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질문

드라마 속 사랑에 익숙해지면
연애하는 상대에게서 헛된 것을 기대하게 됩니다.
드라마에서 배운 두근거림을 느끼지 못하면,
감동적인 상황이나 명 대사가 전달되지 않으면,
마치 사랑이 아닌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드라마의 사랑은 여러 작가들이
힘을 모으고, 감정선을 만지는 음악과 연출,
배우의 비주얼이 만들어낸
가상의 한 단면입니다.
 
우리의 일상이 날마다
즐겁고 행복한 순간으로 가득할 거라 믿으면
그렇지 않은 날은 불행하거나
잊고 싶은 날이 되고 말지만
 
기본적으로 인생은 고해입니다.
인생에 대해 다시 눈을 뜨게 된다면
아무것도 아닌 날도
기쁘고 즐거운 날이 될 수 있습니다.
 
오랜만에 하늘이 맑게 개인 주말,
집에서 가까운 공원을
가족과 함께 산책했습니다.
대단할 게 없는 시간이지만
구름 사이 내리는 햇살도 감사했습니다.
길을 걸으며 주님께 물었습니다.
“왜 사람들에게 그렇게 질문하셨나요?”
 
성전에서 예수님은 여러 날카로운 질문
예수님의 권위, 세금, 부활 등의 문제에 대해
답변을 마치신 후,
이번에는 예수님이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사람들이 왜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말하느냐?” (눅 20:41)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닙니다. 
성경도 그것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던지신 질문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가 다윗의 혈통을 따라 태어난다는 말이
단순히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
그들이 원했던 바대로
위기에 있던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구원해줄 인물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부르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 (눅20:44)
 
예수님의 질문이 가진 의도는
그리스도에 대해 너희는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림 그린 그리스도는
큰 바다의 작고 작은 모래와도 같습니다.
 
내가 그려 놓은 예수님..
내 작은 마음속에
주님을 그림 그리기에는
마음의 크기 뿐 아니라 생각의 능력,
상상력도 너무 작습니다.
 
내 마음과 인생 속에
주님이 그려주세요.
평범하고 대단할 것 없는
매일의 시간 속에
빛으로 만나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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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하늘을 바라보기

살아가다가 
가끔 두려운 마음이 들면 
멈춰 서서 하늘을 바라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하나님이 먹이시고 기르신다는 
주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러면서 여러 선택들 앞에서
고민하고 결정할 때가 많았습니다.
 
어제도 여러 도움을 구하는 곳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몇 개는 거절을 하고
몇 개는 도와준다고 말했습니다.
도와준다는 말이 뭐가 어려워서
거절하느냐 물으면 할 말도 없지만
그 시간을 비워야 할 뿐 아니라
나머지 빈 시간은 그 시간을 갚으며
현실을 살아야 합니다.
 
인생을 가지고 장난치는 건 아닐까?
말도 안되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됩니다.
평범한 하루 앞에서 낙담하거나
한없이 절망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절망 같은 하루 앞에서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기쁨으로 가득한 날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들로 구성된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만을 인정했고
부활이나 영적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자신들의 안정적인 사회적인 지위 때문에
더욱 부활을 믿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활을 믿게 되면
사회구조적인 개혁의 위험성을
품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결혼과 대를 잇는 상황을,
부활이 존재하지 않음을 전제로 질문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질서와
하나님 나라에서의 질서는
전혀 다름을 말씀하셨습니다. (눅20:34-38)
 
인간적인 논리와 이해로는
가늠되지 않을 그 나라의 이야기.
영생이 그저 죽지 않는
영원한 인생의 연장이라면
얼마나 지루하고 슬픈 삶일까요?
그 나라는 주님과의 끊임없는 사귐이 있는 나라,
주님의 통치함이 있는 나라입니다.
 
사두개인이 인정하는 모세오경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눅20:37, 출3:6)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죽었지만 여전히 살아서 부활의 때를 기다리며
주님의 품에 살아가는 이들의 하나님,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는 살아 있다” (눅20:38b)
여전히 살아있는 그들에게
약속한 언약이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믿음,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신실하게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
 
부활을 부정하게 되면
사두개인처럼 현세적이 되어야 마땅하겠지만
부활을 믿게 된다면,
정말 부활을 믿게 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질문합니다.
아마도 이 땅의 삶이
전부인 것 처럼 살지는 않을 테지요.
 
