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노래하는 풍경 #132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눅24:49)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몰라서 우왕좌왕하는 것보다
“이 성에 머물라.”
이렇게 알기 쉽게 말씀하시면 쉬울 것 같다.
하지만 언제까지라는 시기는 없다.

지금부터 열 흘 뒤에 내가 약속한 성령이 임할 것이다.
또는 적어도 몇 월 며칠까지는 이 성에 머물러라.
이렇게 말씀하실 수는 없는 것일까?
하나님은 우리의 인내심의 한계를 건드리신다.
아애 그 한계를 버리길 원하신다.
왜냐하면 값 주고 사신 내겐 그 시간마저도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노래하는 풍경 #132]

내가 노래하는 풍경 #131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진하는 모양으로
내 삶이 흘러갈 수 있기를 바랐다.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행진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며 (민9:17)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고
그 명령을 따라 진을 쳤으며 (민9:18)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오랠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행진하지 아니하였다. (민9:19)

이후 계속되는 절에서
그들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움직였는데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영에 머물고 행진하지 않다가 떠오르면 행진했다. (민 9:22)

지금의 급박한 지식 정보 시대에 과연 이 말씀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주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낭비처럼 들릴까?
내 안에 계신 주님,
날마다 말씀해주세요.
인도해주세요.

[내가 노래하는 풍경 #131]

내가 노래하는 풍경 #130

변질되고, 불평하던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하게 된다.
에스겔은 그들에게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놀라웠다.
놀라는 것은 독자일 뿐, 당사자들은 너무나 느긋하다.

“날이 더디고 모든 묵시가 사라지리라.
에스겔이 보는 환상과 예언은 먼 훗날에나 이루어질 것이다.” (겔 12:22)

구약 선지자였던 아모스가 이스라엘의 패망을 예언했고, 그 예언은
30년 뒤에 이루어 졌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지 벌써 170여년이 흘렀다.

언젠가는 이런 일들이 생기겠지만, 결코 자신의 시대에
하나님의 날이 도래할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예언은 앞으로 5년 뒤에 성취되었다.
더디 이루어 지는 심판은 무엇을 이야기하는 가?
그것은 하나님의 오래참으심. 그 사랑의 속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 심판의 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했다.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 얼굴을 돌려 모든 가증한 것을 떠나라 ” -겔14:6
회개는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회개가 쉽다면 좋겠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다. 힘들다.
회개는 자신의 삶 가운데 마음을 돌이키고,
실제의 삶을 돌이켜 하나님의 법 위에 서는 것이다.

[내가 노래하는 풍경 #130]

내가 노래하는 풍경 #129

사람들은 하나님을 눈으로 보여주면
그를 믿겠다고 말한다.
과연 그러할까?

이스라엘의 구약 백성들은 하나님의 나타나심. 곧 그 신현을 경험했다.
애굽에서 이미 그 땅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을 보았고,
홍해의 마른 땅을 건넜으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경험했다.
그리고 매일의 양식, 곧 만나와 메추라기라는 먹을 양식까지 얻었다.
말그대로 하나님이 먹이시고 기르시는 것을 경험한 백성이지만
성경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면 그들은 물 때문에 불평한다.

“그 불평한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출 17:7)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했지만 그들은 이렇게 질문하고 불평했다.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욱 선명하신 주님을 바라봅니다.

[내가 노래하는 풍경 #129]

내가 노래하는 풍경 #128

죄악 중의 괴수라고 자신을 마주 대한 바울에게는
더 이상 환란이나 기근이나 핍박이 문제 되지 않았다.
이제는 죽었구나. 하는 사형선고(고후1:9)까지도
그의 기쁨과 감사에는 관계하지 못한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내가 노래하는 풍경 #128]

내가 노래하는 풍경 #127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저 고상한 지식과 가르침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정말로 마주 대하기 싫은 나의 실체를 만났을 때야
광대한 우주 속의 작은 씨앗 같은 하나님의 은혜 한 줄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얻게 된 지혜 중 하나가 사람은 믿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어떤 존재인지 가리워져 있을 때는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전하다.)

사도바울에게서 비늘이 벗겨진 것처럼,
날마다 나를 가리운 허물들이 벗겨지기를 소원한다.
“에바다(_열려라)” 라고 외치시는 주님의 소원을 따라서..

[내가 노래하는 풍경 #127]

내가 노래하는 풍경 #126

나는 대단할 것 없다.
특별할 것 하나 없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특별함이 있다.
그것은 마음에 속한 것이다.
하나님이 내 안에 함께 하시기에,
별반 다를 게 없는 모든 일상이 하나님 때문에 특별해지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 (엡3:17)
내 안에 늘 그리스도가 거하시지만,
이 전에도 그리스도는 나와 함께 거하셨지만,
지금 이 시간 믿음으로 내 안에 계신 주님을 초대하는 것
그분의 임재 안에 거하는 것
그것은 특별한 일상으로의 초대이다.

[내가 노래하는 풍경 #126]

내가 노래하는 풍경 #125

늦은 귀가,
나는 자랑스럽게 과자봉지를 내밀었다.
아내가 과자를 받으며 내게 말했다.
“오빠는 항상 내 생각만 하는 것 같아..”

나는 이 말이 좋았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먹고 싶은 것이 별로 없는 아내에게 이런 종류로 점수 딸 기회는 흔하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과자로 내 마음을 굳이 전해주지 않아도
내 마음은 여전한데, 이런 격려의 말이 나를 기분 좋게 만든다.

우리 아버지의 마음이 이러할까?
나를 향한 그 마음은 날마다 여전하지만
나의 반응과 상관없이 나를 사랑한다 하시지만,
내 입술로 하나 둘 고백하는 그 목소리에 얼마나 기뻐하실까?

[내가 노래하는 풍경 #125]

내가 노래하는 풍경 #124

“내가 널 돌본단다.”

익숙한 골목길을 걸으며 외쳤다.
“네. 아버지, 그럴게요.
이해할 수 없지만,
아버지 주시는 부담감으로 그렇게 할게요.
기쁨으로 순종할게요.”

내 마음에 푸른 하늘 같은 그림이 열렸다.
그 마음의 상태를 어떻게 표현할까..
골목을 벗어나 펼쳐진 대로를 걸으며 눈물이 흘렸다.
사람들이 뭐라 하든, 그분의 통치안에 누리는 자유함..
주님의 통치안에 누리는 기쁨..

[내가 노래하는 풍경 #124]

내가 노래하는 풍경 #123

나는 나의 약함을 자랑한다.
내게 연약함이 없었다면
결코 주님을 신뢰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사 (고전 1:27-29)
당신의 아름다움을 보이소서.

[내가 노래하는 풍경 #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