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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노래하는 풍경 #105

사람의 본질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혹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나는 더더욱 그러하다.

겸손한 것은 무엇인가?
양보를 하고 허리를 굽히기나, 손사래를 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은혜를 구하는 자가 겸손한 자이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죽을 수밖에 없기에
날마다 당신의 은혜를 구하는 자,
하나님은 당신의 얼굴을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거두지 않으신다.

[내가 노래하는 풍경 #105]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두려워했다.
다른 표적들은 그렇다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죽은 이를
살리기까지?한 것이다.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믿게 될 것이고,
그들이 예상하는 다음 행동은
사람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있는 정권을
뒤엎을 일밖에 남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그것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로마군대를 부르는
위험한 행동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가야바는 이 한 사람, 예수를 죽임으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이제 누구든지
예수를 붙잡으려고 예수께서 계신 곳을 알면
자기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요11:57)
이제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다.
예수님은 광야 가까이에 있는 에브라임이라는 마을로 피하셨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자.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분이 유월절에 오시지 않겠소?” (요11:56)
이 팽팽한 긴장의 끝에 과연 예수님이 나타나실까?
예수님은 마땅히 그렇게 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분은 대제사장 가야바가
자신도 알지 못한채 말한 예언처럼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 민족과 이후 모든 시대,
전 세계의 그를 믿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유월절 대속의 죽음을 위한 어린양이 되셔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오시면 당신은 사람들에게 붙잡히게 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분은 피하지 않으신다.
선한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기 때문이다.
에브라임에서 안전한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하나님의 때에 자신을 드린다.
그 분은 내게 선한목자이다.
나의 구원을 위해 당신은 피흘림과 죽음을 피하지 않는다.
그 분은 나를 위한 모든 것을 하셨으며,
내게 가장 적합한 때를 알고 계신 분이시다.
나는 오늘 무엇을 두려워 하고 있는가?

내가 노래하는 풍경 #104

당신의 골방은 어디인가요?

이 질문에 답을 준비해야 한다.
기도 없이 답을 준비해서는 안된다.
기도 없이 변명해서도 안된다.
살면서, 걸어가면서 기도하는 것은 아주 기본일 뿐이다.
그것은 내가 살아가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체력이다.

“당신의 밀애의 장소가 어디인가요? ”
주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그 고백만을 위한 시간과 장소가 필요하다.
그분은 내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내 연인, 내 신랑이기 때문이다.

[내가 노래하는 풍경 #104]

러시아

대학을 다닐 때
학교 앞에 작은 예배당이 하나 있었습니다.
장의자 서너개가 놓여 있었을 뿐인
아주 작은 교회였습니다.

당시 나는 아주 작은 고시원에서 생활했습니다.
작은 책상 하나가 고작인 내 방에서는
아무 소리도 낼 수가 없어서
그보다 큰, 아주 작은 교회에서 기도했습니다.

내 기도는 몇 문장이 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하고 싶은 일을
이 기도를 통해 이루어 주세요.
하지만 주님, 이런 나를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사용할 수 있다면 사용해주세요.”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로 십 여년의 시간이 지나서
나는 자주 그때의 기도를 생각합니다.
지금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지만
그래서 하나, 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기면
거절하지 않고 그 일을 하려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그 한 가지가 내겐 놀라운 감사의 제목입니다.

사람들은 작다 여길 수 있지만
주님이 주신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내게 작지 않습니다.

러시아를 다녀옵니다.
주님 앞에 여전히 작고 부족한 자이지만
주님이 하고 싶은 일을 이루어 주세요.
여전히 부족하고 허물많지만
내가 말하는 것처럼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주시는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내가 노래하는 풍경 #103

크고, 화려한, 유명한 것은 하나 없지만
이 땅과, 이 우주의 주인이신 내 아버지가 웃으시면
나도 따라 웃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곳에도 가득하기를 바라며..

[내가 노래하는 풍경 #103]

