 아내와 자녀와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려는
내 마음의 진심을 알게 해주는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내가 며칠전 말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는 곳이 선교지라면,
내가 아이들과 보내는 평범한 일상은
선교사를 키워내는 선교지인 것 같아.”
아내의 고백이 내 안의 울림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어느새 평범한 일상이 선교지가 되었고,
장난꾸러기 어린 아이들이 선교사가 되어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전도서 말씀이 있습니다.
“작고 인구가 많지 않은 어떤 성읍에
큰 왕이 와서 그것을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
그 성읍 가운데에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의 지혜로 그 성읍을 건졌다.
그러나 그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전9:14-15)

오늘 보내게 될 모든 평범한 일상속에 옳게 분별하고
지혜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주님 도와주세요.
그래서 무너져 가고 있는 이 성읍들에
우리의 작은 일상과 순종을 통해 주님의 나라를 세우세요.
사람들이 기억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아시면 충분합니다.
주님의 지혜와 모략으로 이 아침을 채워주세요.

내게 그 피는

온유가 유아부에서 성찬식 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아빠, 나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었어.
예수님이 온유를 위해 피도 주고 살도 줬거든.
그런데 예수님의 피는 빨간색이 아니라 보라색이었어.
너무 맛있었어.
그런데 나 너무 좋았어.
먹으면서 예수님 생각했거든.
선생님이 십자가 목걸이도 걸어주셨어.
십자가에 예수님은 없지만,
내 마음에 예수님이 계시니까 괜찮아.”
예전에 믿지 않은 친구가 내게 질문 했습니다.
그냥 ‘피’라고 하면 될 말을 교회서는 왜 굳이 ‘보혈’이라는
보다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느냐고.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수긍이 갔습니다.
기독교 문화속에서 소통되는 언어때문에

선교에 대한 진입장벽이 높아질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입니다.

보혈이든, 피든 그것이 무엇으로 불려지건
나는 성찬식때마다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보배로운 주님의 피가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찬식이면 그렇게 꺽꺽대며 울었습니다.
나는 그냥 피라고 부를 수 없었습니다.

내게 그 피는 보통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찬식 때 예수님의 피라며 마시는

포도주나 포도쥬스.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주님이 ‘나를 기념하라’ 하신 그 말씀이
내게 너무 소중합니다.
빨간색 피 대신 보라색 포도쥬스를 먹고
온유가 맛있었고, 좋았다고 합니다.
맛있어서도 좋았지만,
마시면서 예수님 생각을 해서 좋았다고 5살 아이가 말합니다.
딸 아이와 대화하며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내가 어떤 죄인인지 알지 못하면
주님의 십자가도 관념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어떤 죄인인지 알게 된 것은
마주 대하기 두렵지만, 동시에 가장 은혜로운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날 위하여 피 흘려 죽으신 사건은

바로 나를 위한 사랑임을 절절하게 깨닫게 됩니다.
_ 온유와 함께 손 모아 기도하는 모습을 아내 명경이 사진으로 찍어 놓았습니다.
사진 좋습니다.

