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바라보자

야곱은 라반과 거래를 했습니다.
얼룩이나 점이 있는 염소와 양들은 이제 야곱의 것입니다.
주변에서 부러워할 만큼 야곱은 부자가 됩니다.
하지만 라반과 그의 아들들은 곧 그를 시기하게 되었고
야곱은 곧 삼촌 라반의 집을 야반도주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미 성경을 통해 그 결론을 알고 있지만,
당시의 야곱 입장에서는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시간이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근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야곱처럼 부자가 되면 근심을 덜어버릴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돈이 있으면 현실적으로 덜어낼 짐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알게 됩니다.
우리의 근심과 불안은 끝이 보이질 않습니다.

미디어를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워가지만, 속고 있습니다.
실제의 삶과는 거리가 있는 미디어의 삶의 행태를 보게 됩니다.
현실에 있지 않는 감정과 삶의 장면을
실제 현실에 집어 넣으면 그 차이만큼 이격(離隔)이 생깁니다.
연애와 결혼, 살아가는 수준까지도.
성경을 통해 배우는 것보다 주변 문화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워갑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우리의 마음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많은 두려움은 결국 내일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불확실성에서 시작됩니다.
만약 야곱이 자신의 삶을 그린 성경을 미리 읽고
그 장면속에 살아간다면 불안하거나 두렵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과 씨름하려 들지도, 이름이 바뀌지도 않았을 겁니다.

나는 자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말하지만,
정작 내 삶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내 가족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며칠전에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아내에게 말할 수 없을만큼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나를 믿으며 함께 하고 있지만
나는 아내에게 “나를 믿어라”고 확신있게 말할 수 있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 자신도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데,
누군가에게 나를 믿으라고 말한다는 것은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주님을 바라보자.”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주님을 바라보자. 주님을 바라보자는 이 말은 얼마나 가슴 벅찬 말입니까.
주님을 바라보자.
이 말은 그저 변명의 말이 아닙니다. 얼마나 실제적인 말인지요.

나는 청년시절에 결혼하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두려웠습니다.
과연 내가 이렇게 살아가며 가족을 책임질 수 있을까.
이 질문 앞에 나는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두려움 많은 내게 찾아와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라반의 낯을 피해 도망하는 야곱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7:14)
_임마누엘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주님은 두려워 하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 아버지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그 분이 내 아버지 되시기에
주님을 바라보자는 말은 결코 허망한 말이 아닙니다.

버스안에서 나는 이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42:5)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내 얼굴을 들어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불안해 떨고 있을 때, 주님을 바라보는 것.
주님은 우리에게 그것이면 충분하다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다리

학교 다닐 때의 일입니다.
점수에 욕심은 없었지만 성적은 좋은 편이었습니다.
구약학을 가르치는 교수님은 학기중에 네 번의 쪽지시험을 치뤘습니다.
쪽지 시험은 앞 줄과 뒷 줄을 나누어서
앞 줄은 책을 덮고, 뒷 줄은 책을 펴서 시험을 쳤습니다.
당연히 앞 줄은 만점을 받을 수도 있지만, 위험을 부담해야 했습니다.
반면에 뒷 줄은 기본점수는 받을 수 있었지만 몇 점의 핸디캡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네 번의 시험중 세 번의 좋은 점수를 합산한 점수를 사용하는게 교수님의 방식이었습니다.