끊임없이 흔들리는 삶은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래서 멈춰 서서 오늘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스윗 소명

소명이는
막내답게 달달한 표현을
자주 쓰는 편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엄마의 머릿결을 만지며
“엄마는 참 예쁘다.
우리 엄마 참 예쁘다.”
속삭이곤 하지요.
 
아빠가 몸이 안 좋을 때는
입안에 프로폴리스를 뿌려주고
어깨를 안마해주면서
앞으로는 박수를 많이 치라고 속삭입니다.
박수를 많이 쳐야 오래 살 수 있다면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언젠가부터 잠들기 전에
혼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데
요즘 소명이의 기도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저는 사랑에 빠졌어요.
하나님께 사랑에 빠졌어요.”
 
소명이의 기도를 듣다 보면
나도 그분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주님의 날개 아래 안겨서
사랑에 잠기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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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은 절대 없었으면

“이런 일은 절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포도원 비유를 듣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세주고
타국으로 가서는
소출을 받기 위해 세 번이나 종을 보냈지만
농부들은 종들을 때리고 모욕해서
빈손으로 보내버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인은 사랑하는 아들을 
보냈지만, 농부들은 그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어 죽였습니다.
이에 주인이 와서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는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는 이스라엘은
이 비유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습니다.
성경은 자주 포도나무나 포도원을 이스라엘의
상징으로 사용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런 일은 절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눅20:16)
 
성전에서 이런저런 갈등과 논쟁이 이어지는 상황이라,
예수님을 향해 적대적이었던
종교지도자들은 이런 의미를 담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 우리가 그런 악한 농부는 아니야.’
아마도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부정했을 것입니다.
또 다른 부류는 이 무시무시한 일이
이스라엘에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을 것입니다.
 
포도원의 농부들은 아들을 보고
“이 사람은 상속자이니 그를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될 것이다.” (눅20:14)
라고 말합니다.
 
아들을 죽이게 되면 그들이 경작하고 있던
포도원의 소유가 자신들의 것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의 바람처럼 포도원의 주인이 죽어서
그 상속자인 아들이 찾아온 것이라면 
농부들의 계산대로 포도원은 자신의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면
인생을 살아가며 이것저것 선택할
다른 방법들이 생각납니다.
나도  악한 농부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일은 절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부정을 하건, 심판을 피하고픈 간곡한 바람과는 별개로
시대와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정확한 판단이 있습니다.
실제로 AD 70년에 예루살렘은 철저하게 파괴됩니다.
그 이후로도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기다리시고, 또 심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성경을 통해 내게 무엇을 말씀하실 때
이 이야기는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여기거나
제발 내게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
그것과 상관없이 주님의 진리가 서있습니다.
나의 믿음은 어디에 서있는가요.
 
“누구든지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마다
부서질 것이며 이 돌이 어느 사람 위에 떨어지든지
맞는 사람은 가루가 되고 말 것이다.” (눅20:18)
 
이 돌이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여기서 돌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내 판단과 내 바람이 기준이 아니라
주님이 판단의 기준이기에
악한 농부의 심정을 가진 내 마음을 회개합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미국 동부에서

십 년 전 득량도라는 외딴섬에서 기도했습니다.
주님의 부흥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그해에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내가 살던 작은 자취방에는
매일 마다 밤새도록 기도가 이어졌습니다.
각 교회의 중보기도팀이 찾아와서
함께 기도하기도 했고, 동역자들을 만났으며
일본과 러시아와 아프리카, 미국..
각 나라를 넘다 들며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십 년 만에 미국에 와서
기도했던 흔적을 되짚었고
그리웠던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너무 짧았던 만남이라 아쉽기도 했지만
안부를 나누고 손잡고, 사진 한 장 남긴 것도 감사했습니다.
 
