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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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우리 하나님은 갚으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수고와 섬김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내가 주님의 갚으심을 생각하며 힘을 내야 하는 것일까?
혹시 내가 주님의 댓가를 바라보고 일하는 것은 아닌가?’
분명, 주님은 갚으시는 분이시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몫입니다.
나는 댓가가 아니라, 지금 내 안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소원을 따라 살아야 하는데..
이미 내게 베푸신 주님의 은혜 앞에
나의 수고는 몇 백만분의 일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생명을 전하기 위해
내 지갑을 털어서라도
시간을 모조리 내주어서라도
그와 함께 하고, 한 생명을 바라보시는
그 주님과 함께 호흡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감격스런 일인가요.
언젠가 주님은 내 사진에 대해 특별함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정작 나는 내 사진을 특별하다고 여기지 않지만
주님은 내가 특별하고, 내가 바라본 풍경을 촬영한 사진이 특별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만나본 풍경을 사람들에게 전할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병원에서 환자들을 섬기고 돌보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짧게 만났지만 한 병실에서의 풍경이 인상깊었습니다.
어떤 봉사자나 치매노인들에게 밥을 떠먹이기도 하고,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며 돌보지만,
특히 이 병실에서 할머니를 특별한 눈으로 바라보고,
손 잡아주며 이야기나누던 풍경이 참 좋았습니다.
창가에서 내리는 빛줄기 때문이었을까요?
물질세계에 존재하지만, 영원에 까지 이어질것 같은 빛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봉사시간을 마치고, 촬영도 마치고 병실을 나오는데
치매 환자였던 할머니가 과일 몇 개를 봉사자에게 전했습니다.
할머니가 느끼시기에도 그 빛이 참 따스했나봅니다..

우연을 가장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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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신비 안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요.
시간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요.

친한 선배의 결혼식이 있어서
오랜만에 고향을 다녀왔습니다.
긴 시간동안 공동체를
자기 가족처럼 섬기던 선배가 마흔이 넘어 결혼을 했습니다.
전국에 떨어져 지내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아름다운 예식을 축하했습니다.

결혼은 아주 빨리 하던지
아니면 아주 늦게 해야지
이정도의 유난스런 축하를 받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반가운 얼굴을 대하고
각자의 소식을 물으며 모임과 모임이 이어졌습니다.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이어지는 기도모임이 하나 있습니다.
하지만 서로의 일상이 바빠지고
외국에 나가서 살게 되는 가정도 생겨서
전화로만 안부를 물어오다가
선배의 결혼을 계기로 한 자리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비 내리는 날, 카페에 자리가 하나도 없어서
작은 신혼집에서 옹기종기 모였습니다.
오랜만에 말씀을 전했고 함께 기도하기를 청했습니다.
정말 한순간에 눈물흘리며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주님의 위로하심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그 작은 공간에서 흐르는 공기가 바뀐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공통적으로 주신 아버지의 마음은
카페에 자리가 없는 것이 우연이었겠냐는 물음이었습니다.
카페에 자리가 없어서 기도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은
하나님의 분명한 뜻과 계획 가운데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긴 시간동안
내게 시간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가르쳤습니다.
아내와 우연히 들러서 문 두드리게 된 선배의 집,
그곳에서 드리는 기도가 생각납니다.
어느 외국의 공항 출국장에서 함께 드린 기도.
새벽의 패스트푸드 한 켠에서 드린 기도..
수많은 시간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지만
적어도 일상에서 구별하여 드린 기도의 시간만큼은
하나님의 시간속에 있다는 분명한 확신이 있습니다.

