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밤이어도

매 번 수능을 마치고 나면
뉴스를 보기가 두렵습니다.
수능의 결과에 각자 희비가 나눠지겠지만
그것으로 인해 잘못된 선택을 하는 친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또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이런 일을 하게 될 거라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내가 가진 꿈은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해왔지만
수능시험 때 답안지를 밀려 쓰거나,
신체검사에서 탈락하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이 되기 위해 몇 개의 좋은 기회를 포기했는데
내가 마주한 결과는 참혹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그런 것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아프지 않다라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수능을 치르고 아픈 마음 때문에
얼마 동안 집을 나와 여행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실패할 적마다 마음은 처절하게 아픕니다.
아프지만, 이제 나이 마흔을 바라보고 조금 알게 됩니다.
이런 것쯤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생의 끝을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막막함입니다.
하지만 그 막막함은 시간이 흐르면 또 다른 흐름을 만나게 됩니다.
막막하다고 끝장내 버리는 것이 가장 큰 잘못이고 완전한 실패입니다.

얼마 전 4년여 동안 준비한 공부가 있었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나는 공부한 결과물을 손에 쥐지 못 했습니다.
내 마음에 또 막막함이 밀려왔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인생의 끝이 아닙니다.

내가 선생님이 되지 못 했던 이유는
신체검사에서 색약 판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눈에 핸디캡이 있어서 선생님이 되지 못했지만
핸디캡을 가진 눈으로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밤이어도, 내일의 아침은 성실하게 다시 찾아옵니다.

하늘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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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에 대한 속성을 묵상하던 중
한 지인이 내게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사랑이라는 말 대신,예수님이라는 말을 넣어도 뜻이 통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나는 자녀들에게 부모가 끼치는 영향이 100%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직접적인 관계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이 부모의 손이 미치지 않은, 방치된 순간이라고 하더라도
그 영향은 아이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줍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부모와의 관계를 근거로 하나님을 인식하게 됩니다.
나는 우리 자녀들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려 애쓰지만,
그래서 나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잡아주려 의도하지만,
인간 부모는 결코 온전하지 못함을 매 번 경험하고 고백하게 됩니다.
하지만 내 인생에 정말 중요한 기준로써,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이며,
그 하나님은 육신의 부모와 같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온유에게도, 소명에게도 이 사실을 전하려 합니다.
‘아빠의 연약함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하나님은 나와 같지 않다.’ 라는 사실입니다.
육신의 아빠를 너머 하늘 아빠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내 몫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충분한 것 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때로는 우리에게 부족하거나 불공평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아들을 내어 주심으로 그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롬5:8)
하나님이 확증하셨다는 말은 부족한 게 아니라 충분하고 넘친다는 말입니다.
이미 당신은 ‘모든 것’을 내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은
그 사랑을 작게 여기는 우리의 속물적인 인식 때문입니다.
우리 손에 금가락지를 쥐어주면 주님은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걸까요?
예수님을 내어 주신 것이 금가락지만 못한 것일까요?
“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 대적들을 쫓아내고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할것이지만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 (출33:2-3)
우리 인생의 목적이 가나안의 입성이라면
하나님의 이런 제안도 제법 괜찮을 것 같지 않은가요.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 산에서부터 그들의 장신구를 떼어 내니라” (출33:6)
그제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않았으며, 장신구를 떼어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출33:15)
그들의 목적지였던 가나안 땅도,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습니다.
진정한 복은 가나인의 입성이나 장신구가 아니라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들을 다시 한 번 묵상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에게 결코 작지도, 부족하지도 않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비추시는 주님의 사랑은 차고 넘칩니다.