버지니아와 필라델피아, 뉴저지와 맨하탄를 오가며
지난해 아프리카에서의 비전케어 사역을 
함께 나누는 일이 이번 여정의 주된 목적이었습니다.
갤러리에 모인 숫자가 많든, 적든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며 김동해 이사장님이
이 사역의 의미를 이야기하고
설득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성격 탓인지, 나는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사역을 위해
사람이나 힘을 모으지 않는 편입니다.
오해받거나 설득하는 것도 부담스럽고
다수 보다는 소수가 기동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있다면
혼자 일을 해서 돈을 모으거나, 시간을 내서
도우려 애썼습니다.
 
“이렇게 한 사람씩 만나서 이야기하고
동역하는 게 더딘 것 같지만
이 과정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과 의미를 나누고,
그리고 이 시간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믿어요.”
 
분명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면
사람들을 만나서 설득하고 설득해서
더 많은 이들과 함께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만일 주님이 내게 주시는 음성이면
성격을 바꾸는게 쉽지 않겠지만
거기에 반응하겠다고 기도했습니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차 없으면 다니지 못할 곳이 미국입니다.
대학생에게 소중한 시간인 봄방학 동안 
내 곁에서 운전으로 통역으로 도와준 동생, 진유.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쳐준 고마운 시간이었어요.”
 
진유가 헤어지며 내게 해준 말입니다.
좋았던 시간이었다니 얼마나 고마운지요.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우리에게는 정답이 없습니다.
주님이 날마다 우리를 가르치길.. 
미국에서의 마지막 밤, 이 아이를 위해 기도합니다.
 
#미국동부 #아쉬운만남 #고마운시간 #주님의신호 #마음의방향

영원 앞에 오늘

나는 매일 밤, 예수님 꿈을 꾸고 싶다며
기도하고 잠이 듭니다.
 
10년 전에 잊지 못할 꿈 하나를 꾼 적 있습니다.
주님이 내게 소원이 있는지를 물었을 때
망설임 없이 주님을 보고 싶다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주님과 함께 
온 도시를 내려다보며 비행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내가 내려다본 불빛들의 반짝임은 아름다웠지만
영원하지 않았으며
영원하다 여긴 것은 주님의 품이었습니다.
다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을 기쁨이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으로
눈에 보이는 세상을 살아가려 하지만
자주 눈에 보이는 세상을
영원한 것처럼 착각하며 살게 됩니다.
 
영원의 시간앞에 오늘을 두게 되면
자칫 회의론자가 될수 있지만
그럼에도 내가 하는 고민과 갈등의
상당부분은 힘을 잃게 됩니다
영원의 시간앞에 오늘을 두게 되면
전혀 다른 고민과 갈등이 시작됩니다
 
그 고민과 갈등속에서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는 것은
결국 죽음으로 구분될 것입니다.
영원하지 않는 이 땅에서의 삶이
실제적인 것 같지만
막상 죽음 이후의 삶에서는
음부에서 부자가 간절히 원했던 바,
‘혀를 서늘하게 해줄 물 한 방울’이 
더 실제적으로 절실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눅 16:24)
 
부자와 나사로는 
죽음과 동시에 운명이 역전됩니다.
도울 수 있었지만 돕지 않았던 세계는
죽음 이후에는 
돕고 싶어도 도울 수 없는 세계로 구분됩니다.
음부에서 영원히 고통하는 부자와
천국에서 영원히 안식하는 나사로로 구분됩니다.
 
“만일 죽었던 사람이 가서 말한다면
그들은 회개할 것입니다.” (눅 16:30)
남은 가족들을 향한 부자의 간절한 요청을
성경은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비록 죽은 사람들 가운데
누가 살아난다 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눅 16:31)
 
기적으로 사람이 바뀌지 않습니다.
오늘 내게 필요한 것은
놀랄 만큼 특별한 기적이 아니라
영원 앞에 오늘을 살아갈 믿음과 말씀입니다.
 
