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 면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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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니버는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열정(passion)이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긍휼(compassion)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련 없이는 아무 가치도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께는 하나님 밖에는 사랑할 만한 존재,
궁극적으로 헌신할 만한 대상이 없었다.
아버지의 집이 강도의 굴혈로 된다든지,
아버지의 자녀가 고통 가운데 있다면
때론 분노로 나타날 수 있었고, 그 동기가 될수도 있었다.
그의 사랑은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이었다고 말하는 것 이외에
예수님의 사랑을 기술할 다른 적당한 방법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찬양보다는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감사라기보다는 주는 것과 용서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사악과 불경성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그대로 수용함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회개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니버는 예수님께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을
긍휼(compassion)이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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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해군을 나왔다.
1년동안 바다위에서 배를 타고 다녔다.
군함이 항해를 나갔다가 항구에 정박하면
소금물에 부식되지 않도록 가장 먼저 배를 정비해야 한다.
그래서 해군을 제대하면 망치질과 페인트칠에 도사가 되게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페인트를 제대로 칠하질 못했다.
내가 붓을 잡으면 엉망이 되어버리기에 나는 늘 다른 일을 맡아야 했다.
또, 해군은 까다로운 복장점검 때문에 다들 다림질도 능한데
내 옷은 선임들이 대신 다려줄 정도로 그런 일에 서툴렀다.

제대를 하고, 대학을 복학해서도
내 마음을 떨리게 할만큼 좋아하는 일도, 잘하는 일도 없었다.
내가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과연 있기나 한걸까?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은 청년시절 내게 큰 두려움이었다.
내가 머물던 학교옆 고시원 가까이에 작은 예배당 하나가 있었다.
나는 저녁마다 예배당 낡은 의자에 앉아 질문했다.
“주님, 이런 저도 사용하시나요? 도대체 어디에 사용하실건가요?”

놀라우신 하나님은 예측못할 방법과 만남을 통해 이런 저런 길로 인도해주셨다.
언젠가부터 나는 사진을 찍으며 골목을 쏘다니게 되었다.
한 번은 작은 섬에서 촬영을 할 때 좋은 조건으로 계약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다.
나는 성령님께서 주시는 감동을 따라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냉큼 이렇게 기도했다.
“내 시간도, 물질도 당신의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하시고픈데로 저를 사용해주세요.
저를 사용해주세요.”

오늘 아는 형이 일하는 NGO에서 식사를 나누며
인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의 놀랍도록 귀한 사역을 어떻게 나눌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또 다른 선배에게는 이번 겨울에 아프리카의 선교지를 다녀와줄 수 있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어느새 우리 아버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절망하던 나를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자로 빚고 계셨다.
작은 예배당에서의 기도가 생각났다.
‘주님, 제발 저를 사용해주세요. 주님..’

저녁에, 아내가 특별한 반찬을 준비한다며
메추리알을 삶아 껍질을 까고 있었다.
도와준답시고 옆에 앉아서는 내가 만진 알들을 모조리 못쓰게 만들어 버렸다.
그 후로 십 여년이 흘렀지만 내게는 서툰것 투성이다.
그래서 내 기도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주님, 이런 저도 사용하시나요?
주님, 제발 저를 사용해주세요. 주님..”

주님의 뜻 가운데 기도하는게 우리의 몫이라면
주님은 당신의 뜻 가운데서 신실하게 이루어 가신다.

커피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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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좋아합니다.
아내와 연애할 때 카페 한 번 간적 없었는데
결혼하고는 늘 함께 집에서 커피를 내려 마십니다.
선물받은 커피머신으로 일 년을 마시다가
작은 비알레띠 모카포트로 에스프레소를 내려 삼 년을 마셨습니다.
선교지에 나갈 때면 작은 도구들도 함께 꾸립니다.
밤이 일찍 오는 그 땅에 커피 한 잔은 선교사님에게 위로가 됩니다.
그러다가 올해 초부터 워터드립으로 내린 더치커피(dutch coffee)를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한 방울, 한 방울 진지하게 떨어지는 물방울을 바라봅니다.
똑같은 물방울인데 같은 모양은 하나도 없습니다.
때론 호흡처럼, 때론 한숨 같아 보입니다.