구약의 흐름을 살펴보면
다윗의 계보까지 오는데
수많은 오류와 이해할 수 없는 아픔과 우연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서
똑같이 볼 수 있는 일들입니다.
주목할 점은 그런 우연들이 과연 우연에만 그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메시야가 탄생할 것을 계획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우연과 우연만으로 엮어 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만나는 우연속에,
다시 말하면 우연을 가장한 수많은 만남과 사건속에서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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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 기쁨..
이런 의미를 미학에서는 ‘쾌’라는 말로 사용한다.
신앙과 쾌에 대한 문제에서
우리는 쾌를 탈선적 쾌락으로 이해하는 측면이 있으며,
인간이 가진 즐거움 그 자체를 죄 가운데 두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을 금욕적이고
규율적인 틀 안에서 사고하곤 한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인가?
실제로 우리가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어떤 즐거움이 신앙적이고, 비신앙적인가에 대해 불분명하다.
그렇지만 탈선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절대적 만남 가운데 갖는 즐거움 하나가 쾌이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한 조나단에드워즈도
하나님의 계시의 중요한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말한다.

중세를 거치면서 금욕주의와 이원론적인 세계관이 자리잡았다.
하지만 이런 인식이 정말 기독교적인가?
초기 기독교에서 서구적인 옷을 입으며
당시 헬라철학에 영향을 받은 결과이기도 하다.
반면 동로마에 영향을 받은 쪽은
이원론적이거나, 금욕적인 성향 보다는 신비적인 성향이 강하다.
그럼으로 습성화 되어 있는 금욕적 성향 자체가 진리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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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보다 나은 인류의 변화의 증거를 소망한다고 해서,
미래에 대해 소망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거부한다.
기독교는 낭만적이 아니라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어떤 형식의 낙관적 휴머니즘과도 분리되어 있는 극단이다.
그러나 그것은 허무주의와는 다르다.
허무주의는 정확하게 현실적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 자신의 질병에 대해
적합한 치유책을 제시하지도 못하고,
적절하게 대처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치유책을 가지고 있고,

나아가 답변을 위한 견고한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낭만주의는 죽었다.
만일 반정립(즉 A는 A이고, A는 비-A가 아니다. )이 유지된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기회이다.
이미 사람들은 복음의 절반은 받아들이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인간은 죽었다는 사실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 중에서 최대의 반정립은
그 분의 부존재(무신론과 같은)와 대립하여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이다.
그 분은 실존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프란시스 쉐퍼 <존재하시는 하나님 중>

쉽게 풀어달라는 분들이 계셔서
조금이라도 설명하는 글을 썼습니다.
위에서 말하는 낙관적 휴머니즘이라는 것은
쉽게 말해 긍정적인 바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드라마나 영화속에서 보여지는 연인과 가정은
낭만적이거나 목가적이지만
우리 실제 삶에서 만나는 그 풍경은 그렇지도 못합니다.
그런면에서 그런 영화나 드라마는 현실적이지는 못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낭만주의는 한 세기 동안 엄청나게 정치, 경제, 사회에서의 변화를 통해
인간이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자긍심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것처럼 그것은 현실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지극히 현실주의자가 되어 버리면
현실도피적이 되거나, 회의론자가 되어버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허무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현실적이긴 하지만 허무주의와 다른 것은
기독교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래서 말한 반정립 정의는
헤겔 이후 다원주의적인 물결로 인해
수많은 영역에서 절대적 존재는 결여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에 대해 쉐퍼는 절망선을 이야기하고 있지요.
이 부분은 책을 살펴야 할 것 같네요.
쉐퍼가 주장하는 것은 모든 무신론에 대립하여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이해는 그 시대 상황을 조금 염두에 두셔야 할 것 같습니다.

폭풍이 지나는 동안

가까운 지인과 함께 오랜시간 고난을 이야기하며 함께 기도했습니다.

“…기도로만 살고
주님으로만 의지하고
오직 주님 뜻에만 귀기울이고 살고 싶습니다.
그 길의 끝이 순교라도
주님뜻이라면 오직 가고 싶을 뿐입니다.
지금 이순간도 주님뜻이라면 기꺼이 가겠습니다
다만, 주님 뜻이 아닐까 봐, 그것이 두렵습니다 .

감사합니다 기도로 평안을 찾겠습니다.”

얼마나 복된 고백인가요?
하지만 여전히 폭풍 가운데 있기에
쉽지 않은 항해입니다.