수넴여인 – 광야

엘리사는 수넴여인에게
다른 곳으로 이주할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7년동안 기근이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넴여인은 가족을 데리고 블레셋으로 향합니다.
수넴여인은 엘리사의 말을 따라
블레셋에서 7년동안 지냈습니다.
하지만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자기 땅과 집을 모두 잃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살던 곳에서 이주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쉽지 않은 결정입니다.
수넴여인은 그 지역에서 꽤 넉넉한 부자였기 때문에
본토땅을 떠나는 것에는 많은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면 그만큼 잃을 위험이 적습니다.
마치 아람군대에 둘러싸인 사마리아성에서
나병환자들이 성안에서 죽으나,
성밖에서 죽으나 마찬가지라 여긴것 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많은 것을 가졌다면 상대적으로 느낄 위협은 더욱 커집니다.
하지만, 수넴여인은 엘리사의 말을 따라 블레셋으로 떠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었지만 아들을 갖게 되었고,
그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일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며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7년의 이민생활을 끝내고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왔을 때
그의 소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때문에 지난 시간들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지만
당장 오늘의 막막함과 내일에 대한 두려움은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늙은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수넴여인은
이제 과부로써 한 나라의 왕에게 자신의 사정을 부르짖기 위해
왕궁을 향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앞에서 막막하고 두려운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믿음의 선조들도
하나님의 약속앞에 이리 저리 흔들리며
이스마엘을 낳거나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도망하곤 합니다.
수넴여인이 왕궁에 다다랐을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왕에게 그동안 엘리사가 행한 위대한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죽은 아이를 다시 살린 일이 있는데
그 아이의 어머니가 바로 지금 왕을 찾아온 여인이라고 말합니다.
“내 주 왕이여, 바로 이 여인입니다.
엘리사가 살려 낸 사람이 이 여인의 아들입니다” (왕하 8:5)
게하시가 이야기할 그때 여인이 찾아온 그 장면을
성경은 ‘베힌네’라는 감탄사를 사용해서
이 장면이 얼마나 극적이며 절묘한 타이밍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인은 이 상황 앞에 얼마나 전율했을까요?
왕과 게하시 또한 이 예기치 않은 상황앞에 얼마나 놀라했을까요?
이 기적같은 만남을 통해
여인은 하나님이 엘리사를 통해 한 일에 대한 증인이 되었고,
옛소유 뿐 아니라, 7년간의 소출까지 되돌려받게 됩니다.
왕도 게하시도, 여인도 7년전에 이 만남을 계획한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이 시간을 주님은 계획하고 뜻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힘들고 두렵고 불안한가요?
가짜로 힘들고 두렵고 불안하지 않은 이유는
진짜 광야를 걸어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 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8:2-3)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라 번역되어 있지만
원문에 보면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입니다.
그것은 수많은 것을 연상시킵니다.
당신의 호흡으로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듯
우리를 살게 하시며
빛이 있으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천치만물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가리키는 지향점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요1:1)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7년간 타지에 머무르다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던 수넴여인,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우리의 처지와 오늘의 아프고 어둔 시절이
마치 광야와 같다면
우리를 궁극적으로 살게 하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두로의 아름다움

두로는 오늘날의 레바논으로
페니키아 해안의 부유한 항구도시였습니다.
두로는 멸망하는 예루살렘을 조롱했습니다.

“두로가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르기를
아하 만민의 문이 깨져서 내게로 돌아왔도다
그가 황폐하였으니 내가 충만함을 얻으리라 하였도다.”

예루살렘의 심판은 마땅한 것입니다.
마땅히 심판받은 예루살렘의 황폐함을 조롱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로 인하여 두로의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두로야 내가 너를 대적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받는 심판은 마땅하지만
마땅한 심판을 바라보는 이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성경에서 아브라함과 모세, 요나의 기사를 살펴보면서
또는 탕자비유의 첫째 아들의 태도를 보면서
자신의 죄로 인해 받게 되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을 바라보는 우리는
주님의 긍휼을 구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 저 사람은 심판 받을줄 알았어.
심판 받아 마땅해.”
이런 태도가 아니라,
주님의 긍휼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경은 여러 기사에서 그것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두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통해
자신들이 유익을 얻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즐겼습니다.
이후로 나오는 두로가 심판받는 이유는
두로가 추구하는 인생의 목적입니다.
두로는 자신이 가진 부요함을 가지고
스스로를 신이라고 여길만큼의 탐욕과 교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 두로야 너는 스스로 아름답다고 말하는구나.” (겔27:3)
성경은 두로가 아름답다고 말하고
그 근거를 20절이 넘는 구절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를 세운 자들은 너의 아름다움을 극치에 이르게 했다. (겔27:4)
두로는 아름답습니다.
겉만 번지르한게 아니었습니다.
두로 자신 뿐 아니라 주변의 나라들까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시 두로와 무역한 나라는 스페인을 포함해서 22개국에 이릅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유한합니다.
스스로 아름답다고 여기던 두로는 한순간에
동풍이 불어와 바다 한가운데서 산산조각 날 것이라 말합니다. (겔27:26)
자신이 아름답다고 한 근거들을 차례차례 무너뜨리십니다.

