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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풍경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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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후된 외국을 나가보면 
비로소 이른 밤을 알게 됩니다.

해가 지기 전에 
마을에 머무르던지, 
숙소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로는 
집으로 돌아오기 힘들 정도로
칠흑 같은 어둠이 세상을 덮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삶을 알게 됩니다.
거칠고 노곤한 육체는 
밤을 통해 쉼을 얻습니다.

단순하다는 말이 거칠고 험하거나
피곤하다는 말의 언저리에 있는 말은 아닙니다.
단순하다는 말은 
나를 취하게 하는 것을 털어내고,
주님과 만나는 접촉면의 불순물을 
정돈한다는 의미와 가깝습니다.

한국으로, 일상으로 돌아오는 순간
풍요로움이 나를 안습니다.
온갖 단순하지 않는 요소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방해합니다.
선교지에서 만난 이들과 
오랜만에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면
그때가 좋았다고 입을 모읍니다.

불편한 잠자리와 이동 수단, 
느린 인터넷 속도,
오후 5시면 문을 닫는 상점들..
도대체 거기가 더 좋을게 뭐란 말인가요?
더 좋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주님과의 친밀함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신 풍요로움이 
오히려 내 눈을 멀게 할까 
내 마음을 조심스레 살펴봅니다. 

[노래하는 풍경 #7]

 

 

보이지 않아도 두 아이가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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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밖에 못 해요?”

개구쟁이 성진이가 도발하며 내게 공을 뻥 찹니다.

질 수 없다며 골목 저 너머까지 나도 뻥하고 공을 찹니다.

골목길에서 삼십 분이 넘게 같은 동작을 반복하지만

성진이(9세)와 사랑이(8세)는 지칠 줄도, 지겨워할 줄도 모릅니다.

함께 땀내며 놀아줄 어른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파옵니다.

이제 헤어져야 하는 시간을 직감한 성진이가 말합니다.

“우리 집에서 라면 먹고 가면 안돼요?”

어느새 애교 많은 사랑이도 팔에 매달려 조릅니다.

“우리 라면 같이 먹어요.”

다음 기회를 약속하는 나를 보며 아쉬워한 아이들의 모습에

안타까움이 올라옵니다.

(111)

성진이와 사랑이 엄마는 눈이 아픕니다.
처음부터 눈이 안 보였던 것은 아닙니다.

희미하게나마 형체를 알아보던 적도 있습니다.

빛과 어둠이나마 구별할 수 있던 적도 있습니다.

각막이식과 망막 수술 그 외에 여러 수술을 열 번이나 견뎌 낸 눈이었지만

2010년 이후 볼 수 있는 것은 어둠뿐입니다.

“비켜주세요. 비켜주세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나칠 때마다 성진이는 용감하게 외칩니다.

말썽을 피우는 성진이 때문에 엄마는 속이 상하다가도

손을 잡고 길을 인도해 주는 성진이가 있어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때 사랑이만 지웠어도…”

돌아가신 엄마는 사랑이를 볼 때마다 속상해하셨습니다.

사랑이를 임신하면서 좋지 않던 엄마의 눈이 더 나빠졌습니다.

임신 5개월 째, 눈의 망막이 다시 떨어졌습니다.

병원에서는 전신마취 수술을 해야 한다며 낙태를 권유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엄마는 뱃속의 사랑이를 안고 다른 병원을 찾아다녔습니다.

부분 마취로 수술을 해보자는 병원을 만나
엄마는 다행히 사랑이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115)

엄마의 발톱이 길게 자라면 성진이와 사랑이는 다툽니다.

“내가 엄마 발톱 깎아 줄 거야.”

“아니야. 내가 엄마 발톱 깎아 줄 거야!”
아이들이 발톱을 깎아 주는 행복한 엄마가 세상에 또 있을까요.

성진이와 사랑이는 엄마에게 가장 소중한 보물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눈이기에

엄마 혼자 성진이와 사랑이를 키우는 일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남편도 집을 떠나가 버리고
친정엄마까지 갑작스레 돌아가셨을 때는

막막함 뿐이었습니다.

다행히 여러 곳에서 도와주신 덕분에

성진이네는 이제껏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지현씨의 집에서 성진이와 사랑이

혹여나 눈 상태가 좋아져

다시 수술하고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될지

엄마는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진이와 사랑이가 곁에 있기에

엄마는 오늘도 웃을 수 있습니다.