“폭풍이 휩쓸고 가면 악인은 없어지지만
의인은 영원히 굳게 서 있을 것이다.”(잠10:25)

우리 인생에는 너무 많은 폭풍이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우리 영혼을 뒤흔드는 싸움들이 있습니다.
표면적인 싸움이 느껴지지 않아도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의 싸움도 얼마나 치열한지 모릅니다.
내 마음에 격렬하게 번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폭풍이 휩쓸면, 다른 말로 고난앞에 서게 되면
의인이든 악인이든 상관없이
모두가 고통하게 됩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피아구분도 무의미합니다.
이 본문에서 성경은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는 것외에는
고난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결과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인생에 수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언젠가 누군가 내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저와 나이가 같으신데 다양한 경험을 하셨네요.”
그전까지는 미처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참 다양한 경험을 했습니다.
물론 그 경험은 내게 삶의 연륜과 생각의 지경을 넓혀주었습니다.
경험은 내게 어떻게든 유익을 주었지만
만일,  내게 젊음이 허락된다면,
그래서 다시 처음부터 경험하는 기회를 준다면
확고하게 거절할 것입니다.

살았기에 감사하며 살았지만
고난이 쉬운 사람은 누구도 없기 때문입니다.
고난 그 자체의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고난은 분명 사람을 훈련시키는 하나님의  방법 중 하나입니다.
아이러니하지만 고난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우리를 주님께 엎드리게 만듭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5:3)

고난을 수월하게 통과할 수 있는 탁월한 방법이라는게 있을까요?
때론 그저 숨죽인듯 눈물로 침상을 띄워야 할때도 있을 것입니다.
고난을 방법론으로 대하다보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한숨뿐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시간속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인자와 진실이 있습니다.
이말은 곧 아버지의 뜻과 계획이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지인에게서 답장이 왔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고난 속이지만
주님이 주신 길이라면 기쁘게 가겠습니다.”

“폭풍이 휩쓸고 가면 악인은 없어지지만
의인은 영원히 굳게 서 있을 것이다.”(잠10:25)

이 폭풍이 지나가는  동안
주님 바라보기를.
그것이 답입니다.

남해의 봄날

남해의 봄날과 통영.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봄날의 집에 묵으며,
그리고 통영이라는 도시를 거닐며,
이 도시가 가진 예술적 가치와 저력이 느껴졌습니다.
산보하듯 집 앞 거리를 나와도 예사롭지 않은 풍경들,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물안개와 섬들의 공간과 리듬들이
흔한 일상으로 흘러 다니고 있었습니다.
윤이상, 전혁림, 박경리, 김춘수..통영에서 자란
수많은 예술가들은 문학, 음악, 미술, 전통 공예 등
찬란한 문화적 토양을 가진이 곳이기에 가능했다는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남해의 봄날에 묵으며
방문했던 음식점들에는 주인이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고
주인이 그린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미적 수준은 일반적인 것을 선회했습니다.
‘도상은 상상력의 근거’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들이 상상할 수 있는 기초를 이룬다는 말입니다.
통영이라는 도시가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수많은 풍광과 호흡들이
기본적인 미적 안목을 이렇게 높여 놓은 것 같다며 혀를 내둘렀습니다.

전혁림미술관 옆에 남해의 봄날이 있습니다.
남해의 봄날은 서울에서 기자 일과 다양한 콘텐츠 기획을 하던
정은영대표가남편과 함께 서울의 삶을 내려놓고 통영에 만든 작은 출판사입니다.
정대표의 말대로 아무런 인맥이나 기반 없이 시작한 창업은
긴 시간 동안 모진 풍랑과 광야를 만나야만 했습니다.
(저는 눈치없이 광야사진을 선물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는 인생이 광야 같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작은 출판사인 책방과 문화예술 체험 아트하우스인 봄날의 집으로 영역을 확대하며
이제 생존할 만큼의 균형을 잡고 있다고 합니다.

