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기를 기도

사울왕이 죽고, 다윗은 드디어 도망하던 시절을 마치게 됩니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은 몇 년간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다윗은 점점 강하여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해져 갔습니다. (삼하3:1)
그리고 결국 평화사절단으로 유다땅에 온 아브넬은 다윗과 평화협정을 맺게 됩니다.
사극을 통해 보게 되는 고려, 조선시대 뿐 아니라
현대 정치에서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무서운 정치보복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지금 다윗은 피흘리지 않고 평화적 통일을 이루게 될 놀라운 시점을 맞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의 가장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요압이 개인의 복수로 사절단으로 온 아브넬을 죽여버립니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 순간입니다.
아둘람에서 부터 다윗과 함께 해왔기에,
자신의 왕이 무엇을 바라고, 꿈꾸는지 가장 가까이서 봐왔지만
개인적 보복으로 나라를 궁지에 빠뜨립니다.

다윗이 무엇을 했느냐를 주목했습니다.
다윗은 적군의 장수인 아브넬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울었습니다.
그는 아브넬을 장사하고 소리를 높여 울었습니다.
그의 울음을 보고 온 백성은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의 한 바가 아닌 줄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삼하3:37)
다윗의 울음은 결국 평화적 통일왕국으로 이어졌습니다.
민중신학자 중에는 다윗이 너무나 정치적이어서
그의 울음을 통해 정치적 화합을 가져왔다고 평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정치적 화합을 가져왔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의 울음이 정치적 의도를 가졌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의 울음은 바로 아버지의 감동을 따라 순종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울기를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수많은 오해를 가지고
사람들을 정죄하기에 바쁜 우리 자신을 위해 우리는 울기로 했습니다.
한 영혼을 위해, 잃어버린 자를 위해, 믿는 우리를 위해 울기를 기도했습니다.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이들에게 부드러운 마음으로 이 눈물이 젖어들기를
그 눈물이 아픈 이들에게 위로가 되어주기를,

당신의 항해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외쳤다.
“이분이 바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다!”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는 말은
신명기 18장에서 인용한 말로
당시 유대인에게 오실 메시아를 뜻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세례요한에게도 오실 그 선지자인지 물었다.
사람들이 ‘오실 그 선지자’라고 반응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 산으로 피하셨다.
예수님이 타지 않은 제자들의 배가
큰바람과 파도로 인해
갈릴리 바다 가운데 표류하게 되었다.
그때 예수님은 물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요한복음에 예수님이 나라고 표현할 때에는

주로 자신을 선한 목자, 진리, 생명, 참 포도나무등으로 비유하곤 한다.
곧 예수님이 ‘오실 그 선지자’인 메시아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환호를 떠나 산으로 피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신의 왕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오실 그 선지자’가 예수님인 것은 맞지만
그에 대한 기대가 달랐던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기대를 뛰어 넘어
당신이 사람들에게, 당신의 피조물에게 베푸실
최고의 사랑을 준비하고 계셨지만

사람들은 지금 이 시대의 단기적인 해갈을 원했던 것이다.

 

나는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고,

나의 왕이라 부른다.
그 모든 것들이 옳은 명칭이지만,
내가 의도하며 바라보는 예수님은 과연 누구신가?
그 분께 바라고 있는 나의 요구는 무엇인가?
오병이어를 곁에서 경험했던 제자들은
물위를 걸어온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 떨었다.(요6:19)
내가 생각하는 예수님의 사역의 범위, 능력의 범위, 영역의 범위

예수님은 그 모든 것 너머에서 일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몰이해로 가득한 대중들과 제자들을 위해
나를 위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끊임없이 가르치신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을 모신 배는

표류를 멈추고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도착했다. (요6:21)
‘곧’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즉각적으로, 단번에라는 의미의 부사다.
이유를 알 수 없어 표류하던 배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해준 후
단번에 목적지까지 향한다.
오늘 내가 가지는 갈등과 표류 속에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말씀해주세요.
그리고 당신의 항해에 함께 하겠습니다.