신과 같다던 두로는
결국 스스로 자랑하던 지혜와 부로 인해 역설적으로 멸망할 것입니다.
“너는 네 마음을 신의 마음같이 여겼으니
내가 이방 사람들을, 가장 포악한 민족을 네게 데려올 것이다” (겔28:7)

주님 안에서의 지혜와 아름다움은 존귀함이 될 수 있지만
아름다움과 부요함, 지혜 그 자체를 추구하고 자랑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너는 학살하는 사람 앞에서 ‘나는 신이다’라고 너는 말하겠느냐?
여기서 신은 다른 여러 가지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내가 자랑하는 무엇이라도 이 자리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두로의 아름다움은 가짜로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진짜 아름다웠고, 지혜롭게 경영했으며
그 경영으로 주변 해양도시중에서 가장 번영했습니다.
하지만 한순간에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고 끝장나 버렸습니다. (겔27:36)

우리가 몰두하고 목표하고 있는 것들은
무엇하나 근거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수많은 근거가 있습니다.
하지만 켜켜히 쌓아올린 그 근거는 주님앞에서 유한합니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출10:13)
동풍은 누군가에게 심판의 도구였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구원의 도구가 되어주었습니다.
자신의 부요함이
한편에서는 심판의 이유라는 사실이 나를 두렵게 합니다.
스스로 살아갈 수 있고, 볼 수 있다고 말한다는 것..
나는 어디에 서있는가.. 질문합니다. 기도합니다.

문제에도 불구하고

내 책상 앞에는 몇가지 신념이 적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말한 것이 내가 아니라, 살아낸 것이 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내가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이 나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낸 것이 나를 말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가끔씩, 자주 이 말 앞에 나는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살아가면서 내 마음 먹은데로 움직여 지지 않는 것이 너무나 많음을 알게 됩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살아가며 조금씩 다윗의 심정을 알 것 같습니다.

자신의 장인, 사울왕에게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몇 십년을 쫓겨 다녀야 했습니다.
다윗은 엔게디 광야에서 사울의 목숨을 살려주었습니다.
사울이 굴에 있는 동안, 그는 한 칼에 해칠 수 있었지만
그저 옷자락만 벰으로 자신이 사울을 선대하는 것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바로 다음 페이지에서 나발과 다윗에 대한 기사를 말합니다.
양 털을 깍는 축제의 날에 다윗은 나발에게 먹을 것을 청합니다.
들에서 양을 칠 때 자신의 목숨을 지켜준 다윗을 선대하라고 종들은 부탁하지만
나발은 자신의 종들에게 다윗에 대해 이런식으로 조롱합니다.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삼상25:10)
나발은 분명 다윗이 누구인지 알고 있지만,
그는 다윗의 처지를 곡해하거나 폄하해버립니다.
마치 다윗이 사울밑에 복종하기 싫어서 도주한 것처럼 조롱합니다.
다윗은 엔게디 광야에서 자신의 목숨을 쫒는 사울을 살려주었지만
이번에는 자신의 수하들에게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려 애썼던 다윗이지만,
자신의 진실이 모욕을 당하거나, 훼손당했을 때는 분을 참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만
성경에 ‘특별히 하나님께 속했다’고 명시된 세 가지가 있습니다.
전쟁과 재판, 그리고 원수 갚는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대로 원수 갚으려던 찰나에
하나님은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을 돕는 자로 다윗에게 붙이셔서
피의 복수를 막으시고 실수를 모면케 하십니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삼상25:33)

살아가며,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양을 따라 살고 싶은데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내 감정과 의지의 문제를 벗어날 때도 너무 많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아플적에 나는 이렇게 기도하곤 합니다.
“주님, 우리 가정의 가장으로 나를 삼으셨는데,
우리 아이들이 아픕니다.
내가 가장으로 그것을 책임지길 원합니다.
내가 온전히 서있지 못함으로 아이들이 연약합니다.
주님, 나를 긍휼히 여겨주세요.”
분명 모든 아픔들이 우리의 연약함과 직결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육체의 질병 뿐 아니라, 모든 문제들이 이와 무관하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아픔과 절망 중에도 주님으로 기뻐합니다.