동네 건축가 강용상대표와 남해의 봄날은
통영이 가진 찬란한 문화를 소통하고 알리기 위해
새로운 개념의 게스트하우스인 ‘봄날의 집’을 지었습니다.
http://namhaebomnal.com/arthouse
저는 2층의 테라스와 연결되는 <장인의 다락방1>에 묵었습니다.
나전 장인이 직접 만든 문패와 거울, 전통가구로 꾸민 공간,
마치 시간을 거슬러 신비함 속에 머무는 듯한 기분이 느껴졌습니다.
내가 묵었던 날이 남해의 봄날 1주년이었다고 합니다.
동네 주민들에게 나누었던 떡을 먹으며
이 공간과 남해의 봄날에 대한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빅토리아 D. 알렉산더가 쓴 예술사회학에 보면
반영적 접근과 형성적 접근이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반영적 접근은 사회에 대한 반영을 작품에 나타낸다는 말이고,
형성적 접근은 예술 그 자체가 그 사회에 영향을 끼친다는 말입니다.
남해의 봄날은 통영과 전국의 작은 책방을 이은 지도와 장인지도들을 생산하는등
꾸준히 지역과 사람들, 책방이 가진 한계와 소통의 열쇠를 고민하며
통영이 가진 예술적 가치들을 재생산함을 통해 반영적 접근에 충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작고 소외되지만,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출판들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들의 편에 설 것인가>, <가업을 잇는 청년들>, <젊은 기획자에게 묻다>, <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
http://namhaebomnal.com/project/books

남해의 봄날에서 출판한 책을 조금만 살펴도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는 책들, 그래서 더욱 쉽지 않지만
그들만이 낼 수 있는 책들을 발행해 내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가치 있는 목소리를 내는 것은 남해의 봄날이 추구하는 형성적 접근입니다.

언젠가 서울 방배동의 어느 가정집에서
식사를 나누며 정대표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넓은 길이 아니라, 쉽지 않아서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지만
이 길이 의미 있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기에 걸어갑니다.”

남해의 반짝이는 윤슬과
풍성하게 대접받았던 바다 음식들,
아늑한 숙소 가득했던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자꾸만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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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봄날, #통영, #책방, #봄날의집

가시 면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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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니버는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열정(passion)이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긍휼(compassion)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련 없이는 아무 가치도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께는 하나님 밖에는 사랑할 만한 존재,
궁극적으로 헌신할 만한 대상이 없었다.
아버지의 집이 강도의 굴혈로 된다든지,
아버지의 자녀가 고통 가운데 있다면
때론 분노로 나타날 수 있었고, 그 동기가 될수도 있었다.
그의 사랑은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이었다고 말하는 것 이외에
예수님의 사랑을 기술할 다른 적당한 방법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찬양보다는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감사라기보다는 주는 것과 용서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사악과 불경성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그대로 수용함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회개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니버는 예수님께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을
긍휼(compassion)이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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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해군을 나왔다.
1년동안 바다위에서 배를 타고 다녔다.
군함이 항해를 나갔다가 항구에 정박하면
소금물에 부식되지 않도록 가장 먼저 배를 정비해야 한다.
그래서 해군을 제대하면 망치질과 페인트칠에 도사가 되게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페인트를 제대로 칠하질 못했다.
내가 붓을 잡으면 엉망이 되어버리기에 나는 늘 다른 일을 맡아야 했다.
또, 해군은 까다로운 복장점검 때문에 다들 다림질도 능한데
내 옷은 선임들이 대신 다려줄 정도로 그런 일에 서툴렀다.

제대를 하고, 대학을 복학해서도
내 마음을 떨리게 할만큼 좋아하는 일도, 잘하는 일도 없었다.
내가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과연 있기나 한걸까?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은 청년시절 내게 큰 두려움이었다.
내가 머물던 학교옆 고시원 가까이에 작은 예배당 하나가 있었다.
나는 저녁마다 예배당 낡은 의자에 앉아 질문했다.
“주님, 이런 저도 사용하시나요? 도대체 어디에 사용하실건가요?”