언젠가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시 56:8)
지금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다가 자신을 숨겨준 제사장들까지도
모조리 죽임을 당하는 어두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결국 택한 망명의 땅 가드에서조차 원수들에 둘러싸여 울고 있습니다.
“하나님,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종일 삼키려 하나이다.” (시 56: 1-2)

언젠가 나는 하나님께 깊이를 구했습니다.
내가 가진 깊이로는 아무것도 담을 것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내게 다윗의 눈물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아픔, 하나님의 아픔을 지적인 동의로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눈물을 알지 못하면 알 수 없는 깊이.
다윗은 눈물로 만들어 졌습니다.
오늘 흘리는 눈물들 안에 아버지의 마음이 있습니다.

느리지만, 충분한 시간동안 만들어 내는 더치커피를 보고
사람들은 ‘커피의 눈물’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더디게 떨어지는 커피 방울을 보며
신실하게 담으시는 주님의 눈물병을 생각합니다..

매일 조금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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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은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합니다. (시119:67)
또한 누구나 경험하는 고난에는 수많은 목적이 있습니다. (롬 5:3-4)
우리는 그것을 다 알지 못하지만
아버지는 그 경험과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 당신의 하실 일에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이 아픔들은 여러 가지 의미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 설명하지 못할 은혜의 범주 아래 있습니다.

은혜가 인간을 향한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이라면
진정한 사랑은 또한 누군가를 강요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부터 아버지의 마음을 구해야만 합니다.

어떤 디자이너가 이런 멋진 말을 했습니다.
“어려운 일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은
매일 조금씩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동안의 시간이 되었건간에
주님을 향한 관계는 오늘부터 다시 시작되어야만 합니다.

성경 한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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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으로 납북된 가족들의 모임에서
촬영하며 찍은 사진 한 장입니다.
1950년에서 52년까지 북한은 남한의 많은 인텔리들을 납북해서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당시의 지령과 자료를 통해 확인한 바로 납북자가 자그마치 8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알지 못하고 살아왔는데
너무나 많은 이들이 헤어진 가족을 그리워 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남겨진 사람들은 사라진 이들이 남긴 아주 작은 흔적에 그들은 그리움을 담고 눈물 흘립니다.
작은 도장 하나, 쓰다 남은 인주, 벽풍의 글씨들..
목사님 한 분은 아버지가 남기신 병풍을 지키기 위해
전란중에 두 번이나 땅속에 묻어가며 지켜냈다고 합니다.
사연 많은 병풍에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금빛으로 쓰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촬영하며 감격스러웠던건 손바닥 만한 성경 한 권이었습니다.
성경 앞 뒤로 깨알같은 손글씨가 적혀 있었습니다.
촬영을 멈추고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어가니 심령이 따스하게 젖어들어갑니다.
그 시절의 찬송의 가사가, 주님에 대한 사랑의 고백
지금으로부터 85년전 누군가의 목소리가 제게 말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역사하시는 성령님께서 제게 말씀하십니다.

” 주여 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주의 공로 의지하여 주께 가오니
상한 마음 고치시고
구원 하소서.”

살아주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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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주님은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살아주어서 고맙다.”

작은 자취방에서 후배를 위해 기도할때였는데
그 후배는 계모의 학대속에 어린 시간을 보냈고
공장에서의 아픈 시간,
쉽지 않은 시절을 살았습니다.