내 마음대로 움직여 지지 않아서
나는 더욱 나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나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면서
나는 더욱 주님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문제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이 주님을 바라보게 된다면
그 문제조차 내게 감사의 제목입니다.
문제가 일으키는 파고(波高)보다 주님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더욱 깊어지길 기도합니다.

주님이 통치하시는 현실속에서

“모두가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마26:38)
베드로는 자신의 믿음을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중무장한 무리들 앞에서
칼을 빼어서 말고의 귀를 베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돌아섰고,
작은 여종의 질문앞에서도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용기있는 사람만이 용기있게 행동한다는 말에 나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목숨을 다해 주님을 사랑한다 했지만
그렇게 자신이 믿었을 뿐입니다.
주님을 향한 걸음은 용기있는 자들만이 걸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마26:38)
모든 일에 근심하지 말라는 성경의 가르침과 달리
예수님은 마음에 고민하여 죽기까지 되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역설적 상황에서 예수님의 고통은 내게 위로가 됩니다.

주님은 지금 내 마음의 모든 상태와 기도를 아십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항변들, 고통들을 주님은 아십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만 주님은 아십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마26:39)
예수님이 가르쳐준 기도는 당신이 앞서 걸으셨습니다.
전혀 이상적이지 않은 세상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현실세계를 통치하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아버지가 더욱 리얼한 현실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구합니다.
아버지를 더욱 사랑하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처절한 기도곁에서
제자들은 졸고 있었지만
주님의 때에 그들을 사용하셨던 것처럼
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막내이지만
주님 날마다 기름부어주세요.

야곱의 두려움

나는 구체적이고 꼼꼼하게 계획하고 살피는 편이 아닙니다.
허술하고 헛점많은 나에 비해 야곱은 무척 꼼꼼하고 주도면밀합니다.
야곱은 에서를 만나기 전날 밤을 새며 근심했습니다.
수 십년이 흘렀다지만 형 에서를 속이고, 축복권을 빼앗은 잘못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형은 사냥을 좋아하는 거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를 만나 그 곳을 마하나임이라 이름했지만,
하나님의 권세가 지금 자신이 직면한 두려움을 씻을만큼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지역밴드 모임 때, 속장님 한 분이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했습니다.
일흔이 넘으신 아버지께서 여전히 건설 현장에서 일하신다는 나눔이었습니다.
나는 이런 저런 이야기속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아파하는 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나눌 때는 새처럼 하늘을 나는 것 같지만
현실을 직면할 때면 가슴이 답답해 지곤 하는 것입니다.
그 날 밤, 속장님에게 따로 보낸 메세지가 있는데
일주일이 다 지날 때즈음 그 분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그 후로 계속 주님의 마음을 구하는 기도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내가 보낸 메세지는 대충 이런 내용입니다.
야곱이 지금 직면한 현실은
자신에게 실망하고 분노한 에서를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 아 이게 현실이구나.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은 시절입니다.
하지만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이런 풍경이지만
성경은 믿음의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길 요청하고 있습니다.