놀라우신 하나님은 예측못할 방법과 만남을 통해 이런 저런 길로 인도해주셨다.
언젠가부터 나는 사진을 찍으며 골목을 쏘다니게 되었다.
한 번은 작은 섬에서 촬영을 할 때 좋은 조건으로 계약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다.
나는 성령님께서 주시는 감동을 따라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냉큼 이렇게 기도했다.
“내 시간도, 물질도 당신의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하시고픈데로 저를 사용해주세요.
저를 사용해주세요.”

오늘 아는 형이 일하는 NGO에서 식사를 나누며
인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의 놀랍도록 귀한 사역을 어떻게 나눌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또 다른 선배에게는 이번 겨울에 아프리카의 선교지를 다녀와줄 수 있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어느새 우리 아버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절망하던 나를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자로 빚고 계셨다.
작은 예배당에서의 기도가 생각났다.
‘주님, 제발 저를 사용해주세요. 주님..’

저녁에, 아내가 특별한 반찬을 준비한다며
메추리알을 삶아 껍질을 까고 있었다.
도와준답시고 옆에 앉아서는 내가 만진 알들을 모조리 못쓰게 만들어 버렸다.
그 후로 십 여년이 흘렀지만 내게는 서툰것 투성이다.
그래서 내 기도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주님, 이런 저도 사용하시나요?
주님, 제발 저를 사용해주세요. 주님..”

주님의 뜻 가운데 기도하는게 우리의 몫이라면
주님은 당신의 뜻 가운데서 신실하게 이루어 가신다.

커피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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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좋아합니다.
아내와 연애할 때 카페 한 번 간적 없었는데
결혼하고는 늘 함께 집에서 커피를 내려 마십니다.
선물받은 커피머신으로 일 년을 마시다가
작은 비알레띠 모카포트로 에스프레소를 내려 삼 년을 마셨습니다.
선교지에 나갈 때면 작은 도구들도 함께 꾸립니다.
밤이 일찍 오는 그 땅에 커피 한 잔은 선교사님에게 위로가 됩니다.
그러다가 올해 초부터 워터드립으로 내린 더치커피(dutch coffee)를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한 방울, 한 방울 진지하게 떨어지는 물방울을 바라봅니다.
똑같은 물방울인데 같은 모양은 하나도 없습니다.
때론 호흡처럼, 때론 한숨 같아 보입니다.

언젠가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시 56:8)
지금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다가 자신을 숨겨준 제사장들까지도
모조리 죽임을 당하는 어두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결국 택한 망명의 땅 가드에서조차 원수들에 둘러싸여 울고 있습니다.
“하나님,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종일 삼키려 하나이다.” (시 56: 1-2)

언젠가 나는 하나님께 깊이를 구했습니다.
내가 가진 깊이로는 아무것도 담을 것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내게 다윗의 눈물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아픔, 하나님의 아픔을 지적인 동의로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눈물을 알지 못하면 알 수 없는 깊이.
다윗은 눈물로 만들어 졌습니다.
오늘 흘리는 눈물들 안에 아버지의 마음이 있습니다.

느리지만, 충분한 시간동안 만들어 내는 더치커피를 보고
사람들은 ‘커피의 눈물’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더디게 떨어지는 커피 방울을 보며
신실하게 담으시는 주님의 눈물병을 생각합니다..

매일 조금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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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은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합니다. (시119:67)
또한 누구나 경험하는 고난에는 수많은 목적이 있습니다. (롬 5:3-4)
우리는 그것을 다 알지 못하지만
아버지는 그 경험과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 당신의 하실 일에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이 아픔들은 여러 가지 의미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 설명하지 못할 은혜의 범주 아래 있습니다.

은혜가 인간을 향한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이라면
진정한 사랑은 또한 누군가를 강요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부터 아버지의 마음을 구해야만 합니다.

어떤 디자이너가 이런 멋진 말을 했습니다.
“어려운 일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은
매일 조금씩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동안의 시간이 되었건간에
주님을 향한 관계는 오늘부터 다시 시작되어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