 
#부자와나사로 #인생의역전 #영원한것과그렇지않은것 
#고민과갈등 #영원앞에오늘
#특별한기적이아니라 #오늘을살아갈믿음과말씀 #예수님꿈

작고 작은 겨자씨

어린 시절에 부모님은 일하시느라 늘 바쁘셨습니다.
그래서 집에는 늘 형과 나, 둘 뿐이었습니다.
장난기 가득했던 나와는 달리,
형은 늘 진지했고 무엇이든 열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던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학력고사 1번, 수능시험 3번을 포함해서
크고 작은 시험을 자그마치 23번이나 떨어졌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16살에
형은 하나님을 만나면서
비전에 대해 고민하다가 음악을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원했던 대학을 가지 못해서
휴학을 했다가 자퇴서도 내고
군악대를 지원해서 음악을 공부하며
군대에서 휴가까지 내서
레슨을 받으며 수능시험을 치렀습니다.
가까이서 보기에 안타까울 만큼
필사적이었고 치열한 싸움이었습니다.
제대하기 전에 또 시험을 치고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DTS를 받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했지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걸어가는 길에 대한 확신도 없었고
혼란과 회의 속에서 도와줄 사람도, 적절한 멘토도 없었습니다.
 
한참만에야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서
한동대에서 다시 신대원으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구비구비 돌아가는 자신의 시간을 보며
하나님께 묻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왜 그때 내버려 두셨습니까?
제가 물었을 때, 그때는
왜 명확하게 말씀해주지 않으셨나요?”
남들보다 많은 좌절을 경험하고, 
많이 혼란스러웠던 시간들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형이 청년사역을 처음 시작한 곳은 노량진이었습니다.
노량진에 가서야 그 답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치 앞도 모르는 청년들이 머물던 곳,
재수생은 물론이고 장수생으로 가득했던 그곳에서
진로에 대해 불투명한 청년들의 마음을
가장 잘  알수 있는 사람은 
시험을 가장 많이 떨어진 사람이었습니다.
 
청년사역 특성상 과도하게 무리를 해서
입원도 하고, 머리에 오백 원짜리 원형탈모가 생기기도 했지만
청년들의 변화는 놀라울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형은 32살에 결혼식 주례를 섰습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주례를 서는게 아니라고
내가 놀려대긴 했지만
청년들은 형이 목사 안수를 받을 때까지
결혼식 날짜를 늦추며 기다렸을 만큼
그들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형이 실패 가운데 만났던 고민은
비단 노량진에 있던 이들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고민인 것을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나름대로 진지하게 주님의 뜻을 구했지만
적절한 가이드를 해주는 사람 한 명 없었던 시간,
너무나 작고 작다고만 여겼던 시간들은
주님의 시간 속에서 다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마치 누군가 가져다 밭에 심은 
작고 작은 겨자씨와 같으니
 
그 씨가 자라서 나무가 되면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눅 13 :19)
 
 
#하나님의나라는_무엇과같을까? #겨자씨를생각하다 #형이생각났습니다 #이사무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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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지 않으면

“기도하지 않으면
망하게 해주세요.”
두려운 말이지만
아내와 가끔 꺼내어서
주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데도
아무 일도 없다면
우리는 우리가 잘나서 살아가는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섰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다면 아픔과 눈물을 통해
다시 주님께 무릎 꿇고 돌아갈 수 있는 것이 복입니다.
 
 
포도원 지기가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한 그루 심었습니다.
충분한 시간을 기다렸지만
그 나무는 아무 열매도 맺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포도원 지기는 나무를 베어버리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러자 종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해만 더 기다려 주세요.
그러면 둘레를 파고 거름도 주겠습니다.
열매를 맺도록 수고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열매 맺지 않으면
그때 베어버리세요.” (눅 13:6-9)
 
충분한 시간을 두고 
열매 맺기를 기다렸지만
아무 열매 맺지 않았기에
베어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열매 맺을 수 있도록 
시간과 수고를 더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은 있습니다.
그래도 열매 맺지 않으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 13:5)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과
공생애기간 내내 회개를 촉구했던 예수님 앞에
결국 이스라엘은 돌이키지 않았고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무너졌습니다.
 
“다른 모든 예루살렘 사람들보다
그들이 죄를 더 많이 지었다고 생각하느냐?” (눅13:4)
주님 앞에 똑같은 죄인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기도하지 않으면
망하게 해주세요.
 
 
#기도하지않으면 #회개하지않으면 #망하게해주세요 #너무늦지않게 #주님앞에열매맺기를 #포도원지기 #열매맺지못한무화과

기억하소서

교계와 교회에서
크고 작은 뉴스들이 쏟아졌을 때
그들이 만난 하나님은 거짓된 신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말한 글과 말을 떠올리면
거짓된 신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만난 은혜도 진짜고
그들이 만난 하나님도 맞지만
어쩌면 기억에 관한 문제는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만나주셨는지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지 잊은 것은 아닐까?
 