글 이요셉, 이음  사진 이요셉

내가 노래하는 풍경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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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닮고 싶다는 메일을 받았다.
사람들은 내가 가진 전체 중 극히 일부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나는 그들에게 외식(外飾)자이다.
그들은 나를 알지 못한다.

내 가장 가까이 있는 아내, 아이들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지?
만일 모두가 나를 부정(否定)해도
가장 가까운 한 사람이 긍정(肯定)한다면
나는 다행스러운 길을 걷고 있다.

[내가 노래하는 풍경 #6]

내가 노래하는 풍경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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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나의 첫 변화는 쉼이었다.
지독한 일 중독자였던 때문에
내가 쉴 수 있는 명분, 혹은 주님의 말씀이 필요했다.

안식은 주님의 명령이다.

그것은 쉼이 재생산을 위한 휴식이라는
실용적인 관점을 뛰어넘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식은 영혼의 날인 동시에 육체의 날이기도 하다.

아브라함 헤셸은 <안식>에서
성경에서 ‘거룩함’이란 뜻을 지난 ‘카도쉬’라는 단어를 가지고
안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세계의 역사에서 최초의 거룩한 대상은
창세기에서 창조 이야기가 끝나는 대목에서 처음 발견된다.
바로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것이다.
혜셸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공간이 없는 시간을 소유할 수는 있지만
시간이 없는 공간은 소유할 수 없다.
사람은 공간을 넘어서지만, 시간은 사람을 넘어선다.
시간이 창조의 과정이라면, 공간의 사물들은 창조의 결과물 일 뿐이기 때문이다.

유진피터슨은 이렇게 말한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을 도리가 없구나.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안식일을 지켜야겠구나.’

율법주의로의 회귀가 아니라
주님의 날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시간 속의 거룩함을 생각하다 보면
마치 이 하루의 전체가 빛으로 둘러싸인 것 같단 생각을 하게 된다.

직선운동으로의 우선순위로써 주님과의 만남 이후,
별개의 나머지 일들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나선운동으로 주님은 모든 일의 중심에 서로 이어져 맞닿아 계신다.
마치 모빌에서 많은 이음새들이 그 중심축을 중심으로 조화롭게 움직이는 것처럼..

[내가 노래하는 풍경 #5]

내가 노래하는 풍경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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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헤브론 왕을 거쳐 이스라엘 왕이 된다.
여부스족의 난공불락 예루살렘 요새까지 정복했다.
모든 일을 정리하고 난 후,
그가 한 일은 법궤를 옮기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웃사가 죽게 되었고
그 마음에는 두려움이 가득하게 되었다.
과연 내가 하는 일이 옳은가?
하나님이 내게 기름 부으셨지만
사울 왕처럼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닌가?
하나님이 나를 왕으로 삼으신 일을 후회하고 계신 걸까?
하나님이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그에게 등을 돌리는 것 또한 한순간이다.
하지만 웃사가 죽고, 법궤를 머물게 한
오벧에돔의 집은 복을 받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삼하 6:11)

문제는 어디에서 잘못되었는가?
지난 잘못에 대해 회개하고
주님의 법도를 따르면 된다.
다윗은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법궤를 옮기는 방식을 버렸다.
그것은 실용적이고, 효율적이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방식을 따라
다시 법궤를 옮겼다.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니” (대상15:13)

그는 다시 주님 안에 기뻐 춤추었다.
미갈의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했다. (삼하6:21)

[내가 노래하는 풍경 #4]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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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이 불빛들이 반짝거리는 게 마치 별 같아.
너무 아름다운 것 같아.
전에는 몰랐는데,
이렇게 예쁜 반짝거림은
눈이 내린 후에만 볼 수 있는 줄 알았어.

가끔 불을 피울 때도 오빠가 피우고,
불이 꺼질 때도 마지막까지 있어보지 않아서 몰랐는데
불이 다 꺼져갈 때
이렇게 아름답게 반짝거리는 줄은 몰랐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별처럼 그렇게 반짝거리는 게 너무 신기해.

불이면 다 같은 줄 알았는데,
다 아는 줄 알았는데,
경험해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구나.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는 것이 있구나.”