난 이미 세 번의 시험을 치뤘고,
점수에 별 욕심이 없어서 네 번째 시험은 빈강의실에서 책이나 읽을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강의실에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듣게 되었습니다.
이 교수님은 마지막 시험에 맨 앞자리에서 시험을 치는 사람들은 무조건 만점을 준다는 얘기입니다.
지금까지 매 년 그렇게 해왔지만, 문제는 교수님이 우리에게 직접 이런 언급을 하신적은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풍문을 믿기로 했습니다.
시험에 참여할 생각이 없어서 아무 공부도 안했지만 맨 앞 자리에 앉기로 했습니다.
정말이지. 빈 답안지를 드러내고 앉아 있는건 고역이었습니다.
교수님과 조교들이 시험 감독을 하며 내 앞을 걸어다니는데
답안지에 아무것도 안 쓰고 앉아 있으려니 벌거벗은 것 같아서 땀이 삐질삐질 흘렀습니다.
하지만 나는 시험해보고 싶었습니다.
성적은 아무래도 좋지만, 교수님이 매 학기마다 그런 방식을 적용하는지가 궁금했습니다.
시험해 보지 않으면 증명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엘리베이터에서도, 강의실에서도 그 풍문을 많은 사람들이 들었지만
결국 빈 답안지로 맨 앞자리에서 시험을 본 사람은 나 혼자였습니다.

시험 결과는 시험을 친 후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모두들 노력한 수고에 상응한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말그대로 은혜로 만점을 받게 되었습니다.
교수님은 ‘나의 일관성을 믿고 순종한 값으로 만점을 줬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한 사내가 길을 가다가 정말로 낡아서 부서질 것 같은 다리를 만났습니다.
밟으면 부서질 것 처럼 보이는 다리 앞에서
자신을 가장 사랑하며 신뢰할만한 이의 보증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다리는 이미 몇 백년전부터 이 모양이었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부서지지 않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 다리는 튼튼합니다. 내가 책임집니다.’

사내는 그 보증을 보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그렇구나. 다른 길은 없구나.
이 다리는 보기에는 위험해 보이지만 튼튼하구나.’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고 사내는 다리를 건너지 않고,
다리 저편에 도착하기 위해 아주 먼 길을 찾아 떠납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롬10:9)

하지만 믿음이란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성경은 지적 동의만을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행함과 함께 작동합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게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약2:22)

예수님이 말씀하신 다리가 있습니다.
벌써 긴 세월동안 위태한듯이 서있습니다.
그 길은 문이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도 적습니다. (마7:14)
하지만 그 길은 견고하며 더군다나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이 보증하셨기 때문이며, 예수님이 그 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증인

제자들이 떠나버린 십자가 아래서

어린 요한은 예수님의 죽으시는 과정을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들까지도.
“내가 목마르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사람들의 다리를
로마 군인들이 꺽는 과정도,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가 찔려 물과 피가 쏟아져 나오는 것도.
요한은 그 모든 과정을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의문하지 않았을까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상황은 무엇이며
이 상황의 끝에 어떤 반전이 있지는 않을까?’
하지만 기다린 그에게 어떤 기적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절망했고 기운 없는 발걸음을 옮겼을 것입니다.
당시 그는 지금의 때를 알지 못 했습니다.
그에겐 아직 부활의 소망 같은 건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그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지켜봐야만 했던 절망의 시간을
모두 목격하고 살아낸 후,
그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언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사랑하는 목사님 한 분이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몇 주일 간 극심한 무력감에 힘들어 했기 때문입니다.
십여 년을 계속해서 달려오신 분인 것을 알기에
나는 염려하면서도 한편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건넸습니다.
그 감정과 상태들을 기억하고 경험하는 것은
앞으로의 긴 목회생활에서 누군가를 이해하는 밑거름이 될 거라 믿습니다.
모세가 경험했던 중반기 40년의 세월은 헛된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모세로 살게 만드신 시간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모든 시간도
알 수 없는 시간들로 가득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갔을 때 무어라 말씀하실지 궁금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 본문을 묵상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도 오늘을 살며, 오늘을 지켜보겠습니다.
오늘을 기억하며 당신이 하신 모든 일의 증인이 되겠습니다.
기뻐할 수 없을 때에도 주님이 여전히 나와 함께 하시기에 기뻐합니다.”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두려워했다.
다른 표적들은 그렇다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죽은 이를
살리기까지 한 것이다.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믿게 될 것이고,
그들이 예상하는 다음 행동은
사람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있는 정권을
뒤엎을 일밖에 남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그것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로마군대를 부르는
위험한 행동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가야바는 이 한 사람, 예수를 죽임으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이제 누구든지
예수를 붙잡으려고 예수께서 계신 곳을 알면
자기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요11:57)
이제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다.
예수님은 광야 가까이에 있는 에브라임이라는 마을로 피하셨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자.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분이 유월절에 오시지 않겠소?” (요11:56)
이 팽팽한 긴장의 끝에 과연 예수님이 나타나실까?
예수님은 마땅히 그렇게 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분은 대제사장 가야바가
자신도 알지 못한채 말한 예언처럼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 민족과 이후 모든 시대,
전 세계의 그를 믿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유월절 대속의 죽음을 위한 어린양이 되셔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오시면 당신은 사람들에게 붙잡히게 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분은 피하지 않으신다.
선한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기 때문이다.
에브라임에서 안전한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하나님의 때에 자신을 드린다.
그 분은 내게 선한목자이다.
나의 구원을 위해 당신은 피흘림과 죽음을 피하지 않는다.
그 분은 나를 위한 모든 것을 하셨으며,
내게 가장 적합한 때를 알고 계신 분이시다.
나는 오늘 무엇을 두려워 하고 있는가?