기억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노아의 때에 홍수가 가득할 때에
하나님은 방주에 있는 모든 이들을 ‘기억’하셔서 
물이 줄어들게 하셨으며 (창 9:15)
노아와 언약을 맺으실 때도
무지개를 보고 이 언약을 ‘기억’하셔서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창9:16,29)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실때도
아브라함을 ‘생각(자카르)’하셔서 롯을 구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실 때에도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하신 후 돌보십니다.
 
하나님이 사울 왕을 버리실 때
사무엘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삼상 15:17)
사울이 왕이 되기 전에 
그는 얼마나 신앙과 성품이 준수했는 사람인가요.
하지만 그가 어떤 존재였는지 
왕이 된 이후 잊어버렸습니다.
 
어떤 면에서 크고 작은 뉴스 속에
이슈들은 일반 사람들의 일상 속에
일어날 수 있는 범죄나 실수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유난히 분노하거나 실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여러 가지를 추론하지만
그중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게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다는 이유 입니다. (민 20:10-11)
모세의 기나긴 순종과 하나님을 향한 열심에 비해
지팡이로 반석을 친 사건은
얼마나 작고 사사로운 일인가요?
그런 이유로 가나안땅을 들어가지 못한다면
약속의 땅에 발 디딜 수 있는 사람은
이스라엘에서 몇 명이나 있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눅12:47-48)
 
예수님은 주인의 뜻을 아는 자를 말씀하십니다.
주인의 뜻을 아는 자라면
그 뜻을 아는 만큼의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온유와 소명이가 똑같은 잘못을 했지만
첫째가 조금 더 꾸지람을 듣는 이유는
같은 행동을 했더라도
첫째는 잘못된 행동인 것을 알고 있는 반면에
둘째는 첫째를 모방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의미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들에게
그만큼  많은 것을 요구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때문에 사사로울 수 있는 일에도
주님은 더 많은 책임을 묻게 될 것입니다.
 
과할 정도의 책임을 물으신다면
주님의 마음을 많이 알고 있는,
주님께 많이 맡은자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사울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시절처럼
다윗에게도 양을 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이새의 막내아들에게
기름부으신 하나님은 그가 왕이 되기까지
길고 긴 여정을 광야에 두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나를 구원하시는 이가 누구인지
그가 왕이 된 이후에도 기억하게 하시려는
주님의 사랑이 아니었을까
 
내게 광야의 시간이
필요한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것 같습니다.
 
 
#나는누구? #하나님은어떤분? #스스로를작게여길때 #하나님이기름부으셨다
#나의나된것은 #주님의은혜입니다 #많이맡은자에게 #많이찾을것입니다
#그래서더욱은혜를구합니다 #기억과잊혀짐 #자카르 #주님의구원열쇠
 
 
– 주제를 따라 쓴 탄탄한 글이 아닙니다.
매일의 큐티 본문을 묵상하며 쓴 일기를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다시 풀어쓴 글입니다.
 
가끔 반박하는 문자가 와서..
함께 주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정도로만 봐주세요. ^^

약속하신 하나님

청소년 시절에 수련회 가서 기도를 하다 보면
나만 빼고 다 은혜받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일이 매년 반복되고, 나이를 먹게 되면서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기다림이 클수록 사랑이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우리 마음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 말씀에 순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힘의 논리를 따라 
흘러가는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남들을 따라 살아갈 수는 있지만
말씀에 순종하게 되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 두려움 앞에서
과연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고민했습니다.
행복한 인생, 그 자체는 목적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배제하고라도
인생은 그런 말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질문과 두려움 앞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약속은 성취를 전제하고 있는 말입니다.
 
약속위에 우리 인생을 하나 둘
올려놓으면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두려움과 맞닥뜨릴 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주님은 당신의 약속을 하나, 둘 말씀하십니다.
 
“너를 돌보는 것은
너 자신이 아니라 내가 되어야 해.
네가 먼저 구해야 할 것은 나의 나라란다.” (눅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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