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에 머무르다가
기근을 만나 애굽으로 내려옵니다.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말씀하셨지만
하늘만을 바라봐야 하는 땅입니다.
우기인 겨울과 봄에 비만 적당히 온다면 ‘비옥한 초생달’이겠지만
비가 오지 않으면 이 땅은 광야와 다름없게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늘 기근의 때에 애굽으로 향할 유혹을 만나게 됩니다.
애굽은?하늘을 바라보지 않아도 살만큼 비옥한 땅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바라보지 않아도 충분히 살만하다면 과연 나는 어디를 향해 걸어갈까요.?

다윗은 그토록 바라던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기뻐하며?이렇게 찬양합니다. (대상16, 시105:14)
“그러나 그는?사람이 그들을 억압하는 것을 용납하지 아니하시고
그들로 말미암아 왕들을 꾸짖었습니다.”
다윗의 찬양에 나오는 이 대목은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의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는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속이는 세 번의 대목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바로와 아비멜렉에게, 이삭이 그랄에서 아비멜렉에서 그렇게 합니다.
우리의 불신앙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때마다 간섭하셔서 그들을 구해내십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그들 또한?주님께서 만나주신 인생들입니다.
과연 주님 앞에서 내가 이루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갈릴리호수에서 제자들은 풍랑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고물에 주무셨을 때는
당신께서 함께 하셨기에 그나마 나은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수님이 부재(不在)하십니다.
5개의 떡과 2개의 물고기로 나눈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고도
밤새 파도조차 거스르지 못하여 제자리에서 맴도는?인간의 한계 또한?우리의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육체의 노곤함, 현실의 한계, 부양과 육아의 어려움..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성경은 그 때의 제자들의 상황을?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막6:52)
하지만 예수님이 내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 분은 임마누엘로 함께 하십니다.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풍랑을 밟고 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막6:50)

주님께서 약속하셨지만, 그 분의 은혜를 맛보았지만
우리의 마음이 둔하여지면 약속의 땅을 떠나 애굽을 향합니다.
잠시 하늘을 손으로 가려보기도 합니다.
광활한?하늘을 작은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둔하여지고, 어리석은 자들을 위해서도
그들을 통한 당신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세상의 왕들 조차 꾸짖으십니다.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에게 할당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도다
그 때에 그들의 사람 수가 적어 그 땅의 나그네가 되었고
이 족속에게서 저 족속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떠돌아다녔도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그들을 억압하는 것을 용납하지 아니하시고
그들로 말미암아 왕들을 꾸짖어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손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들을 해하지 말라 하셨도다” (시105:11-15)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얼마나 의외의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땅을 얻기 위해 땅을 포기하라니요.
더군다나 그 땅은 빈 땅도 아니었습니다.
이미 가나안 사람들이 그 땅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12:6)
또한, 아브람의 나이는 75세였습니다.
하지만 주님께 나이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아는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 자신을 어린 아이일 뿐이라고,
80세의 모세는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 보낼만한 자를 보내라고 항변했습니다.
당신께서 말씀하신 때가 가장 옳은 때입니다.

며칠전, 한 후배를 만났습니다.
괜찮아.”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을 따라 이 말을 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이 말에 후배는 눈물을 후두둑 쏟아냈습니다.
몇 년전, 기도중에 주님은 후배에게 당신의 비젼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몇 년이 지나도 좀처럼 열리지 않는 현실의 문앞에서
우리의 마음은 점차 굳어집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너무 관념적이라 여겨집니다.
주님은 주님일 뿐, 나는 내 인생을 살아야 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두려움과 싸워야 합니다.
두려움이라는 상대도 믿음을 지키는 것 만큼 쉽지 않습니다.
이 인생은 내가 책임질 만큼의 만만한 무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후배가 눈물을 그치고 난 뒤에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낙담해도 된다.
하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돌이켜 힘을 내자.
주님의 우리를 향한 구원을 믿는다면, 주님이 내 안에 계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낙담하지 말자. 주님의 구원보다 크지 않는 일에 낙담하지는 말자.”
우리가 만나는 모든 낙담은 사실 우리의 구원보다 크지 않습니다.

