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노래하는 풍경 #95

“흰 캔버스가 필요하니?
지금껏 그린 인생의 그림을 다 지우고
새로운 하얀 캔버스 하나가 필요하지 않니?”

“예, 정말로 새하얀 캔버스위에 내 인생을 그렸으면 좋겠어요.”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은 능력 있단다.
네가 이전의 모든 죄를 십자가 앞에 회개하고,
그 보혈로 너를 덮을 때,
너가 이성적으로 동의하지 못할지라도 너는 완전한 의인이 된단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쏟아야 할 모든 진노를 아들이 대신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것을 믿음으로 취하면, 그것은 하얀 흰 캔버스란다.
그래서 회개는 축복이란다.
보혈의 능력을 믿는 만큼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 수가 있는 거란다..”

[내가 노래하는 풍경 #95]

내가 노래하는 풍경 #94

내가 손을 내밀 때 주님은 내 손을 맞잡으신다.
그분이 내 사랑을 기뻐 받으신다.
주님의 존재감을 진정 인정한다면
우리 모인 곳에 강하게 임재하는 것을
믿음으로 취하는 것이다.
하늘을 보좌 삼으시고 땅을 발판 삼으시는 권능의 주께서
지금 내 앞에 친밀한 아버지로 와 계시다는 것이다.
이게 믿어지는가?
찬양, 찬양 받기 합당하신 주님.

[내가 노래하는 풍경 #94]

 

 

내가 노래하는 풍경 #93

아버지의 인자하심이 날마다 새롭다.
주님이 나를 사용하시게 하기 위해
나는 날마다 나를 쳐 그분의
기쁘신 통로가 되길 소망한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아버지의 임재가
내가 사는 생(生) 동안 늘 함께 하길 기도합니다.
깊은 밤. 꿈속에서도 당신과 노니며
그 사랑 가운데 잠기길 원해요..
사랑합니다. 나의 신랑 되신 주님..

[내가 노래하는 풍경 #93]

내가 노래하는 풍경 #92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고후 11:30)
미련해 보이는 걸음을 하나님이 인도해 내셨듯
조건과 환경으로 내 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길을 가라 하시면 그 걸음을 걷는 것이다.

마치 송아지를 집에 가두고
젖 나는 암소로 길을 가게 했을 때
본성을 따라 송아지에게 가지 않고
울면서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뜻하신 곳으로 향했던 것처럼.. (삼상 6:12)
큰 민족을 약속한 아브라함에게
그 언약을 이루는 주체가 이삭인지 하나님 때문인지를 시험하여
가장 사랑하는 그것을 택한 그때처럼 (창 22:12)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2)
내가 결단하는 이때가 바로 그날이다..

 

[내가 노래하는 풍경 #92]

내가 노래하는 풍경 #91

사단의 영향은 내가 죽기 전까지만 속한다.
왜냐하면 피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한다.” (레17:11)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므로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5:14)

사망 권세는 주의 보혈 앞에
더 이상 나를 소유할 수 없다.
이제 내 안에 오직 그리스도만이
드러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노라” (고후 5:17)

[내가 노래하는 풍경 #91]

내가 노래하는 풍경 #90

나는 너무나 부끄럽다.
나의 부끄러움은 나 스스로가 가장 잘 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애써 끄집어 내지 않아도
몇 개를 추스린 것으로도 한강에 뛰어내려야 할 정도로
나는 죄악으로 가득하다.
하나님의 기쁘신 아들이 되고 싶지만 스스로에게도 늘 부끄럽다.
하지만 나는 담대히 주님 앞에 나아간다.

언젠가 부끄러움으로 보좌앞에 나아갔을 때
아버지는 웃으시며 내게 말했다.
“너는 나의 재롱둥이야.”
피식 웃게 만드는 그의 격려 때문에
나는 가끔 하늘을 보며 웃는 습관이 생겼다.