오병이어

안드레는 한 소년의 식사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안드레의 말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그게 얼마나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6:9)

빌립이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가 가진 수단과 방법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단으로는 역부족인  현실의 벽들..
하지만 우리가 가진 작은 도시락 하나를 주님께 가져갔을 때
예수님은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하시는지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사복음서에 공통으로 기록되어 있는 사건이지만
공관복음(공통된 관점으로 쓰여진 마태,마가,누가복음)과
요한 복음이 차이를 가지는 부분이 몇 군데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이 사건이 유월절 즈음에 생겨난 일이라고 요한이 말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요한은 복음서에 유월절 사건에 있었던 특정한 사건을 

의도적으로 연결 지으며 예수님을 설명합니다.
성전 청결 사건(요2:13)이 유월절 즈음 있었고
우리가 잘 아는 십자가 사건이 유월절에 있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이 유월절 가까이에 있었다고 기록하는 이유는(요6:4)
예수님이 바로 하늘에서 내리는 생명의 떡임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이 말은 오병이어 사건이 그저 굶주린 무리를
먹이고 기르는 예수님의 심정과 긍휼을 다루는데

 

그치는 단편적이거나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인간의 역사 속에 하나님은 얼마나 당신의 뜻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분이신가?
사건 하나하나마다 

당신의 걸음 하나하나가 그것을 증명해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걸음걸음,
수많은 선택과 고민 속에 주님은 함께 하시지만 부재한 듯한 시간들이 있습니다.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 그 말을 듣지 못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만 그 분의 침묵 속에 나 혼자 걸어가야 하는 시간이 아프지 않은가요?
하지만 그 모든 시간 속에 주님은 당신의 일을 이루십니다.
안드레와 빌립을 탓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주님은 부재한 것 같지만
주님은 웃으십니다.
기다리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당신의 뜻을 이루려 애쓰는 무리들과

지금도 모든 호흡에 함께 하십니다.

오병이어

안드레는 한 소년의 식사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안드레의 말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그게 얼마나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6:9)

빌립이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가 가진 수단과 방법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단으로는 역부족인  현실의 벽들..
하지만 우리가 가진 작은 도시락 하나를 주님께 가져갔을 때
예수님은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하시는지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사복음서에 공통으로 기록되어 있는 사건이지만
공관복음(공통된 관점으로 쓰여진 마태,마가,누가복음)과
요한 복음이 차이를 가지는 부분이 몇 군데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이 사건이 유월절 즈음에 생겨난 일이라고 요한이 말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요한은 복음서에 유월절 사건에 있었던 특정한 사건을 

의도적으로 연결 지으며 예수님을 설명합니다.
성전 청결 사건(요2:13)이 유월절 즈음 있었고
우리가 잘 아는 십자가 사건이 유월절에 있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이 유월절 가까이에 있었다고 기록하는 이유는(요6:4)
예수님이 바로 하늘에서 내리는 생명의 떡임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이 말은 오병이어 사건이 그저 굶주린 무리를
먹이고 기르는 예수님의 심정과 긍휼을 다루는데

그치는 단편적이거나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인간의 역사 속에 하나님은 얼마나 당신의 뜻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분이신가?
사건 하나하나마다 

 

당신의 걸음 하나하나가 그것을 증명해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걸음걸음,
수많은 선택과 고민 속에 주님은 함께 하시지만 부재한 듯한 시간들이 있습니다.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 그 말을 듣지 못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만 그 분의 침묵 속에 나 혼자 걸어가야 하는 시간이 아프지 않은가요?
하지만 그 모든 시간 속에 주님은 당신의 일을 이루십니다.
안드레와 빌립을 탓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주님은 부재한 것 같지만
주님은 웃으십니다.
기다리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당신의 뜻을 이루려 애쓰는 무리들과

지금도 모든 호흡에 함께 하십니다.