아펜젤러 순직기념관

고향은 대구지만,

서해안 여행길을 좋아합니다.
밀물과 썰물이 내게는 언제나 신비롭습니다.
후배 대훈에게서 몇 년 전부터 얘기를 들어왔지만
1년여 만에, 그것도 짧은 일정으로 서천을 다녀왔습니다.
서천, 마량리 앞 바다는 최초의 성경 전래지로 알려져 있으며,
아펜젤러 선교사님이 돌아가신 곳이기도 합니다.
마량리 앞 바다의 어청도 어귀에서
선교사님이 타고 계시던 구마가와마루선은
구약성서를 번역하기 위해 목포로 가던 중
선박 충돌사고로 배가 파선되었습니다.
당시 같은 배를 타고 있던 보울비(J.F.Bowlby)의
진술을 빌리면, 생존자인 보울비보다 아펜젤러가 탈출하기 좋은 조건이었지만
다른 조선인들을 구하려다 자신의 몸은 미처 돌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런 사연을 가진 어청도,
그곳을 바라보는 언덕에
파선한 배의 모양을 본떠 만든 <아펜젤러 순직기념관>이 지어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동 제일교회와 배재학당의 설립자로,
또 성경을 번역하신 선교사님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정작 고국에서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분입니다.
대훈의 형인 박대서 목사님이 미국에서 공부하며
모은 각종 신앙 유품 약 500여 점을 기증 받아 이 곳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관심에 없었던 한국 선교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으로
선교의 물꼬를 열어 준 가우처(John F. Goucher) 박사의 유물 외에도
맥클레이 선교사, 스크랜턴 선교사들의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박 목사님이 유품들을 모은 이야기와 기증한 사연들을 대훈에게서 들으며
나는 사진을 찍었습니다.
30초 남짓의 셔터, 긴 시간이 흘러 한 장의 사진이 담겼습니다.
한 장의 사진 속에 긴 시간을 담았습니다.
기도와 기도를 담아, 감사함을 담아,
복음 앞에 빚진 마음으로.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
<1885년 4월 5일.  아펜젤러>

여행하는 투웬티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품을 빌려준 후,
20년동안 작품 가질 사람을 꼭 내가 지정하고 통제해야 할까?”

내가 다음 사람을 지정해 주면 생길 수 있는
가장 첫번째 문제는 작품을 가진 사람과 작품을 받을 사람과의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거리입니다.
내가 처음 작품을 건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 다음부터,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끼리 대면케 하는 것은
생각보다 까다롭고 위험할 수 있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장 서울 안에서도 강북과 강남, 강서와 강동은 한 시간이 훌쩍 넘는 거리입니다.
이 생각을 시작으로 기도했을때,
주님은 뜻밖의 생각으로 확장해 주었습니다.
‘내 것에서 시작되었지만 내 것이라 주장하지 않는 것.’

‘작품을 건내주고 난 후,
일정기간이 지나면 작품을 가진 사람이
가까운 친구, 혹은 위로가 필요한 사람, 문득 생각나는 누군가에게
다시 건내주면 어떨까?
내가 누군가에게 선물한 것처럼
그 사람도 가까운 누군가에게 선물한다면
그렇게 이어진다면,
내가 정말로 꿈꾸며 이름붙였던 ‘투웬티 프로젝트. ‘처럼
20년동안 작품 스스로가 홀로 여행하며
그 나라를 위해 기도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떠오르는 생각들을 상상하며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아. 이 기대감이란,
조금 더 고민해 봐야겠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식사기도

“엄마, 왜 자꾸 잊는 걸까?”
온유가 유치원 점심때마다
기도해야지 생각하는데도
점심때면 어김없이 깜빡 잊는다며 속상해했습니다.
그래서 며칠 동안은 점심에 기도할 수 있는
선교원에 다니고 싶다는 의견도 내놓았습니다.

아내와 얘길 하며
기도를 잊을 때마다 훈육하는 방법도 생각했다가
곧바로 생각을 바꿨습니다.
유치원에서 기도를 하고 돌아오는 날에는
칭찬 스티커를 붙여주면 어떨까 하구요.
매가 무서워서 기도하게 만들고 싶진 않아서입니다.
스스로 흥이 나서 즐겁게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게 하고 싶었습니다.
아내와 이런저런 계획을 짜고 있는데

온유가 환하게 웃으며 유치원에서 돌아왔습니다.
유치원 가방을 벗기도 전에
이야기를 쏟아내기 바쁩니다.

“내가 아침을 먹으며 기도했거든,
‘하나님, 제발 오늘은 유치원에서 점심을 먹을 때
기도하는 걸 잊지 않도록 해주세요.’ 라고 말야.
그런데 점심을 먹는데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은 잊지 않고 기도했어요.
아. 기분 좋아.”