청년의 때, 그는 유일하게 자신을 아껴준 주님이 너무 고마웠고,
그래서 너무 사랑했습니다.
그는 안쓰러울만큼 헌신하던 후배였습니다.
버려진 아이들을 자기 집에 데려와 살다가 몇 번이나 사기를 당하기도 했고
자신의 몸을 혹사할만큼 헌신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 이면에는
예수님 마저도 지난 시간동안 
자신을 거절했던 사람들처럼 떠나버릴까 두려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자신을 혹사하며 집착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아버지의 사랑이 부어지자
그런 두려움은 눈녹듯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언제라도 목숨을 놓아버릴 수 있을정도로 암울했던 시간을 보냈지만
그만큼 아프고 힘들었지만
살아서 주님을 만나 사랑하는 오늘을 만났습니다.

“살아주어서 고맙다.”
존재 그 자체를 사랑하시는 우리 주님을 만나고 나니
이제는 사랑하는 주님 때문에 사랑할 뿐입니다.

꿈꾸는 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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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의 시간은 무척 좋았습니다.

강의를 하기전, 레크레이션 강사가 현란한 말솜씨로
아이들을 들었다 놨다하는 모습을 보며
잔뜩 주눅이 들었어요.
도망가고 싶은 마음으로 주님께 물었지요.
‘초등학생은 무리일까요?
괜한 시간을 맡은게 아닐까요?’
모인 아이들 대부분이 부모님은 계시지 않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사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일부는 ADHD치료를 받고 있었으며
나머지 얼마는 진단을 못 받았을뿐 다른 여러 증상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최소한 떠드는 아이들보다는 목소리가 커야할텐데요..
‘주님, 도와주세요.’

그런데, 놀랍게도 2시간 30분이 넘는 시간동안
아이들이 보여준 집중력은 대단했습니다.
물론, 중간 중간에 선물공세를 펴기도 했지요.
집에서 나서는데 주님이 주시는 감동을 따라서
제가 쓴 책과 엽서들을 가지고 갔어요.
‘좋은 사진은 어떤 사진일까요?’
‘잘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정답 없는 질문에 아이들은 하늘 높이 손 들었지요.

꿈을 찍어오라는 말도 안되는 숙제에
이파리 네 개를 모아 네잎크로버를 만들기도 했고
자기 곁에 계신 멘토선생님을 찍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늘과 구름, 나무까지도..
자신의 꿈을 소개하는 시간에
아주 조그마한 여자 아이 하나는
제가 이야기했던 아프리카에 우물을 자신도 만들어 선물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럽던지요.

강의와 촬영을 모두 마치고 짐을 정리하는데
아이를 돌보던 멘토선생님 몇 분이 인사합니다.
“은혜로웠던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조금 당황했습니다.
캠프에서의 강의가 은혜로웠다니요.
선생님은 자신이 크리스찬임을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 예수님, 십자가, 보혈, 이런 단어들은 없었지만
우리의 모든 시간에 주님은 당신의 은혜의 빛을 비추어 주고 계셨나봅니다.
주님, 감사해요. 너무.

감사투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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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차드에서 돌아왔습니다.
7년만에 찾아간 그곳은
수도 은자메나의 포장된 도로와 가로등 설치등 바뀐 모습에
반가움도 있었지만, 긴 시간을 들여 바뀐 결과물치고는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여전히 뜨거웠던 그 곳 하늘,
45도의 작렬하는 태양보다 나를 힘들게 했던 풍경은
도무지 바뀔 것 같지 않은 아픔들입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주님이 주시는 마음을 살피는 중입니다.
나중에 다시 나누겠지만,
그곳에 만들어준 우물은 마을 주민들에게는 생명수와 같았습니다.
조용히 우물만 보고 오려 했는데
꼬마녀석들에게 박수도 받고, 사람을 대표해서 기념촬영도 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우물로 인해 고마워한다며
학교 영어선생님에게 시원한 코카콜라 한 병을 선물받기도 했습니다.
숨을 고른 후, 다시 그곳에 우물을 만들고 싶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우선 밀린 작업들을 차근차근 해나가고 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서둘러 차드에 대한 사진을 정리하고,
릴레이 전시를 통한 투웬티프로젝트도 이어나가고 싶지만
절제,절제를 외치며 걸어가고 있습니다.
갑자기 컴퓨터도 말썽이라 연일 인내심도 배워가고 있습니다.
연말이 가까워지고 있으니 캘린더도 준비하려 합니다.
네팔에 대한 응원을 내년 캘린더에 담으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시차를 적응해 가며
몇 군데의 교회서 메세지를 전했습니다.
교인들 뿐 아니라 저도 위로와 힘이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시골의 따스한 교회서 창문을 열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따사로운 햇볕, 싱그런 바람에 새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꿈결같은 시간으로 기억되지 싶습니다.