가난하고 통회하는 마음

사람들이 나를 보며 많은 경우에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가까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젠가 아내도 내게 같은 말을 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면 오빠는 잘 흔들리지 않는 것 같아.”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사실 없습니다.
많은 경우에 내 마음은 수없이 흔들립니다.
밤에 깨어 나의 비천함과 불확실한 미래 앞에 몸을 떨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내가 품고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사66:1-2)
내가 하나님을 무엇으로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내가 알라딘의 램프의 거인이 되어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를 마련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이 주님의 보좌이며,
이 온 땅이 당신의 발판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온유와 소명이에게 장난감을 사주면서
그들을 기쁘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대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화하며
당신의 말을 듣고 떠는 자를 돌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이 정상에서 뛰어놀 때 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나의 비천함과 주님 앞에 두려워 떨 때
나의 가난함과 심령에 통회한 마음을
두 손에 올려 주님께 나아갑니다.
다른 무엇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지만
다만 가난한 마음 하나 주님께 가져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리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따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4:15-16)
아멘. 주님 이 마음 그대로 주님께 드립니다.

어떤 나무인가?

“왕이 오신다.
왕이 오시는 길을 준비하고
그 길을 곧게 하라.”

이사야의 말씀부터 이어오던
말씀의 성취가 이제 눈 앞에 이르렀다..
원어적으로는 예수님의 오심을 통해
‘천국이 이미 임했다. ‘
세례 요한의 외침 앞에 사람들은
왕의 오심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 세례의 의미는 애굽인들이 홍해에 수장된 것처럼
그리고 수장되어야 할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살아가는 것처럼
죄에 대하여 죽고 주님과 연합하여 새로운 생명을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요한은 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이라고
독설을 퍼붓는다.
이들이 세례를 받으러 온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형식적인 세례 만으로
왕이 오심을 준비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철저하게 정결예법을 지키던 그들에게
과연 무슨 죄목을 발견할 수 있을까?
그들은 아브라함이 자신들의 조상이라는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들로 인해
선별된 자들이라 여긴 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한다.
그들의 죄는 마음에 숨겨져 있었으며
그들이 자랑하는 신분은
널려 있는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할 수 있다고 꾸짖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하지만,
약속을 믿어야 할 것인가?
약속의 주최이신 하나님을 믿어야 할 것인가?
율법 앞에 드러나는 죄는 없을지 모르지만
율법을 만드신 하나님 앞에 드러나지 않을 죄는 없다.
드러나는 죄가 하나도 없지만
주님의 법도 앞에 서지 않으면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 있는 것처럼
임박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오심은 놀라운 은혜의 초대이지만
그 분이 오실 길을 예비하지 않는 자에게는 무서운 심판이 있다.
열매 맺지 않는 나무는 모조리 잘려서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다.

나는 좋은 나무가 되고 싶지만,
내가 어떤 나무인지를 말해 주는 것은
나무가 맺는 열매이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다.”

사람은 그 마음에 품은 것을 열매 맺게 마련이다.
나는 어떤 나무인가?
내 마음은 무엇으로 조성되어 있는가?
내 마음의 방향은 어디를 향해 있는가?

베네스다 연못에서

‘베데스다’는 예루살렘의 양문 곁에 있는 연못이다.
치료의 효력이 있는 간헐천으로 알려진 곳으로,
‘자비의 집’이라는 뜻의 아람어 베티스다의 음역으로 베데스다 라고 말하고 있다.
자비의 집이라는 뜻의 이 연못은 실제로는
무한경쟁사회와 양육강식의 사회의 축소판일 뿐이다.
병에 걸린 사람들- 눈먼 사람들, 다리 저는 사람들, 중풍환자들-은
이 곳에서 혹시 있을 기적을 선점하기위해 기다리고 있다.
같은 고통을 공유하는 동료인것 처럼 대기하지만

만일 물이 움직이게 된다면 모두가 경쟁자가 되고 말 무자비한 곳이다.