 

[내가 노래하는 풍경 #90]

내가 노래하는 풍경 #89

다윗은 친구 요나단과의 약속을 쫓아
그의 아들 므비보셋을 왕의 상에 앉혔다.
다리를 저는 그가 어떻게 왕의 식탁에 앉을 자격이 될 수 있을까?
다윗과 요나단과의 언약은 사는 날 동안에만 유효하지 않았다.
므비보셋은 그 은혜를 잘 알았기에
자신을 ‘죽은 개’라고 표현했다.
내가 무엇이기에. 죽은 개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삼하9:8

세월이 흘러 다윗이 범죄하고, 죄의 결과로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게 되었다.
다윗이 급히 도망할 때, 므비보셋의 종 시바는 그를 모합했다.
다윗은 시바에게 므비보셋의 모든 재산을 넘겨 주었다.
후에 압살롬의 반역이 실패하고, 다윗이 귀환했을 때
므비보셋은 자신의 진정을 보였다.
왕이 떠난 날부터 돌아오는 날까지
그는 자신의 발을 닦지 않았고, 그의 수염도 깍지 않았으며 옷을 빨지도 않았다.
다윗은 시바에게 넘겨준 므비보셋의 재산을 반으로 나누길 명했다.

그 때 므비보셋의 고백은.. 정말 감동적이다.
“내 주 왕께서 평안히 왕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그(시바)로 그(자신의 재산)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삼하19:30

므비보셋.
은혜 입은 자의 마음은,
자신의 재산 분배에 있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직 왕에게 향해 있었다.

[내가 노래하는 풍경 #89]

내가 노래하는 풍경 #88

나니아연대기에서
주인공들은 코 앞에 있는 적을 상대하기 위해
본부를 지킬 것인지, 선공할 것인지를 두고 다투었다.
여기서 죽을 것인지, 그곳에서 죽을 것인지를 고민하지만
결코 아슬란을 찾으려 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아슬란은 유다의 사자이신 예수님을 상징한다.)
가장 어린 루시는 당돌하게 다른 사람들을 일깨운다.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더이상 할 수 없는데 왜 아슬란을 찾지 않느냐고.’

하지만 사람들에게 아슬란은 예전에 우리를 도와주신 분. 정도이다.
기억의 저편에 관념적인 분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아슬란의 존재자체를 의심하기 까지한다.
누구를 위해 싸워야 하는가?

결국 그들은 마지막 격전지에서 적들을 향해 달려가며 ‘아슬란을 위해서’ 를 외쳤다.
그렇게 흘린 피와 희생들은 아슬란을 위할 때 그제야 의미를 찾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슬란은 너무나 순식간에 전쟁을 제패해 버렸다.
아슬란을 찾은 나의 삶과 그렇지 못한 나의 삶.
이 영화는 우리 삶과 너무나 닮아있다.

[내가 노래하는 풍경 #88]

내가 노래하는 풍경 #87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믿는다.
만일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다윗처럼 기름 부으셨다면
아래의 말씀이 지금 시대에도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내가 안고 기도하는 사람을 일으키겠다는 감동에 순종해서
강남역 누군가에게 다가가 기도한것 처럼..
하늘에서 묶이고 풀린 것이

이 땅 가운데 묶이고 풀릴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선포하는 것이다.
눈으로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말씀하셨기에 믿는 것이다.

믿음은 단순하다. 단순하지만 쉽지가 않다.
하나님 내게 믿음을 주세요.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내어 나의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도다
내 손이 그와 함께 하여 견고하게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
원수가 그에게서 강탈하지 못하며 악한 자가 그를 곤고하게 못하리로다
내가 그의 앞에서 그 대적들을 박멸하며 그를 미워하는 자들을 치려니와
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그와 함께 하리니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의 뿔이 높아지리로다
내가 또 그의 손을 바다 위에 놓으며 오른손을 강들 위에 놓으리니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내가 또 그를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
그를 위하여 나의 인자함을 영원히 지키고 그와 맺은 나의 언약을 굳게 세우며
또 그의 후손을 영구하게 하여 그의 왕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
만일 그의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하지 아니하며
내 율례를 깨뜨리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는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
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 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말을 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의 후손이 장구하고 그의 왕위는 해 같이 내 앞에 항상 있으며
또 궁창의 확실한 증인인 달 같이 영원히 견고하게 되리라 하셨도다

(시 89:20-37)

[내가 노래하는 풍경 #87]

내가 노래하는 풍경 #86

둘러싼 환경을 뛰어넘어
그분을 바라보고 기뻐하기를.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나안 거민 너머의 하나님을 바라보았듯,
왕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 하는 골리앗 너머에 있는 하나님을
다윗이 바라보았듯.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살아 있는 것이 다 산 것이 아니라고,

[내가 노래하는 풍경 #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