기드온의 두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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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날, 기드온의 양털시험을 생각했습니다.

어떤 결정을 앞두고 우리는 기드온처럼 하나님께 양털이 마르기를,
또는 젖기를 구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쉽게 풀리지 않을 질문을 마음에 담고 한참을 걸었습니다.

이미 염소새끼로 기적을 경험한 그는 미디안 연합과의 전쟁을 앞두고
또 한 번 양털을 가지고 하나님께 확증을 구하는 장면입니다.
자꾸만 하나님께 확증을 구하는 기드온과
그럼에도 아이를 대하듯 성실하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먼저, 기드온의 상태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해
미디안의 7년간의 침략과 약탈로
굴과 웅덩이 속에 지내야 할 정도로 고통했습니다.
집을 두고 도망다녀야 할 정도로
미디안의 무차별적 학살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물론 이스라엘의 범죄를 인지못하는 기드온의 오해로 생긴 질문이지만
기드온과 이스라엘이 인식하는 하나님을 그의 말속에서 알아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속의 한 때에 일하셨던 분이거나,
지금은 바알에게 무릎 꿇은 무능력하신 하나님,
자신들에게는 무관심한 하나님으로 비치고 있습니다.

나도 어린 시절, 그렇게 하나님을 인식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으시는가?
얼마나 무능력하신 분이신가?
그 하나님이 지금 기드온을 찾아오셨습니다.

하지만 엎친데 덮친격으로
미디안 뿐 아니라 아말렉과 동방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이스라엘의 코 앞에 진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큰 용사라 부르고 계십니다.

전혀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하고 계신듯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적응하십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 적응해나갑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차이를 하나님은 전력으로 좁혀가십니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적응은 오래 참으심으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적응은 당신의 낮아지심으로 알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 양털로 확증을 구합니다.
‘하나님, 이것을 제게 보이십시오.’
전쟁을 앞둔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그것을 보이십니다.
그것은 기드온에 대한 하나님의 적응입니다.
기드온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을 다섯 번이나 확증해주셨지만
여전히 기드온의 두려움은 하나님과의 약속과 팽팽한 긴장을 이룹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사용하시기 위해 오래 참으십니다.
하나님의 적응은 비단 기드온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여정을 통해서도,
모세의 여정을 통해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또, 두려움 가운데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부르실 때
기드온에게도, 모세에게도, 여호수아에게도
동일하게 ‘내가 너와 함께하리다.’고 약속하십니다.
사람은 그 약속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 열 두 명중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악평하고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민14:9)
그 분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인지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 분이 얼마나 놀라운 분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적응해 나가십니다.
나는 그렇지 않다. 라고 하는 것은
지나온 나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긴 시간을 통해 나를 만나주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관계가 우리를 걷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위엄으로 모든 적들을 무찌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부르신 우리를 통해 일하십니다.
그 방식은 전혀 실용적이거나, 세련되어 보이지 않습니다.
용사를 끌어다 전쟁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 기름부으시고, 그를 용사로 기르시고, 하나님께서 전쟁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드온의 질문들이 전적으로 믿음이 없는 결과입니까?
제게는 질문 없음이 더욱 믿음없어 보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묻기를 원하십니다.
다윗은 그의 전쟁에서 하나님께 묻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올라가리이까?’
다만, 다윗은 주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함이라면
기드온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에 근거한 것입니다.
‘당신의 뜻을 돌이키시지는 않을까? 과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까? ‘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신실하게 응답하십니다.
그렇다면 처음 내가 가진 질문처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양털이 젖기를 구해야 할까요?
그것이 응답되면 하나님이 살아계신걸까요?
그것이 응답되면 하나님은 무능력하신 분이 아닌걸까요?