38년 된 병자는 자신이 이곳을 누구보다 먼저 차지할 가능성이 없음을 알고 있지만
대안은 생각할 수 없어서 그저 이곳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병자들이 모두 소원하고 있는 이 곳은 전설일 뿐이다.
4절의 내용- 주의 천사가 물을 휘저어 놓을 때,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다 나았다는-이
괄호로 표시된 이유는 요한복음의 많은 사본(가장 오래된 사본 포함)에는 이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병자들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대상에
자신의 인생을 드려 끊임없이 구원을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 뿐 아니라, 이 시대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대상에게 구원을 요구하고 있다.
얼마전 사람들의 하루를 다큐멘터리로 촬영해서 보여주는 프로에서
건물주들의 풍족하고 나른한 하루를 방영했다.
넉넉한 건물세로 인생을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신이 부럽지 않을 사람’이라는 나래이터로 맺음했다.
이 시대의 구원은 이런 형태인가?
38년된 병자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의 질문에 그는 그가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를 말한다.
그는 알지 못했다. 구원자가 바로 그라는 사실을.
똑같은 기도를 우리는 매일 예수님께 드린다.
“예수님,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요5:7)
친구들과 가족들, 직장동료들과 사회시스템과
은행의 한도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38년된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거라” (요5:8)
하지만 그 모든 한도에 예수님은 구속되지 않으신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우리의 소원을 이루시는 ATM인출기는 아니다.
오늘 38년된 병자는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 받았지만
여전히 베데스다에는 셀 수 없을 만큼의 고통하는 병자들이 있다.
이 땅에서의 고통은 여전해 보이지만
우리는 38년된 병자의 치유를 보며 누가 구원자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일어나라’ 는 말은 보통 신약성경에서 부활을 상징한다.
그 분이 죽으시고 사망을 깨뜨린 사건, 때문에

나는 오늘 살아가고 있다.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요5:1-9)

두려움 속에서

 

예수님의 유년생활은 결코 평화롭지 않았습니다.
태어나자마자 그는 난민으로
생명의 위협을 피해가며 이곳 저곳을 떠다녀야 했습니다.
지금처럼 이동이 수월해진 시대에도
거처를 옮긴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요셉은 당대 최고 권력자의 위협을 피해
막 태어난 아이와 출산으로 약해질만큼 약해진 아내를
데리고 한밤중에 급히 이집트로 떠나야 했습니다.

하나님 아들의 생애조차 이렇게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가족이 이집트로 피한 후에
포악한 헤롯왕은 베들레헴과 그 부근에 살고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살육했습니다.
하나님이 부재하시는 시간 같아 보입니다.
이 사건은 마치 애굽에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과 같아 보입니다.
마태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모세의 모습을 연상케 하고 있습니다.
그 분은 빛 하나 없는 어두운 시대, 이 시대를 구원하실 분이십니다.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주님은 스스로 당신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그 피 아래 있는 당신의 백성을 속량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집트로 떠나시고,
헤롯의 잔인한 살륙과
다시 나사렛이라는 동네로 들어갈 때마다
성경은 구약의 예언의 말씀을
이루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쟁에서의 극적인 승리뿐 아니라
당사자들 조차 두려워 떠는 순간에도
주님의 말씀이 성취되어 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아켈라오가 유대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두려워했습니다.
우리 역시 수많은 뉴스와 삶의 정황들을 듣고 두려워 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현실이 이상적이지 않다는 말과 같습니다.
현실은 지극히 현실적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주인이 이 땅에 도래한 순간에도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현실적이라는 말이 더이상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그 분이 일하시지 않는 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우리 인생속에
주님은 여전히 일하시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두려워 떠는 순간에도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별이 멈추는 곳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왕으로 나신 분을 경배하기 위해
별을 따라 이곳까지 왔습니다.

이 일로 헤롯 왕은 심기가 불편했습니다.
헤롯 왕은 에돔출신으로 왕가의 딸인 아내를 맞았지만
숙부와 아내, 그리고 아내의 가족들을 죽여버렸고,
이후에 베들레헴의 어린아이들을 살육해버릴만큼
권력욕과 두려움도 상당했던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헤롯왕을 잘 알고 있던 온 예루살렘 또한 온통 떠들썩했습니다.

헤롯은 즉시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그들은 율법에 정통한 자였기에
질문에 대해 빠르고 명쾌하게 대답했습니다.
미가서의 말씀을 인용하며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통치하는 자가 나와서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것을 말하였습니다.