믿음의 도약

얼마간 고민한 것 하나는,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사람들과 상황을 통해, 또는 여러 기도를 통해
당신의 뜻을 나누어 주시지만,
실제로 그 일의 성취를 보는 것은 드물다는 것이다.
수많은 방해요소와 장애물들을 보며,
현실의 벽이 높기 때문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만일 그렇다면 주님은 방해요소들보다 약하신 분이신가?
동료들과 그것을 두고 기도했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더 나아가지 않게 하시되,
그게 아니라면 나는 과정뿐 아니라 최종적인 결과도 보고 싶습니다.
그 결과가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면
나는 그것을 보고 ‘우리 주님이 이렇게 아름답게 일하셨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주셨다.
가나안 땅을 밟기도 전에,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이미 주셨음을 말씀하셨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 땅을 정복한 것은 불완전해 보인다.
하나님은 주셨는데, 사람들이 가진 것은 부분적이다.
우리의 현실과 너무 맞닿아 있다.
하지만 갈렙이 속한 유다가 정복한 땅은
다른 모든 땅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복하기 매우 어려운 땅이었다.
갈렙의 나이가 85세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성경은 그 성읍을 크고 견고하며
아낙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14:11-15)
하지만, 이 노인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다. 라고 말하고
그 땅을 차지하게 된다.
성경은 그 땅을 차지한 이유를 힘이 강하거나, 적군이 약해서가 아니라
‘그가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기 때문’이라 말하고 있다. (수14:14)
이렇게 가장 정복하기 힘든 지역을 정복했음에도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파들은 가나안을 부분적으로 정복했다.
그들은 정복해서 없애버리느니 노예로 삼아 수익을 얻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삿1:28)
가나안의 전쟁 방식을 답습하므로
도리어 이스라엘이 가나안이 되고 말았다.
결국 하나님의 뜻이 좌절되었다기보다는
주님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인간의 불신앙때문에 실패하게 되었다.
적어도 가나안과의 전쟁에서
그들이 승리한 이유는 예배와 순종의 방법이었다.
나는 그것을 기도했다.
우릴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 과정 중에 있는 우리가 주님 앞에 잘 준비되어 서길 원합니다.
절망하고 낙심해 있는 우리 앞에
주님이 말씀의 검을 휘두르시자
보이지 않는 말씀의 검은
보이는 어둡고 답답한 현실들을 쪼개어 놓았다.
흔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길은
막힘없이 이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 속에 평탄한 대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드문드문 발 디딜 곳이 놓여있어서 걷기에 불안해 보일 때가 많다.
하지만 그 길은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어서
믿음의 도약(跳躍)이 필요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으로 눈에 보이는 두려움을 뛰어넘을 도약 말이다.