믿음의 도약

얼마간 고민한 것 하나는,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사람들과 상황을 통해, 또는 여러 기도를 통해
당신의 뜻을 나누어 주시지만,
실제로 그 일의 성취를 보는 것은 드물다는 것이다.
수많은 방해요소와 장애물들을 보며,
현실의 벽이 높기 때문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만일 그렇다면 주님은 방해요소들보다 약하신 분이신가?
동료들과 그것을 두고 기도했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더 나아가지 않게 하시되,
그게 아니라면 나는 과정뿐 아니라 최종적인 결과도 보고 싶습니다.
그 결과가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면
나는 그것을 보고 ‘우리 주님이 이렇게 아름답게 일하셨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주셨다.
가나안 땅을 밟기도 전에,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이미 주셨음을 말씀하셨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 땅을 정복한 것은 불완전해 보인다.
하나님은 주셨는데, 사람들이 가진 것은 부분적이다.
우리의 현실과 너무 맞닿아 있다.
하지만 갈렙이 속한 유다가 정복한 땅은
다른 모든 땅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복하기 매우 어려운 땅이었다.
갈렙의 나이가 85세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성경은 그 성읍을 크고 견고하며
아낙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14:11-15)
하지만, 이 노인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다. 라고 말하고
그 땅을 차지하게 된다.
성경은 그 땅을 차지한 이유를 힘이 강하거나, 적군이 약해서가 아니라
‘그가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기 때문’이라 말하고 있다. (수14:14)
이렇게 가장 정복하기 힘든 지역을 정복했음에도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파들은 가나안을 부분적으로 정복했다.
그들은 정복해서 없애버리느니 노예로 삼아 수익을 얻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삿1:28)
가나안의 전쟁 방식을 답습하므로
도리어 이스라엘이 가나안이 되고 말았다.
결국 하나님의 뜻이 좌절되었다기보다는
주님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인간의 불신앙때문에 실패하게 되었다.
적어도 가나안과의 전쟁에서
그들이 승리한 이유는 예배와 순종의 방법이었다.
나는 그것을 기도했다.
우릴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 과정 중에 있는 우리가 주님 앞에 잘 준비되어 서길 원합니다.
절망하고 낙심해 있는 우리 앞에
주님이 말씀의 검을 휘두르시자
보이지 않는 말씀의 검은
보이는 어둡고 답답한 현실들을 쪼개어 놓았다.
흔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길은
막힘없이 이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 속에 평탄한 대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드문드문 발 디딜 곳이 놓여있어서 걷기에 불안해 보일 때가 많다.
하지만 그 길은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어서
믿음의 도약(跳躍)이 필요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으로 눈에 보이는 두려움을 뛰어넘을 도약 말이다.

내가 노래하는 풍경 #102

작업속에 살고 있을 때,
나는 내가 찍고 있는 사진을 통해 하나님의 기쁨이 되길 소원했다.
정말 그것을 원하고, 또 원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게 알게 하셨다.
사진이라는 틀 속에 하나님을 제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전 존재를 통해 하나님의 통로가 되게 하는 것.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깨닫게 하셨다.

[내가 노래하는 풍경 #102]

내가 노래하는 풍경 #101

지방에서 도예의 대가를 만났다.
그의 작업에 대한 집요함을 보며, 몇 년 전 시간들이 떠올랐다.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나도 작업에만 몰두한 적이 있었다.
내 작업의 기초는 가장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
가장 작은 누군가를 사진으로 찍어내는 것이
곧 예수님을 찍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매일을 수고했다.
작업 속에서 살았던 것 같다.
스스로에게 명절도 반납해가며 집요하게 작업해 나갔다.
물론 그 시간은 나의 기초를 쌓아주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멈춘 듯, 서있는 듯 보였던 시간에도
나는 여전히 충성했다.
도예가는 자아 성취를 위해 살고 있었지만
나의 성취는 작업의 성취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작업에 전혀 진척이 없었지만
나는 작업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내 목적이 있었다.
나의 성취는 하나님의 기쁨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쁨은 내가 무언가를 이루는 데 있지 않다.
하나님의 기쁨은 나의 존재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노래하는 풍경 #101]

내가 노래하는 풍경 #100

하나님이 내 인생을 그려나가신 일들을 생각했다.
비록 유치한 경우도 여럿 있었지만 그때마다
당시의 나로써는 절박했고,
그 속에서 믿음으로 그것을 결정해 나갔다.

그저 젊은 날의 호기였던가?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이제 아내와 아이들을 책임지는
가장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생활에 대한 염려에 우선해서
내가 두려워할 분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나귀를 풀어
‘주가 쓰시겠다.’ 하라.
어리석어 보이는 듯 보이는 걸음 속에
주님도 유치해서 함께 웃으시겠지만.

하나님은 분명 나의 진정성,
깊고도 숨어 있는 동기를 보신다.
내가 연기력이 뛰어나다면
하나님 앞에 연극이라도 펼쳐 보이겠지만
나는 그렇지 못 해서, 그럴 수 없어서
하나님 앞에 솔직할 수밖에 없어야 한다.

[내가 노래하는 풍경 #100]

내가 노래하는 풍경 #99

 

가슴에 작은 멍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슬픔이었다.내 슬픔이야 훌훌 털면 되지만,
내 슬픔이 아닐 때
그것이 바로 중보기도를 위한 무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노래하는 풍경 #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