어느 나라에서,
선교사님이 그날의 일정이 다 마쳤는데
늦은 밤에 불러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헤드라이트를 의지해서 비포장도로를 달렸습니다.
인적이 드문 어느 장소에서
차에서 내렸습니다.
사람도, 건물도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차 시동을 끄고
선교사님이 가리키는 곳으로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하늘로 향했더니

아.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은하수.
진작 알았다면 삼각대라도 챙겼을 것을.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해
쏟아지는 별빛들을
내 눈에, 내 마음에 가득 담았습니다.
늘 하늘에 존재했지만
결핍이 있어야만 보이나 봅니다.
전기가 없고, 불빛이 없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빛은 찬란하게 반짝거렸습니다.

아내는 그런 반짝거림을
눈이 내린 날 경험했었나 봅니다.
가끔 옥상에서 불을 피우곤 합니다.
어제는 교회서 예배를 드린 후,  아내가 불을 피웠습니다.
장작 사이에 고구마를 구워 먹기로 했습니다.
장작을 구해다가 쌓아 놓았다가 야단맞았는데
막상 피워보니 아내도 좋았나 봅니다.
다행입니다. 
별빛들이, 불빛들이 아름답습니다.

내가 노래하는 풍경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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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내가 할 몫은 어디까지인가?
중학교 때, 예수님이 기뻐하실 일을 한다고
온 길거리를 쏘다니며 쓰레기를 주웠다.
그렇게 몇 시간을 보내다가
나는 과연 이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할지
좋은 의도로 시작했지만 갈수록 지쳐만 갔고
나는 밑을 알 수 없는 구덩이에 빠진 기분이었다.

성경은 내게 끝없는 숙제와 같았다.
한 예로 예수님은 ‘가장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가장 작은 자는 누구이며,
그런 사람은 세상에 너무나 많은데
마치 온 길거리의 쓰레기만큼이나 많은데
도대체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그래서 나는 순종하는 것이 두려웠다.
시작했다가 중간에 발을 떼는 것보다는
아애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서다.

그런데, 숲에 잘려 나간 나무를 보며, 살아가며 알게 되었다.
완전히 깨끗한 절단면이란 것은 없다.
나는 내가 사진을 찍으며
사랑의 대상으로서 사진을 찍는지,
기록의 대상으로 사진을 찍는지,
고민하는 한 달 간 사진 한 장을 못 찍을 만큼 심각해졌다.
하지만 한 달이 되던 날,
집 근처 흐르는 개천을 사진으로 찍은 후
마법의 봉인이 풀린 것처럼 다시 사진을 찍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깨닫게 되었다.
어떤 명확한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답 보다 중요한 질문이 있다. 라는 것을.
너무 많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문제 있는 인생이 문제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문제없는 인생이 문제이다.
고민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문제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고민과 문제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내 안에는 주님을 향한 순수한 열망뿐 아니라
수많은 욕망과 절망, 삶의 질척거림이 한데 얽혀 있다.

인생에 깨끗한 절단면이란 것은 없다.
완전히 깨끗한 사람도 없고,
완전히 절망인 사람도 없다.
그래서 완전한 기대도, 완전한 정죄도 있어서는 안된다.
오직 주님만이 완전하시다.

[내가 노래하는 풍경 #3]

내가 노래하는 풍경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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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두렵게 하는 수만 가지 두려움이나
내가 겪은 어떤 큰 고통도
나를 완전히 죽이지 못 했다.
오히려 그 시간은 나를 단련시켰다.

내가 아는 한,
가장 큰 고통을 경험한 욥조차도
고통으로 인한 파멸이 완전한 파멸을 의미하지 않았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욥의 고백처럼
나의 가는 길은 오직 주님이 아신다.
내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나를 두렵거나 고통하게 하지만,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신다는 사실은
고통 가운데서도 얼마나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지 모른다.

[내가 노래하는 풍경 #2]

내가 노래하는 풍경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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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있는 시간을 어떻게 경영하느냐에 따라
내 마음의 여정(旅程)이 조성된다.

다윗은 이름 없는 막내에 불과했지만
선지자 사무엘에게 기름부음 받았다.
하지만 왕이 되기까지는 13-14년의 시간이 걸렸다.

수많은 환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한 번도 놓치지 않으셨다.
사울에 비해 다윗은 형편없는 스펙을 가졌지만
그는 지속적으로 마음을 조성했고
하나님은 그를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부르셨다.