당신의 자녀를 위한 급박한 전개

이제 살아가겠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살아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희철이 어머니가  순간 순간 눈물흘리며 말씀하실 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누가 잘 살라고 말한다고 해서
살아갈 수 있는게 삶이 아닙니다.
그동안 용기내어 잘 살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을까요?

이 말을 스스로 말해주어서 얼마나 감사한지요.

아픈 두 모자가 힘을 내어 잘 살아준다는 말에
뛸듯이 기쁜 이 마음은 주님이 주신 격려겠지요.

무경이는 여전히 몸을 못 움직입니다.
쌍동이 동생 석빈이와 누나 수빈이는
가끔 감기에 걸리긴 하지만 건강합니다.
다른 아이들은 자라는데
여전히 누워있는 무경이를 보면
그저 아프고 미안해서 눈물만 흐른다고 합니다.
그래도, 무경이 어머니도 기도하면서 힘내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경이를 처음 만난 날,
무경이의 손을 잡고 기도하며
어머니에게 하나님을 전했습니다.
신이 있다면 왜 이런 절망이 있겠느냐는
무경이 어머니에게
그날 감사하게도 우리 아버지의 마음이 전해졌습니다.

아프고 절망스런 풍경들을 떠올리며
주님의 마음을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맹인과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시고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시고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 주셨습니다. (마9:35)
목자 없는 양같은 당신의 백성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할 것을 명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마9:36)
불쌍히 여기다로 번역된 이 말은
내장에 통증을 줄만큼 깊은 아픔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당신의 백성을 향한 주님의 이 마음은
제자들에게 아래와 같이 기도할 것을 명했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라.” (마9:37-38)

그러고는 깜짝 놀랄 장면을 만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하라는 내용은
다음 장면에서 곧바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마10:1)

주님의 마음.
다급하다 못해
급박하기까지 한 성경의 전개와 성취속에

당신의 자녀를 향한
주님의 마음이 만져지는 것 같았습니다.

#희귀난치 #희철이 #무경이 #불쌍히여기다 #일꾼을위한기도 #다급한전개 #숨은주님의마음

황무지에 꽃이 피는

청년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나는 굳건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강사의 자격으로 온당한지 모르겠습니다.
온통 흔들리는 삶,
그것이 두렵고 불안할 때가 많습니다.
흔들리는 삶 자체 보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쉬운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심장이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저 쉬워 보이는 선택을 할까 두렵습니다.
마치 주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선택하고 살아갈까 두렵습니다.
하지만 위로가 되는 것은
성경 속에 누구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야곱과 요셉, 모세와 다윗,
엘리야와 세례요한이 그랬습니다.
가장 극심한 환란에 처했던 욥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친구들과 벌인 논쟁의 대부분은
이 환란이 어디서 비롯되었나 하는 것입니다.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23:10)
우리가 가는 길을 우리는 알지 못 합니다.
시간이 지나 돌아보았을 때야 웃을 수 있겠지만
당장은 한 치 앞도 알지 못해 두려워 떠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날마다 옳으시며, 선하신 주님이
나의 가는 길을 아신다는 말은 얼마나 복된 말인가요?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자에게
사람들은 이 장애가 누구의 죄 때문인지를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환난은 죄로 말미암은 것이 분명하다는 사람들의 인식에서
시작된 이 본문의 마지막은 극적으로 역전되고 맙니다.
보지 못하던 자는 보게 되었고
본다고 자부하던 자는 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요 9:39)
전에 맹인이었던 자는
예수님을 향해 선지자로, 이후에는 주님이라 고백하며 절하였습니다.
절하였다고 번역된 이 단어는
주인의 손을 핥는 개처럼 키스한다는 의미와의 합성어로써
성경에서는 주로 주님을 향한 경배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네가 태어나면서부터 죄 속에 파묻혀 있었으면서
어떻게 감히 우리를 가르치려 하느냐?” (요9:34)
바리새인들의 호된 비난과 함께 그는 결국 회당에서 쫓겨났습니다.
이 현실을 피하기 위해 그의 부모는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회피했습니다.
회당에서 쫓겨난다는 말은 공동체에서의 완전한 퇴출과도 같은 말이며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나 생계뿐 아니라 생명까지도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눈이 치유된 것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행진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그는 피하지 않음으로 결국 환란에 맞닥뜨렸습니다.
그로 인해 주님은 그를 다시 만나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요9:3)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예수님이 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제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다르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저 그의 육신의 눈을 뜨게 한 것에 그친 것이 아닙니다.
맹인의 눈을 ‘떴다’고 번역한 단어는 (요9:14)
‘열다’라는 의미로써 흔히 성경에서 ‘하늘이 열린다’라는 표현에서 사용됩니다.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의 규정에 얽매여 안식일의 주인을 보지 못하는 몰이해와 부정
심지어 부모의 회피 속에서도
맹인이었던 자는 예수님이 진정 누구인지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린 것입니다.
문제의 해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 너머의 하나님의 일,
우리의 삶의 모든 정황 속에서