그제는 개봉동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말씀을 전해달라는 요청은 거의 무조건 수락하는 편입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주님 앞에서 마땅한 태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방사형으로 뻗은 넓은 본당에
서너명만이 드문드문 앉아 있습니다.
앉아 있는 분들은 내가 누구인지도,
어떤 메세지를 전하려는지도 전혀 궁금해 하지 않는 얼굴이었습니다.
보통은 몇 명의 사람이라도 미리 모여있거나, 찬양을 하거나
약속된 순서를 따라 진행되기 마련인데
마치 조용한 도서관에서 물건을 팔러 온 분위기같아 보였습니다.
제법 시끄러운 복도와 연결되어 있는 중앙문이 활짝 열여져 있는 상태라
낯설고 이질적인 풍경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관심없어 보이는 이들에게
나를 소개하는 낯선 상황이지만
이상하게도 두렵거나 떨리지도 당황스럽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처음 대하는 경험이라 낯설 뿐이었습니다.
주님은 긴 시간을 통해 내게 가르쳤습니다.
알 수 없는 한 명을 통해서도 주님은 당신의 나라를 이루신다는 것,
지극히 작은 한 사람을 통해 흑암의 세력이 깨뜨려 진다는것..

메세지를 전하는 도중에
한 사람, 또 한 사람이 초청되어 들어왔고,
시간이 지나면서 영적 분위기는 조금씩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습니다.
메세지 도중에 준비한 영상을 보여주며
뒷자리에 앉아 잠시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사람들은 나지막하게 ‘아멘’을 고백했고
어느새 얼마는 울고 있었으며, 다짐하고 반응했기 때문입니다.
마치는 시간에는 한 자매가 찾아와서
자신의 기도응답이라며 감사인사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좋게 마쳤지만,
그것이 아니어도 모든 시간에 주님이 함께 하시기에
우리의 모든 일상은 감사투성입니다.
잘 다녀왔습니다.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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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이 불빛들이 반짝거리는 게 마치 별 같아.
너무 아름다운 것 같아.
전에는 몰랐는데,
이렇게 예쁜 반짝거림은
눈이 내린 후에만 볼 수 있는 줄 알았어.

가끔 불을 피울 때도 오빠가 피우고,
불이 꺼질 때도 마지막까지 있어보지 않아서 몰랐는데
불이 다 꺼져갈 때
이렇게 아름답게 반짝거리는 줄은 몰랐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별처럼 그렇게 반짝거리는 게 너무 신기해.

불이면 다 같은 줄 알았는데,
다 아는 줄 알았는데,
경험해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구나.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는 것이 있구나.”

어느 나라에서,
선교사님이 그날의 일정이 다 마쳤는데
늦은 밤에 불러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헤드라이트를 의지해서 비포장도로를 달렸습니다.
인적이 드문 어느 장소에서
차에서 내렸습니다.
사람도, 건물도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차 시동을 끄고
선교사님이 가리키는 곳으로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하늘로 향했더니

아.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은하수.
진작 알았다면 삼각대라도 챙겼을 것을.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해
쏟아지는 별빛들을
내 눈에, 내 마음에 가득 담았습니다.
늘 하늘에 존재했지만
결핍이 있어야만 보이나 봅니다.
전기가 없고, 불빛이 없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빛은 찬란하게 반짝거렸습니다.