기드온의 질문은, 그 두려움은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한 후에도 지속되었습니다.
성경은 기드온에게 ‘여호와의 영이 내린다.’는 정도로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한글성경에 ‘여호와의 영이 임한다’고 표현한 원어적인 의미로는 ‘옷을 입힌다’는 드문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여호와의 영으로 옷을 입힌 그였지만, 여전히 그는 하나님에 대해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믿을만한 무엇을 자꾸만 요구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전쟁을 앞둔 기드온처럼 두려움이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는가?
지금까지 나를 인도해 내신 것은 인정하지만,
이후의 삶을 신실하게 인도해내실 분이신가?
그래서 우리는 쉬운 결정을 내리고 맙니다.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것처럼 살아갑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은
기드온에게 자신의 영으로 옷 입히시는 수준을 넘어섭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 안에 직접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하심으로
예수님은 우리 안에 성령님으로 거하십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전쟁 가운데 서있다면
그 영광 가운데 질문한다면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은 침묵하실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바쁜 시대가 우리의 귀를 막고 있을 뿐이지,
나의 이기적인 마음이, 높아진 마음이 그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하나님은 날마다 내 마음 가운데
당신의 소원을 말씀하십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2:13)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서있다면
기드온을 부르셨을때 약속하셨던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는 임마누엘의 약속을 누릴 수 있습니다.
두려움 많던 그에게 하나님은 ‘큰 용사’라 부르셨습니다.
내가 나를 보는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보는 시각으로 우리는 서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전쟁 가운데 용사로 서게 하십니다.
기드온의 전쟁은 곧 하나님의 전쟁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책임져서 싸워 차지할 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땅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옷입은 기드온을 통해 당신의 구원을 이루셨다면,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은 그보다 더욱 놀라운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내가 노래하는 풍경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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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은 누군가를 따라 한다거나
떼를 쓴다고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비전은 때가 되면 생겨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내가 하나님께 어떤 존재인지 깨달을 때..

콜링은 콜러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래하는 풍경 #23]

꿈에 대한 이 글은 
핸드폰에 적어 놓은
다섯 줄 정도로 짧은 문장이지만,
이 글의 배경은 꽤 긴 이야기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꿈이 없었습니다.
학창시절에 꿈이 없는 사람을 호명하면
부끄러워하면서도
나는 손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꿈이 없었지만 꿈이 있는 것처럼
거짓을 표시하는 게 싫었습니다.
그러면 어김없이 수치스럽고,
모멸스러운 감정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차츰, 현실에 수긍하며
내 꿈은 선생님이라고 자위하며
손드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내 꿈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것이 내 꿈이야.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내게 꿈이라는 말은
보다 포괄적이고 미래적인 느낌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질문했던 것처럼
그리고 결혼을 해서야
사랑이 무엇인지 조금 알게 된 것처럼
비전도 이와 비슷합니다.

비전은 누군가를 따라 한다거나
떼를 쓴다고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저는 여전히 내 꿈이 무엇인지 알지 못 합니다.
하지만 막연하게나마 그림을 그려갑니다.
그리고 그 꿈이 가리키는 곳이
어딘지는 보다 명확합니다.

저의 경우에
비전은 때가 되면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내가 하나님께 어떤 존재인지 깨달을 때..

실패는 정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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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만난 청년은
제게 ‘하나님께 지독하게 실망했다.’고 얘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일을 알게 되면
나도 자신처럼 반응할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을 하셨는지
묻고 또 물었지만
그 분은 침묵으로 일관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은 이렇게도 무책임한 하나님으로부터 등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얼마나 지독하게 무엇을 하셨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원하던 대학을 떨어뜨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이 순간,
내가 수많은 실패를 살았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나의 실패는 하나님을 변증할만한 근거가 되어주었습니다.
두 번의 수능시험.
답안을 내려쓴 이야기, 신체검사에서 떨어진 이야기도
어쩌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작정하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무책임하시거나 무능력하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얼마나 근시안적이며
우리는 하나님께 얼마나 계산적인지 모릅니다.
내가 불안해 하는 많은 두려움은 ‘내일을 알지 못한다’는 데서 오는
불확실 때문에 생겨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내일을 알지 못하고, 내 인생의 계획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하늘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마 우리의 실패까지도
그 분의 주권 가운데 있겠지요.
어쩌면 보통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의도하신 실패라고 한다면
우리는 더욱 그 분의 계획 가운데 서있음을
기뻐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내일이면 수능입니다.
수고한 모든 이들이 각각 흡족한 결과를 얻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시험을 아주 망하는 경우라도
그것이 인생의 유일한 통로는 아닙니다.
그것은 인생의 실패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실패는 정류장일 뿐입니다.
만약 정말 그 인생이 실패하게 된다면
시험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실패한 마음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길을 알지 못하지만
그 분은 길을 아실 뿐 아니라, 길을 만드십니다.
길은 주님께 속한 것일 뿐 아니라
그 분이 바로 길입니다.