예수님이 진정 누구인지를 보고 깨달을 수 있는 눈을 열어주세요.

황무지에 꽃이 피는 것처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어 주세요.

주님 원하신다면

군대에 입대해서 2주일간 예배를 드리지 못하다가
예배당 앞에서 집사님이 건네준 따뜻한 커피 한 잔에
마음이 녹았습니다.
바닷바람에 오랫동안 서있어서
꽁꽁 얼었던 몸에 온기가 돌았고,
나는 예배 시간 내내
그리웠던 주님을 소리내어 찬양하며 눈물을 흘렀습니다.

산상수훈을 마치신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그 가르침과 권위에 놀랐습니다. (마7:28-29)
그 분의 권위 앞에 한 나병환자와 백부장이 엎드렸습니다.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격리되었던 나병환자에게
예수님은 손 내미셨습니다.
“내가 원한다. 자. 깨끗하게 되어라.” (마8:3)
그러자 곧. 그는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깨끗함을 받았다는 말로 쓰인 단어는
죄를 씻다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구원을 읽으며 나도 같은 은혜를 구합니다.
주님, 내게도 말씀해 주세요.
주님이 원하시면 날마다 나를 깨끗하게 해주세요.

예수님은 나병환자의 치유를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야만 사회로부터의 격리가 풀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에게도 외면받아야 했던 그의 부정이
예수님의 말씀앞에 깨뜨려졌습니다.
구원이 지니는 놀랍고도 포괄적인 이미지들을 생각합니다.

이방인이었던 백부장 역시 예수님이 베푸시는 구원에 참여합니다.
이스라엘에서도 아직까지 이렇게 큰 믿음을 본 적이 없다.” (마8:10)
예수님이 본문에서 칭찬하시는 백부장의 큰 믿음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여, 저는 주를 제 집 안에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마8:8)

예수님을 모실 자격이 없다는 백부장은
주님의 백성이 되는 자격을 얻었습니다.
반면에 기존의 이스라엘의 아들들 중 일부는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아들이 되는 자격
전통과 혈통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내게 말씀하시면
내가 깨끗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늘 가지게 되는 의문이 있습니다.
과연 그 분이 내게 말씀하셨는가?

그 분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없다면
그 분의 의사나 결정, 권위와 상관없이
내가 이미 깨끗함을 받았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깨끗함을 입는다는 말인데,
주님과 상관없는 구원은, 거짓되고 슬픈 이야기입니다.