주님은 아브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개역개정에는 원어를 다시 옳게 바꾸어 표현했습니다.
너는 복이 될지라” (12:2)
근심많은 우리에게 당장 손에 잡힐 무언가를 주시면 우리는 낙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보다 큰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 손에 복을 쥐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체가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존재 자체를 복되게 하신다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언젠가 아프리카에 우물을 만들기 위해 분주할 때가 있었습니다.
당장 우리 가족들의 생계를 생각해야 할 가장이
아프리카의 친구들을 돌보는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이 마땅한 일인가?’
아무리 주님께서 주신 감동이 있다지만 내가 지금 이렇게 하는 것이 온당한것인가?’
정말 많이 고민했던 질문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답이 바로 이 본문입니다.
너는 복이 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넘쳐서 남은 것으로 흘려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통로가 되어 흘려 보내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서있는 자체로 그 풍경이 복이 되는 소원을 가졌습니다.

작년, 미국에서 6남매의 어머니, 정한나 사모님을 만나서 교제했습니다.
홀사모 사역을 하시던 그 분이 내게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돈이 다 제 돈이라 걱정없어요.”
쉽게 말씀하셨지만, 결코 말하기 쉽지 않은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돈이 다 제 돈이라고 말하려면,
그 전제로 내가 가진 돈도 주님의 것처럼 사용하지 않으면
이 말이 진실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결코 알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75세 된)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고향과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갔습니다.” (12:4)
그가 바로 우리의 믿음의 조상중 한 명입니다.

예비소집일

조금전에 귀가해서
우편함을 열었더니..
취.학.통.지.서.가 와있습니다.

드디어 온유가 8살이 되어
내년부터 초등학교에 입학합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쉽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쉬운게 세상에 어디 있을까요?

아내와 키득키득 웃다가
둘이 보기 아까워서 공유합니다.

예비소집일 날짜가
12월 24일 인데다가 시간이..
예비군훈련 비상소집도 아니고..
새벽송이라도 불러야 할까요?
예비소집일은 원래 이런 시간에 모이나요? ㅎㅎ

온유와 소명이의 기도

연말이 되면 여러 작업들 때문에
본의아니게 아이들이 방치됩니다.
그래서 아쉬울만큼 짧은 시간이라도
아빠부터 순서대로 돌아가며 함께 기도하곤 합니다.
어른들의 기도가 끝나고
아이들의 순서가 되면 나도 모르게 기대가 됩니다.
기도의 내용을 듣다 보면
피식 웃음이 새어나올 때도 있고
때로는 마음을 쿵쾅거릴만큼
놀라운 믿음의 선포로 들릴때가 있습니다.

“엄마 아빠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지 않게 해주세요.”
온유는 엄마에게 자주 공약을 합니다.
자기가 어른이 되면 시집도 안 가고
엄마 손에 물 한방울 안 묻히겠다고 합니다.
어른이 되는 건 궁금하지만
자기가 어른이 되면 우리가 늙어간다는게
그렇게 싫은 모양입니다.
요즘 기도할적마다 엄마 아빠 안 늙게 해달라는 기도가 빠지지 않습니다.

“소명이가 기도를 잘합니다.
어른될때까지 더 잘하게 해주세요.”
온유 누나의 기도를 듣고는
소명이가 기도할 때는 이렇게 받았습니다.
“내가 기도를 잘합니다.
나 기도 더 잘하게 해주시고..”

실제로 존재하는 모습이 아니라
믿음으로 자라나길 원하는 모습을 말해주는 것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온유의 기도처럼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지구에 퍼져서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땅끝까지 복음이 전해지면?사랑하는 우리 예수님
얼굴과 얼굴로 볼 수 있겠지요.

http://lovenphoto.com/wp-content/uploads/2015/12/pray2.mp3

“우리 가족이 안 아프게 해주시고
예수님만 믿게 해주시고
우리 엄마 아빠가 할머니, 할아버지 안되게 해주시고
우리 가족이 힘들고 지치고 병들지 않게 해주세요.

소명이가 기도를 잘합니다.
어른이 될때까지 더 기도를 잘하게 해주세요.
우리 가족이 기도하는 것 잊지 않게 해주시고
기도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게 해주세요.
예수님한테만 기도하고
우상한테 기도하는 사람들은 없게 해주세요.
예수님 믿으라고
전도 많이 하게 해주세요.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지구에 퍼지게 해주세요.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다 예수님을 믿게 해주세요.

하나님만 사랑하게 해주시고
말씀들을 때 장난 안치게 해주세요.
예수님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
예수님만 믿게 해주시고
하나님만 사랑하게 해주시고
엄마 아빠 누나 나랑 축복하는 마음만,
사람하는 마음만 믿게 해주시고
예수님 하나님 사랑하고
믿고, 축복하게 해주시고
많이 기도하게 해주시고

내가 기도를 잘합니다.
나 기도 더 잘하게 해주시고
엄마와 아빠, 누나와 기도할 때
장난치지 않게 해주시고
엄마 아빠 말 듣게 해주시고
누나와 나랑 싸우지 않게 해주시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밥 안에 뭐가 들었지?