시편에서 자주 이야기하는
‘주의 인자와 주의 진실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는 말.’
여기서 인자라고 표현한 말은
‘우리 할아버지가 인자하다’라는 것처럼 사용된 말이 아니라
실패하지 않는 사랑, 신실한 사랑을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헤세드’를 번역해서 우리 성경에 ‘인자’라고 표현합니다.
같은 의미로 ‘에메트’를 번역한 말이 진실입니다.
이는 기대어도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견고할 것 같은 것에 기대었다가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기대고, 부동산이나 돈에 기대어 보지만
그것은 견고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현실이지만,
우리는 믿음의 눈을 들어
주님의 실패하지 않는 사랑, 견고한 사랑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두려움 가운데 에서에게 보낼 많은 선물을 보냅니다.
선물이 아니라 조공에 가까울만큼 어마어마한 예물을 나누어 준비합니다.
이런 모습들이 믿음 없는 행동으로 보여질 수 있지만
우리는 이 또한 알 수 없습니다.
비록 야곱은 두려움 가운데 이 일을 준비했지만
이 일들로 에서의 마음이 위로를 받을수도 있습니다.
“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하고 품 안의 뇌물은 맹렬한 부늘 그치게 하느니라” (잠21:14)
우리가 판단할 수 없는 영역은 너무나 많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하다 블레셋 땅으로 도망했을 때
그는 아기스(아비멜렉)왕의 부하들에게 발각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대문을 그적거리고, 침을 흘리며 미친척을 하여 가까스로 살아났습니다.
그는 이 일을 경험하며 시편 34편을 지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시34:4,7)
지금 다윗에게는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가운데
침을 흘리고 미친척 하며 수치를 감당해야 하는 암담한 현실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런 것들을 감수해서 살아났고
이 일이 하나님의 구원이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주님의 응답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경험을 많이 하게 됩니다.
이 장면을 보다 현실적으로 각색해 본다면
다윗은 빚쟁이나 조직폭력배들에게 둘러 싸여 있는데
자신은 다윗이 아니라고 침 흘리며 미친척 한 것입니다.
게다가 사울을 피해 도망나왔기에 이젠 돌아갈 집도 없습니다.
지킬 만한 자존심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상하면 한동안 헤어나오기도 쉽지 않습니다.
이런 수치스러운 상황에서 다윗은 자신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고,
두려움에서 건지시며 천사가 자신을 둘러 진쳐서 구원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한 후,
크신 구원을 노래했지만,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온 회중은 모세를 향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된다.’고 원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직면한 현실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주님을 원망하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당신들이 하는 원망은 우리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하는 것입니다.” (출16:8)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이스라엘은 직면한 현실에 대한 원망을 했지만
그것은 현실에 대한 원망도, 모세와 아론을 향한 원망도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을 구원해 내신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었습니다.

반대로 다윗이 오늘 드린 감사의 고백은
현실 속에 일어나는 처절한 아픔 속에서
보이지 않는 주님을 경험하며
그 속에서 놀라운 주님의 인자와 진실을 발견하고 드리는 고백입니다.

“여호와는 마음 상한 사람에게 가까이 계시고,
낙심한 사람들을 붙들어 주십니다.” (시34:18)
주님은 예배 가운데 말씀하시지만
우리의 반복되는 일상 가운데도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상해 있다면 숨을 한 번 크게 내쉬어 보세요.
이 공기의 밀도보다 더 세밀하게 주님은 우리 곁에 계십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간

시대의 절망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나 자신의 한계를 볼 때마다 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때마다 성경은 내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적용하고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성경은 종종 자격없는 한 사람을 찾아와서 그를 구원하시고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시는 주님의 일하심을 말합니다.

사울왕을 버리시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끌 유능한 누군가를 찾아서 왕으로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아직 작고 초라하지만, 그래서 잔치에 초대받지도 못한 막내를 찾으셨습니다.
시대의 위대한 지도자 사무엘조차 그를 몰라볼 만큼 그는 볼품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왕이 되기까지 성경의 시간은 너무도 느리게 흘러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십니다.
시대의 위기와 절망은 이렇게 처절한데도 성경의 시간은 느리게 움직입니다.
그 시간이 길지 않으면, 또 한 사람의 사울왕이 되고 말것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느리게 움직인다는 말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 수 많은 전쟁 기사들은 단 몇 줄로 그 것을 기록하지만
여리고성과 아이성의 싸움에서의 시간은 매우 느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에 대해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후의 몇 줄로 끝내버리는 전쟁의 기사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싸우셨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의 고된 노역으로 하나님을 찾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탄식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산파 십브라와 부아를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태어난 모세는 애굽의 왕족에서 자라게 되지만
다시 미디안으로 도피하게 됩니다.
그는 나이 80이 될 때까지 양을 치는 목동으로 지내게 됩니다.
주님은 당장 애굽을 무너뜨릴 강력한 무언가를 강구하신 게 아니라
이스라엘의 큰 구원을 이루기 위해 철저하게 무너져 내린 나이 많은 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엘리 제사장 때의 어두운 사사시대를 깨뜨릴 한 사람을 찾을 때도
그저 앙숙이었던 브닌나의 갈등과 자신의 불임으로 아파하던
한나의 심정을 통하는데서 시작하셨습니다.
마치 사울왕을 대신할 왕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은 이새의 막내 아들을 찾으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제사장 엘리와 그의 아들들이 비대해지고, 악행이 심하여질 수록
어린 사무엘은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으며 자라났습니다. (삼상2:26)
이 말은 어린 아이들이 그저 어른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다는 의미를 넘어서는 말입니다.
이렇게 자라나는 것은 사사 시대의 절망을 깨뜨리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비슷한 표현을 누가는 예수님께 돌리고 있습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눅2:40)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나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눅2:52)
예수님에 대한 이런 표현은 그저 어린 시절에 사랑스런 아이였다는 차원을 넘어,
말라기 이후 어둠이 가득한 시절을 깨뜨리고
온 인류의 구속주로 자신을 드릴 예수님의 일하심을 특별히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내가 일하는 방식처럼 주님이 움직여 주지 않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가장 선하신 뜻을 따라 일하십니다.
내가 주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의도와 때를 따라 내가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의 시간 속에 갇혀 지내지만
주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시간 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찰나를 살아갈 뿐입니다.
글과 함께 올린 이 사진은 1초가 넘는 시간을 기다려 나온 결과입니다.
시간이 중첩되면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풍경을 만나게 됩니다.
우린 고작 사진 한 장 앞에서도 경험하지 못할 차원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진 속의 몇 초와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시간 자체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내 눈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지 않아도
당신은 날마다 성실하게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사55:8-11)