아내는 그런 반짝거림을
눈이 내린 날 경험했었나 봅니다.
가끔 옥상에서 불을 피우곤 합니다.
어제는 교회서 예배를 드린 후,  아내가 불을 피웠습니다.
장작 사이에 고구마를 구워 먹기로 했습니다.
장작을 구해다가 쌓아 놓았다가 야단맞았는데
막상 피워보니 아내도 좋았나 봅니다.
다행입니다. 
별빛들이, 불빛들이 아름답습니다.

살아남은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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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이 함께 예배드렸습니다.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막7:5-8)
온유에게 이 말을 설명해주었습니다.

우리가 입술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마음이 다른 곳에 가있다면,
예수님보다 초컬릿, 사탕, 장난감 같은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한다면,
그것은 외식하는 것과 같습니다.
외식하는 것은 마치 연극에서
가면을 쓰고 다른 사람으로 연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함께 드린 예배는 계속 있었지만
어제의 예배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이유는
처음으로 온유가 주도해서 기도제목들을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위해서도 기도하자는 말에
궁금해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천국에서 외할아버지가 잘 기다리고 계시라고
우리가 나중에 할아버지 만나러 갈테니까
거기서 잘 기다리고 계시라고 기도하고 싶어서.”

장인어른은 아내가 고등학교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물론이고, 저도 얼굴을 뵙지 못했습니다.
온유가 내놓은 기도제목이 참 따뜻하다는 생각에
그 기도도 함께 드렸습니다.

예배를 마무리하는 대표기도도 온유가 맡았습니다.

“우리 가족들을 지켜주시고
우리 가족들이 병이나
나쁜 질병에 걸리지 않게 해주시고

하나님만 사랑하게 해주시고
소명이도 기도하게 해주세요.

우리 가족들이
말과 행동이 하나님께로만 가게해주세요.
하나님만 사랑하게 해주세요.

교회서도 장난치지 않고
하나님만 찬양하고

우상한테 절하는 사람은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주시고
추석때 우상에게 절하는 사람들
하나님한테 절하게 해주시고
하나님께만 기도하게 해주세요.

내 생각과 내 마음과
우리 가족들 생각과 마음을
지켜주시고
마음이 초컬릿, 사탕, 장난감으로 가지않고
하나님쪽으로 가게 해주세요.”


요즘 계속 묵상하는 에스겔 말씀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말씀하십니다.
네번에 걸친 심판에 대한 말씀속에서(겔14)
크게 주목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의인으로 대표되는 노아, 다니엘, 욥도 심판을 막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아들이나 딸들도 구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자신에 대한 심판 뿐 아니라
자녀와 다음 세대에 대한 마음에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결국 자녀들을 심판 가운데 건져낼 수 있는 것은
자녀들 스스로가 주님을 바라보도록 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심판들이 전혀 비인격적이지 않은 이유는
살아남을 이들과, 심판 받을 이들 모두
그들의 행위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겔14:22)

이 말은 두렵지만, 감사한 말씀입니다.
살아남은 이들..
주님을 여전히 바라보는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들,
그들을 통해 주님을 바라보는 또 다른 사람들은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보라 구원받을 몇몇 아들들과 딸들이 그 안에 살아남을 것이다.
너희가 그들의 행동과 행위를 보면
모든 재앙에 대해 너희가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겔14:22-23)

매일 토닥거리고, 아이들을 위로하고 혼내고 다시 품어주는
일상의 반복을 통해
정말 바라는 것 한가지는
이 아이들 스스로 주님 앞에 서는 날입니다.
세상속에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사람들은 어리석다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 발 앞에서 우린 서로가 서로를 통해 위로와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p.s 아프리카 잘 다녀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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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묵상글을 써두고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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