아침에 외출준비로?급할 때
우리집은 늘?볶음밥을 만들어 먹습니다.

아내는 이런 급한 상황을 대비해서
값이 살 때 마트에서 야채를 사놓았다가
호박, 당근, 파프리카를 잘게 썰어서 냉동실에 보관해 놓습니다.
그러면 후다닥 후라이팬에 마늘과 양파를 볶고, 냉동실 친구들을?꺼내 볶고,
밥과 계란을?마저 볶으면 완성입니다.

“엄마, 이 밥 안에는 뭐가 들었어?”
“움. 호박이랑 파프리카”
“아니, 밥에 뭐가 들어있냐구.”
“음. 당근이랑 멸치도 들어갔지.”
“아닌것 같은데?.”
“온유야 맞아. 봐봐, 빨간색이 당근이구,?이건 파프리카야, 이건 호박이구.”
“아닌데..”
“그게 아니면 밥에 뭐가 있는데?”
“밥 안에는 탄수화물이 있는거 아냐?
내 말이 맞지?”

“하..그.그래. 그렇지..”

르우벤의 눈물

야곱 집안의 장남 르우벤이 들에서 합환채를 구해왔습니다.
이는 임신을 돕는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 진귀한 식물입니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그것을 어머니께 가져갔습니다.
르우벤의 어머니는 레아입니다.
레아에게는 자신이 직접 낳은 아이만도 네 명이나 됩니다.
하지만 남편인 야곱은 레아에게 마음을 주지 않고
레아의 동생인 라헬만을 사랑합니다.
레아는 동생처럼 남편의 사랑을 받는 것이 소원입니다.
아이들은 이런 어머니의 처지가 안타깝습니다.
오늘 르우벤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선물 하나를 가져다가 위로합니다.

하지만 라헬은 이마저도 욕심을 냅니다.
비록 자식은 없었지만,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그는
르우벤이 가져다 준 합환채까지 요구했습니다.
레아는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남편을 빼앗아 간 것도 모자라서 아들의 합환채까지 빼앗느냐.” (창30:15)
이에 라헬은 남편인 야곱을 가지고 모종의 거래를 하게 됩니다.
자신이 합환채를 갖는 대신, 오늘 밤 야곱과 동침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지켜보던 르우벤의 심정은 어떠할까요?
자신의 어머니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가져다 준 진귀한 선물이 작은 어머니에게 거래되어 넘어갈 때 가졌을 분노
남편의 사랑을 얻지 못하는 어머니에 대한 슬픔과 동정
르우벤의 마음에 오늘 일은 평생 씻기지 않을 상처로 남았을 것입니다.

이후로 레아는 몇 명의 자식을 더 생산하게 되고, 결국 라헬도 꿈꾸었던 자식 요셉을 생산하게 됩니다.
이런 틈바구니 속에서 자라났던 아이들은 당연히 상처와 분노를 안고 살아 갈 것입니다.
르우벤은 아버지에 대한 분노 때문에 작은 어머니 라헬이 죽은 후,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까지 하게 됩니다.(창35:22)
아버지지만, 부정하고 싶었던 대상입니다.
형제들이 장성한 후, 분노는 더욱 구체적인 표적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당연히 분노의 대상이었던 라헬의 아이 요셉에게로 향합니다.
아버지 야곱은 라헬만을 사랑했던 그 사랑을 요셉에게 쏟습니다.
결국 형제들이 동생 요셉을 애굽에 팔아버리기에 이릅니다.

긴 시간이 흘러 요셉은 총리대신이 됩니다.
가나안에 가뭄이 들어서 곡식을 구하러 형제들은 애굽으로 곡식을 구하러 옵니다.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야곱은 잃어버린 요셉 대신 그의 동생 베냐민에게 자신의 사랑을 쏟습니다.
긴 시간동안 세월이 흘러도 야곱은 전혀 변한 것이 없습니다.
시간만 흘렀다 뿐이지, 대상만 변했을 뿐 변한 것은 없습니다.
얼마나 답답한 시간을 보냈을까요?
야곱은 전혀 변한 것이 없지만, 이 깨어지고 상처많은 가정에 하나 둘 변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유다는 또 다른 분노의 대상 베냐민을 대신해서 인질이 되길 자청합니다.
이런 변화 때문에 요셉은 형제들 앞에서 울음을 참지 못하고 통곡하게 됩니다. (창45:2)
아주 긴 시간이 흘러서야, 이 가정은 서로를 끌어안게 되었습니다.