헤롯은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자신도 아기에게 경배할 것이니
아기를 찾으면 알려달라고 말했습니다.

박사들은 예수님이 태어난 곳을 향해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께로 인도하던 별은
아기가 있는 곳에 멈춰 섰습니다.
박사들은 그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하고 예물을 드렸습니다.

본문안에는 많은 등장인물이 있습니다.
이들중에 왕이 나실 곳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말씀에 능통해서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실지 명쾌하게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께 경배하러 간 이는 동방에서 온 박사들 뿐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고작 10여 Km 떨어져 있는 작은 도시입니다.
한 낮이면 갈 수 있는 거리지만
별을 따라 아기 예수를 향했던 이는 없습니다.
성경은 박사들이 그 별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또 기뻐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그 별은
내 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한 낮 거리도 되지 않는
내 마음에 주님이 오셨습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그 별은 이제 내 마음을 가리키고 있다고.
그러면 그들은 매일같이 크게 기뻐하고 또 기뻐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다 알고 있지만
주님을 찾지 않을 수 있고
그 거리를 걷지 않을 수 있고
그 분으로 기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내 마음에 계십니다.
오늘 내가 주님께 드릴 예물은
그 분으로 인한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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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다. 그런데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2 말하였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
3 헤롯 왕은 이 말을 듣고 당황하였고, 온 예루살렘 사람들도 그와 함께 당황하였다.
4 왕은 백성의 대제사장들과 율법 교사들을 다 모아 놓고서,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태어나실지를 그들에게 물어 보았다.
5 그들이 왕에게 말하였다. “유대 베들레헴입니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하여 놓았습니다.
6 ‘너 유대 땅에 있는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가운데서 아주 작지가 않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올 것이니, 그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이다.'”
7 그 때에 헤롯은 그 박사들을 가만히 불러서, 별이 나타난 때를 캐어묻고,
8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를 샅샅이 찾아보시오.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할 생각이오.”
9 그들은 왕의 말을 듣고 떠났다. 그런데 동방에서 본 그 별이 그들 앞에 나타나서 그들을 인도해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에 이르러서, 그 위에 멈추었다.
10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무척이나 크게 기뻐하였다.
11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서, 아기가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서 그에게 경배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보물 상자를 열어서,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12 그리고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아, 다른 길로 자기 나라에 돌아갔다.
(마2:1-12, 새번역)

첫 장은 족보

마태복음의 첫 장은 족보로 시작됩니다.
무언가 이야기가 시작되기 이전에
마태는 보다 의미심장한 선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혈통을 중요하게 생각했을 당시 유대인들에게
마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를 통치했던 늙은 헤롯은
왕의 혈통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온전한 유대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왕이 누구인가?

아브라함과 다윗에게로 이어지고
다시 열왕들로 이어지고 있는
예수님의 족보는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몇 천년간 그들이 기다려온
메시아가 바로 그라는 사실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족보속에는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과 같은 믿음의 조상과
다윗, 히스기야, 요시야로 대표되는 선왕의 이름 뿐 아니라
아하스, 므낫세와 같은 악한 왕들의 이름,
그리고 무엇보다 네 명의 이방인 여자들의 이름들이 등장합니다.
다말과 라합, 룻과 밧세바.

영화 ‘사도’에서 영조는 
자신의 비천한 신분으로 인해
위태해질 수 있는 왕권에 대한 위협을 끊임없이 염려합니다.
그로 인해 결국 자신의 아들까지 죽음으로 내몰게 됩니다.
같은 맥락에서 위에 열거했던 이름들은
왕의 족보에 들어가면
치명적으로 수치를 당할 수 있는
사람들의 이름들과 사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말은 시아버지인 유다로 부터 창녀취급을 받았으며,
라합은 여리고성의 배신자, ..
특히 밧세바는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였습니다.

이 이름을 배경으로 한 비정상적인 이야기들은
예수님이 유대인 뿐 아니라 세상의 구주이시며,
죄인들을 위한 메시아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이 첫 장을 통해
더디 이루어 진다고 믿는 하나님의 약속,
성취되지 않을것이라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지금 우리 삶 가운데서도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