[내가 노래하는 풍경 _ #1]

소설가 이승우는 <식물들의 사생활>에서
나무들은 구도자처럼 하늘만 우러르며 고요하게 서있지만
그 내면에서 들끓고 있는 욕망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의 글 앞에 얼마나 많은 울음을 쏟아야 했는지 모릅니다.
천만 개의 욕망의 뿌리들 속에서
하나님이 내 마음에 던지시는 선언적인 메세지들이 있습니다.

내 일기장에는 여러 제목들이 붙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내가 노래하는 풍경’입니다.

길을 걷다가
‘나는 이렇게 걸어야 하겠다.’
문득문득 내 마음에 적어 놓은 말입니다.
자신에게 한 말이라 친절한 것도, 완전한 문장도 아닙니다.
벌써 작년부터 구식 타자기를 사다가,
이 말들을 타공하여 내 마음에 새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일 년이 지나도록 타자기가 마련되진 않았지만
나는 여전히 길을 걸으며 걸어야 할 방향을 의심하며 문장을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이 공간(내가 노래하는 풍경)은 내 마음이 서성이는 지도입니다.

살아남은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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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이 함께 예배드렸습니다.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막7:5-8)
온유에게 이 말을 설명해주었습니다.

우리가 입술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마음이 다른 곳에 가있다면,
예수님보다 초컬릿, 사탕, 장난감 같은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한다면,
그것은 외식하는 것과 같습니다.
외식하는 것은 마치 연극에서
가면을 쓰고 다른 사람으로 연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함께 드린 예배는 계속 있었지만
어제의 예배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이유는
처음으로 온유가 주도해서 기도제목들을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위해서도 기도하자는 말에
궁금해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천국에서 외할아버지가 잘 기다리고 계시라고
우리가 나중에 할아버지 만나러 갈테니까
거기서 잘 기다리고 계시라고 기도하고 싶어서.”

장인어른은 아내가 고등학교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물론이고, 저도 얼굴을 뵙지 못했습니다.
온유가 내놓은 기도제목이 참 따뜻하다는 생각에
그 기도도 함께 드렸습니다.

예배를 마무리하는 대표기도도 온유가 맡았습니다.

“우리 가족들을 지켜주시고
우리 가족들이 병이나
나쁜 질병에 걸리지 않게 해주시고

하나님만 사랑하게 해주시고
소명이도 기도하게 해주세요.

우리 가족들이
말과 행동이 하나님께로만 가게해주세요.
하나님만 사랑하게 해주세요.

교회서도 장난치지 않고
하나님만 찬양하고

우상한테 절하는 사람은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주시고
추석때 우상에게 절하는 사람들
하나님한테 절하게 해주시고
하나님께만 기도하게 해주세요.

내 생각과 내 마음과
우리 가족들 생각과 마음을
지켜주시고
마음이 초컬릿, 사탕, 장난감으로 가지않고
하나님쪽으로 가게 해주세요.”


요즘 계속 묵상하는 에스겔 말씀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말씀하십니다.
네번에 걸친 심판에 대한 말씀속에서(겔14)
크게 주목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의인으로 대표되는 노아, 다니엘, 욥도 심판을 막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아들이나 딸들도 구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자신에 대한 심판 뿐 아니라
자녀와 다음 세대에 대한 마음에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결국 자녀들을 심판 가운데 건져낼 수 있는 것은
자녀들 스스로가 주님을 바라보도록 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심판들이 전혀 비인격적이지 않은 이유는
살아남을 이들과, 심판 받을 이들 모두
그들의 행위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겔14:22)

이 말은 두렵지만, 감사한 말씀입니다.
살아남은 이들..
주님을 여전히 바라보는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들,
그들을 통해 주님을 바라보는 또 다른 사람들은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보라 구원받을 몇몇 아들들과 딸들이 그 안에 살아남을 것이다.
너희가 그들의 행동과 행위를 보면
모든 재앙에 대해 너희가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겔14:22-23)

매일 토닥거리고, 아이들을 위로하고 혼내고 다시 품어주는
일상의 반복을 통해
정말 바라는 것 한가지는
이 아이들 스스로 주님 앞에 서는 날입니다.
세상속에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사람들은 어리석다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 발 앞에서 우린 서로가 서로를 통해 위로와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p.s 아프리카 잘 다녀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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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묵상글을 써두고 떠납니다.
<노래하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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