오늘 큐티말씀을 묵상하며, 빈 여백에 적어 놓은 글입니다.
‘지금 당사자들은 알지 못하지만
레아와 라헬의 유치하고 치열한 경쟁구도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열어가신다.’
라헬이 낳은 아이를 통해, 형제들이 미워하는 한 아이 때문에 이스라엘은 위기 가운데서 살아나게 되었으며
레아를 통해 태어난 아이들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제사드리는 레위가 태어났으며,
유다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왕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내가 주님이라 부르는,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실 구원자가 태어났습니다.

르우벤의 아픔이 실제적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더욱 실제적입니다.
그저 내 눈에 괜찮아 보이는 것만이, 좋아 보이는 것만이 주님의 일하심이 아닙니다.
모든 불합리와 어리석음과 경쟁과 아픔 속에서도
주님은 당신의 뜻을 오늘도 이루어 나가십니다.
그것이 내가 아픔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사랑이라

<아직도 가야할 길>을 쓴 스캇펙은 이렇게 말한다.
삶은 고해다.
하지만 고통스럽다는 것을 인정한 사람에게는 더이상 고통스럽지 않다.
문제는 우리에게 용기와 지혜를 요구할 뿐 아니라
없던 용기와 지혜를 만들기도 한다.
마치 아이들에게 일부러 문제를 내주고 풀어 보도록 하는 것과 같다.
문제를 피하려고?하면 바로 그 고통보다 피하려고 하는 마음때문에 사실은 더 고통스러워진다.

이 고통을 이겨 내는 슬기로운 기술을 네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즐거움을 나중에 갖도록 자제하는 것이다.
고통을 먼저 겪은 뒤 즐거움을 갖게 되면 그 즐거움을 더 잘 즐길 수 있게 된다.
12살 아이가?숙제를 먼저 해치운 다음 놀러 나가는 것처럼.

스캇펙은 이렇게 하는 방법이 절대로 복잡하지 않다고 강조한다.
열 살 정도의 아이들도 할 수 있지만
대통령이나 권세 있는 사람들도 이렇게 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의 의지 때문인데
그는 이 의지를 ‘사랑’이라고 말했다.
사랑..

공경의 첫 걸음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세 아들의 이야기를
성경이 주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함과 같은 자녀가, 노아와 같은 아버지가 이후로도 많았겠지만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홍수심판이후 다시 생육하고 번성하게 된 첫번째 이야기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첫번째 이야기는 역사적인 흐름을 만들어 냅니다.
그 계기가 된 사건을 조금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생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던 갯벌같은 세상에서
노아와 자손들은 농사를 시작했고
생육하고 번성할 것에 대한 주님의 약속을 따라 놀랍게도 포도나무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노아의 아들 함은, 그 열매를 먹고?취하여 장막 안에 벌거벗은?아버지의 하체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저 지나치며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원어적 표현으로는?관찰하고, 주목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함은 자신의 두 형제에게 아버지의 수치를 알렸습니다.

홍수심판은 죄악이 관영했던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하지만 노아의?탁월한 의로움이 그를 구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의 이후 행적과 벌거벗음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노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기인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 벌거벗음을 가리려고 옷을 입은 것과는 반대로
노아는 벌거벗었습니다.
여기서 노아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죄 문제를 가진 사람이었으며,
함을 비롯한 그 가정 또한?이 문제 앞에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성경은 모든 죄를 같은 선상에서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물론,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분명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특별한 죄악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바울은 고린도 교인을 향해서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소리쳤습니다.
또한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음행하는 이를 향해 평화의 창을 던졌습니다.

오늘 본문은 특별히 함이 아버지를 향해 하지 않아야 할 행동을 취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함과는 비교될만큼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수치에 대해 다르게 행동합니다.
그래서 셈과 야벳은 놀라울만한 축복의 예언을 받게 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지막때에 대해 경고합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면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부모를 거역한단다..” (딤후3:1-2)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음행과 폭행과 같은 죄악에 대해서는 충분히 심각성을 인식합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것에 대해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결과로써 부모를 거역하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결과에 대해 하나님은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27:16)고 엄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도 고르반_ 하나님께 드릴것이라고 말하면, 부모에게 필요한 것이라도 거절할 수 있다.-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나는?주님을 사랑한다는 말로 사역에 대한 무게는 싣지만
그 말로써, 부모님을 사랑하지 않는 변명을 만드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당시 고르반이라는 말처럼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로, 마땅히 부모에게 드릴 것에 대해 거절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부모님은 특별한 무엇이 아니라 그저 따뜻한 말 한 마디. 사랑한다는 말을 바라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옳은 일입니다.
십계명에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약속이 보장된 첫 계명입니다.
그 약속은 ‘네가 하는 일이 다 잘 되고 이 땅에서 장수 할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엡6:1-3)