삶의 선택

“그에게서 마병 천칠백 명과 보명 이만 명을 사로잡고 병거 일백 대의 말만 남기고
다윗이 그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 (삼하8:4)
다윗은 결국 통일 왕국의 왕이 되고, 그는 어디에 가서 싸우든지 이기게 됩니다.
그 승리한 기사의 한토막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기록을 만나게 됩니다.
당시 마병은 놀라운 기동력과 파괴력을 가진 전투력이었는데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은 말의 힘줄을 끊었습니다.
신명기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왕에게 주시는 규례들이 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었지만, 마병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최소한의 마병만을 남긴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그냥 좋은게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좋은 건, 주님이 자신과 함께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기도를 부탁했던 분들에게 목사 안수를 받지 않겠다는 결정을 나누고,
몇 명에게 책망 아닌 책망을 들었습니다.
주신 타이틀을 왜 가지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저를 생각해서 해주신 말씀임을 압니다.
하지만 나도 삶 속에서 말들의 힘줄을 끊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된 야곱과 식솔들은 자신들을 시기하는 라반의 낯을 피해 야반도주합니다.
하지만 라반은 야곱을 금세 뒤쫓았습니다.
라반은 자신의 드라빔을 찾기 위해 야곱의 모든 소유를 뒤졌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자신의 정직과 억울함과 의로움을 토해내듯 쏟아냅니다.
드라빔이 자신의 아내에게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모른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감추지 않으셨다면 야곱의 이런 성취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금 야곱은 알지 못하지만, 라반이 떠나간 다음에
자신의 아내에게서 진짜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야곱은 정말 간담이 서늘할 것입니다.
어미의 태에서부터 살길을 궁리하고 모색했던 야곱은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살게 하시는구나.’
이런 선택들 앞에 나의 의로움 또한 하나도 없음을 고백합니다.

청년부에서 임원으로 섬긴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 학교에서 교환학생으로 유학을 갈 기회가 있었는데
포기한 이유는 청년부를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두들 제 갈길을 찾지만, 맡은 자가 떠나버리면 공동체를 돌볼 사람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리더쉽으로 또 다른 후배가 세워질텐데
후배도 똑같은 경우를 만나게 되면 공동체를 버려두고 떠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선배의 선택들은 후배들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나는 당시에 속으로 웃으면서
‘영어를 배울 기회를 놓쳤으니 외국가기는 글렀다’고 생각했습니다.
영어를 못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지만 해마다 외국을 참 많이 다녔습니다.
공항에 들어설 때마다 까마득한 이 날의 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살게 하시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스스로 살 길을 모색해야 하지만,
주님이 나를 살게 하신다면 나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면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