위대한 사역의 결과를
위대한 사귐의 결과로 치환하거나 담보하는 것은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그때 나는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마722-23)
위대한 사귐의 결과가  
위대한 사역의 결과로 나타날 수는 있지만
위대한 사역의 결과가 위대한 사귐의 결과는 아닙니다.

영화 메멘토에서 주인공은 잘못된 단서 하나 때문에
안타까운 결말을 맞게 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단서는 ‘자격’ 입니다.
전통과 혈통으로, 사역과 결과로
자격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공동체과 가족으로부터도 외면당했던 나병환자와
전에 구원에서 멀리 있었던 이방인 백부장이
주님 앞에 엎드렸던 것처럼
그 분의 놀라운 성품에 기대어야만 합니다.

“주님이 원하신다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신다면
이 땅을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마8:2)

내가 주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은
주님의 은혜에 기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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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하고 기뻐하라

십여 년 전, 선교지에서
심한 상실감이 있을 때
주님은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뻐하고 기뻐하라.
나로 인하여 기뻐하라.”
그때 나는 심한 상실감을 뒤로 한채
기뻐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것은 비인격적인 게 아닙니다.
주님이 내게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하면
나는 그만한 일로 상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나는 주의 이름을 외쳐 부르며 기뻐할 것입니다.
나 자신과 처지를 바라보는 눈을 들어
아버지의 시선에 눈을 맞출 때
더 이상 나의 누추함과 허기짐은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 되었습니다.

몇 년전, 노회 서기 목사님이 연락 오셨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지 않겠냐는 내용이었습니다.
강도사 유효기간이 종료될 즈음이었습니다.
다 정리했고 결정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마음이 흔들리며 고민이 연장되었습니다.
목사님께 뜻을 정해 말씀드리고
주님께 기도드렸습니다.
“당신이 원하실 때
언제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다만 내게 침묵하지 마세요.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그것으로 나는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항해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외쳤다.
“이분이 바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다!”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는 말은
신명기 18장에서 인용한 말로
당시 유대인에게 오실 메시아를 뜻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세례요한에게도 오실 그 선지자인지 물었다.
사람들이 ‘오실 그 선지자’라고 반응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 산으로 피하셨다.
예수님이 타지 않은 제자들의 배가
큰바람과 파도로 인해
갈릴리 바다 가운데 표류하게 되었다.
그때 예수님은 물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요한복음에 예수님이 나라고 표현할 때에는

주로 자신을 선한 목자, 진리, 생명, 참 포도나무등으로 비유하곤 한다.
곧 예수님이 ‘오실 그 선지자’인 메시아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환호를 떠나 산으로 피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신의 왕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오실 그 선지자’가 예수님인 것은 맞지만
그에 대한 기대가 달랐던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기대를 뛰어 넘어
당신이 사람들에게, 당신의 피조물에게 베푸실
최고의 사랑을 준비하고 계셨지만

사람들은 지금 이 시대의 단기적인 해갈을 원했던 것이다.

나는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고,

나의 왕이라 부른다.
그 모든 것들이 옳은 명칭이지만,
내가 의도하며 바라보는 예수님은 과연 누구신가?
그 분께 바라고 있는 나의 요구는 무엇인가?
오병이어를 곁에서 경험했던 제자들은
물위를 걸어온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 떨었다.(요6:19)
내가 생각하는 예수님의 사역의 범위, 능력의 범위, 영역의 범위

예수님은 그 모든 것 너머에서 일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몰이해로 가득한 대중들과 제자들을 위해
나를 위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끊임없이 가르치신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을 모신 배는

표류를 멈추고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도착했다. (요6:21)
‘곧’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즉각적으로, 단번에라는 의미의 부사다.
이유를 알 수 없어 표류하던 배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해준 후
단번에 목적지까지 향한다.
오늘 내가 가지는 갈등과 표류 속에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말씀해주세요.

그리고 당신의 항해에 함께 하겠습니다.

14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요6:1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