은혜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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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우리 하나님은 갚으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수고와 섬김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내가 주님의 갚으심을 생각하며 힘을 내야 하는 것일까?
혹시 내가 주님의 댓가를 바라보고 일하는 것은 아닌가?’
분명, 주님은 갚으시는 분이시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몫입니다.
나는 댓가가 아니라, 지금 내 안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소원을 따라 살아야 하는데..
이미 내게 베푸신 주님의 은혜 앞에
나의 수고는 몇 백만분의 일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생명을 전하기 위해
내 지갑을 털어서라도
시간을 모조리 내주어서라도
그와 함께 하고, 한 생명을 바라보시는
그 주님과 함께 호흡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감격스런 일인가요.
언젠가 주님은 내 사진에 대해 특별함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정작 나는 내 사진을 특별하다고 여기지 않지만
주님은 내가 특별하고, 내가 바라본 풍경을 촬영한 사진이 특별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만나본 풍경을 사람들에게 전할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병원에서 환자들을 섬기고 돌보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짧게 만났지만 한 병실에서의 풍경이 인상깊었습니다.
어떤 봉사자나 치매노인들에게 밥을 떠먹이기도 하고,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며 돌보지만,
특히 이 병실에서 할머니를 특별한 눈으로 바라보고,
손 잡아주며 이야기나누던 풍경이 참 좋았습니다.
창가에서 내리는 빛줄기 때문이었을까요?
물질세계에 존재하지만, 영원에 까지 이어질것 같은 빛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봉사시간을 마치고, 촬영도 마치고 병실을 나오는데
치매 환자였던 할머니가 과일 몇 개를 봉사자에게 전했습니다.
할머니가 느끼시기에도 그 빛이 참 따스했나봅니다..

우연을 가장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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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신비 안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요.
시간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요.

친한 선배의 결혼식이 있어서
오랜만에 고향을 다녀왔습니다.
긴 시간동안 공동체를
자기 가족처럼 섬기던 선배가 마흔이 넘어 결혼을 했습니다.
전국에 떨어져 지내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아름다운 예식을 축하했습니다.

결혼은 아주 빨리 하던지
아니면 아주 늦게 해야지
이정도의 유난스런 축하를 받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반가운 얼굴을 대하고
각자의 소식을 물으며 모임과 모임이 이어졌습니다.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이어지는 기도모임이 하나 있습니다.
하지만 서로의 일상이 바빠지고
외국에 나가서 살게 되는 가정도 생겨서
전화로만 안부를 물어오다가
선배의 결혼을 계기로 한 자리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비 내리는 날, 카페에 자리가 하나도 없어서
작은 신혼집에서 옹기종기 모였습니다.
오랜만에 말씀을 전했고 함께 기도하기를 청했습니다.
정말 한순간에 눈물흘리며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주님의 위로하심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그 작은 공간에서 흐르는 공기가 바뀐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공통적으로 주신 아버지의 마음은
카페에 자리가 없는 것이 우연이었겠냐는 물음이었습니다.
카페에 자리가 없어서 기도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은
하나님의 분명한 뜻과 계획 가운데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긴 시간동안
내게 시간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가르쳤습니다.
아내와 우연히 들러서 문 두드리게 된 선배의 집,
그곳에서 드리는 기도가 생각납니다.
어느 외국의 공항 출국장에서 함께 드린 기도.
새벽의 패스트푸드 한 켠에서 드린 기도..
수많은 시간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지만
적어도 일상에서 구별하여 드린 기도의 시간만큼은
하나님의 시간속에 있다는 분명한 확신이 있습니다.

구약의 흐름을 살펴보면
다윗의 계보까지 오는데
수많은 오류와 이해할 수 없는 아픔과 우연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서
똑같이 볼 수 있는 일들입니다.
주목할 점은 그런 우연들이 과연 우연에만 그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메시야가 탄생할 것을 계획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우연과 우연만으로 엮어 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만나는 우연속에,
다시 말하면 우연을 가장한 수많은 만남과 사건속에서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고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