지금 주님께서 주시는 감동 중 하나는
먼저 용서를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들 중 많은 분들이 부모에 대한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아픔은 기계적으로 완전하게 제하여 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아픔은 누군가를 위로하는 주님의 놀라운 도구로 사용될 것입니다.
그 아픔의 깊이가?깊을 수록 그렇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왕이 되시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왕이 되었을 경우에는 그 아픔은 나를 찌르는 도구로 사용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도구로 나를 드리기 위한 시작으로 용서를 말하고 싶습니다.
그 첫 걸음으로 우리의 입술의 고백을 통해 주님께서 일하실 것입니다.
아래의 글을 입술로 소리내며 기도해주세요.

“주님, 우리 부모님을 주님께 올려드립니다.
부모님의 지난 과오를 생각합니다.
노아가 벌거벗어 지은 죄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뒷걸음으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은 것처럼
내 부모들의 벌거벗음을 주님께서 입히신 새 옷으로 덮길 원합니다.
이제?그들의 과오에 대해 비난하려고?관찰하고 주목하는 일을 멈추겠습니다.

나는 오늘 그들을 용서하길 원합니다.
내 이성으로도, 내 감정으로도 그들을 용서할 수 없지만
내 안에 왕으로 계신 주님의 마음에 순종함으로 그들을 용서합니다.

이제 주님께서 일하세요.
내 안에, 그들안에서 주님 일하세요.
왕으로 일하여 주세요.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아이의 기도

 

“지금은 점심입니다.
오늘은 밖에 비 옵니다.
비 그치게 해주시고

오늘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게 해주시고
엄마 아빠 말 듣게 해주시고
나랑 누나랑 싸우지 않게 해주시고
누나랑 나랑 엄마 아빠랑
예수님 사랑하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입양을 하려면 두 아이를 낳아본 후가 좋아.”
언젠가 친구가 이렇게 이야기해주었습니다.

둘째 아이가 입양한 아이라면
‘내 아이는 이렇지 않았는데
왜 이 아이는 이렇게 행동하지?’
간혹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두 아이를 길러보면
‘내 배에서 나온 아이도 이렇게 다르구나.’
그래서 세 번째 아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결국 사람마다 각자의 특별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소명이의 기도를 듣고 있으면
감사가 있습니다.
소명이는 온 가족이 기도할 때도
혼자서 장난치거나 기도를 방해하기 일쑤였습니다.
돌아가면서 기도를 시키면
소명이 차례가 되면 엉망이 되어버리곤 했습니다.

아이를 기르다 보면
갑작스런 변화를 경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집으로 안부전화를 했을 때
온유가 “아빠 좋아.”라는 말을 했습니다.
온유가 처음 문장을 말한 날입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갑자기 말을 시작하는 것처럼
몇 달전부터 소명이는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가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는
소명이는 자주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에 유아부 선생님이
부친상을 당했습니다.
소명이는 선생님을 안아주며 기도해 주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선생님 도와주세요.
예수님만 바라보게 해주세요.”

5살 아이의 위로에 선생님은 눈물 흘리며 감사했지요.

갑작스런 아이의 기도를 유심히 살폈습니다.
하루의 날씨를 이야기하고
어제 누나와 다퉈서 속상했던 것을 말하고
자신의 소원을 이야기 하고..

아직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지만
기도가 무지 어렵거나
곤란한 것이 아님은 알게 되었습니다.
기도는 그저 예수님과
대화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스한 밥상 앞에서
예수님을 사랑하게 해달라는
아이의 기도가 얼마나 감사한지요.

이별

사람의 생이 이렇게 알 수 없는 것이구나.

너무 갑작스러웠던지 장례식에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가까운 지인을 만났습니다.
그를 보자 그제야 내 안에 참았던?눈물과 슬픔이?흘렀습니다.
돌아가신 분은 그렇게 바라던 주님의 품안에 노니는데
남아있는 이들은 빈자리를 그리워 하네요.

나는 지금도 내 곁에 있는 이들이
이 땅에서 영원히?함께 할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루만 살 것처럼 살아간다면
나는 오늘 무엇할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