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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속에 드리는 기도

어제 문득 후배가 작업하고 있는 작업실이 생각났습니다.
잠시 머물 시간이 되어서 건물 꼭대기, 높은 계단 너머의 작업실로 향했습니다.
한창 작업중인 그의 몸과 얼굴에는 온통 물감이 묻어 있었습니다.
여러 힘든 상황과 아픔들이 물감처럼 그의 내면에 번져 있었습니다.

아직 열어보지 않은 문자 메세지를 제가 대신 확인해주었습니다.
아픔이 더 깊어질까봐 ‘그냥 읽어보지 말아라.’ 고 했습니다.
수많은 오해와 아픔들이 가득한 시간속에 내가 해줄 말은 없었습니다.

“주님, 이 기도를 사용하셔서
후배를 도우시고, 이 문제속에서도 주님의 영광을 보여주세요.”
그런데 기도하며 기도의 내용들은 내게도 많은 생각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문제로 인하여 기도하게 하셨지만
문제가 없었다면 이런 절박함이 있었을까?
문제가 없었더라도 우린 이런 절박함을 가졌을까?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 절망은
긴 시간동안 주님께 무릎꿇게 만드는
하나의 동인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할퀴는 문자, 대화, 사람들, 이 모든 문제의
배후에 있는 세력들을 대적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주님의 피로 씻어주시고
주님의 마음으로 용서합니다. 화목하게 도와주세요.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아서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문제와 틀어진 관계들이
영원하지 않음을 선포합니다.
이 땅에 영원한 것은 오직 주님의 이름입니다.
고민과 낙담 하는 대신에
주님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이 모든 문제가 주님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
우리를 떠미셨거나, 그렇게 설정하셨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수많은 시절속에 녹아진 서로의 잘못과 상처때문입니다.
그것을 회개합니다.
하지만 이 상황을 통해 더욱 주님을 바라보겠습니다.

말과 글과 사진과 그림

나는 좋은 노래와 연주를 듣게 되면 마냥 좋았습니다.
그렇다고 노래를 잘 부르거나, 악기를 다루는 것이 부럽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각자의 은사라고만 여겼습니다.
하지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볼 때면 부러웠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있는 생각을 그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내가 적절하게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찾지 못해서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긴 시간에 걸쳐 내게 말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젯밤에 누워 주님의 하신 일을 찬찬히 생각해보니
정말 예측할 수 없는 계획과 방법과 시간이 있었습니다.

내가 전공한, 잘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없다고 얘기한 영역을 통해서,
적어도 한 번 이상 ‘나는 이 분야는 정말 할 수 없다.’ 고 말한
그것을 통해 주님은 일하셨습니다.
나는 은혜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벌써 10년이 넘게 사진 찍었지만
오늘 사진 찍는 자체가 내겐 감사의 제목입니다.
이젠 익숙해져서 밥 먹는 것처럼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라 말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색약이라지만, 색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나 대로의 색 감각을 가지고 사진을 찍고,
내게 보이는 데로의 색으로 사진 찍고, 그림을 그릴 뿐,
이것을 장애라고 생각해본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나누어 말할 수 없습니다.

“왕이신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내가 날마다 주를 찬양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시145:1-2)
다윗은 왕이지만, 하나님을 왕으로 모십니다.
다윗이 왕이 된 이후에도 다윗은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기억합니다.

자신의 왕이신 하나님을, 다윗은 몇 번에 걸쳐 찬양하는데
특이할 부분은 다윗은 하나님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하나님과 관련될 때의 이름은 그 분의 거룩한 성품이나 사역등을 반영합니다.
결국 이 말은 자신에게 이루신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했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할 뿐 아니라,
자신의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만났고 이를 찬양했던 것입니다.

나는 가끔 에덴동산이 그립습니다.
거울을 대면하는 듯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그 사귐,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그 사귐이 어떤지가 궁금합니다.
창세기 2장은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이라 표현합니다.
하지만 창세기 3장에서는 창세기의 저자가 ‘여호와 하나님’이라 칭하는 반면에,
뱀과 여자와 남자는 ‘하나님’이라 칭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엘로힘’이라는 능력자, 심판자의 의미로 통칭적인 ‘신’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바알과 하나님 모두를 신으로 부를 수 있는 것 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능력자이면서도 우리와 친밀하게 관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 나와 관계 맺으시는 분을 뱀은 이간하여 갈라버렸습니다.
나와 하나님을 별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선악과를 먹게 되면 그 능력자와 같은 능력자가 될 것이라 속삭이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에 대한 의존자가 아니라 자존자로 서는 순간,
우리는 변질 되는 것입니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말을 하고 있지만,
긴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감격할 수 있다면,
자격 없는 내게 주신 아버지의 선물인 것을 잊지 않는다면,
나는 정말 행복할 것입니다.

왕이신 하나님,
찬양받기 합당하신 주님과,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왕이신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내가 날마다 주를 찬양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시145:1-2)

선물 같은 그림

그림을 그리며,
그림을 그리는 분들의 애환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흔히 ‘미대오빠’라고 불리는 멋져 보이는 말이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인지요.
현실적으로 그림을 그리며 생계를 이어간다는 말은 얼마나 비현실적인 일인지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림을 그리는데 필요한 도구들은 또 얼마나 비싼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요.

그림을 그리며 나는 수많은 감사를 경험했습니다.
밤이 늦도록 작업을 하다가 재료가 떨어지면
다음날을 기다리지 못하고, 밤 11시가 넘어서도 화방문을 두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잠들어야만 하는 새벽시간이 물감을 건조시킬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물감을 한 번이라도 칠해 놓으면,
다음 날 다시 그림을 그릴 기회를 얻기 때문입니다.
늦은 방에 문닫힌 화방문을 열어주신 주인분께는 죄송하지만
고르고 고른 물감들이 결국 값싼 튜브물감 몇 개에 그치곤 했습니다.
사고 싶은 물감과 붓과 재료들은 가격이 너무 높아서 살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물끄러미 쳐다보던 내 처지가 안되어 보였던지
주인분이 주섬주섬 몇 개를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비싼 오일스틱 몇 개와 필요했던 붓이었습니다.
몇 번이나 허리를 굽혀 인사를 드리고는 날듯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작은 일화 한토막이지만
이 일을 시작하게 하신 분이, 모든 과정 가운데서 넉넉하게 내게 격려하셨습니다.

오늘 또 하나의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무경이는 소아난치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 어머니는 무경이의 하품하는 모습만으로 감사함을 느낄 정도입니다.
너무나 큰 절망은 이렇게 작은 일상에도 감사를 발견하게 만듭니다.
얼마전 무경이 어머니에게서 메일이 왔습니다.
첫 대목에서 가슴이 짠했습니다.

“..계속 받기만 해도 되는지….
지금까지 마음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래도 도움주신다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직 여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예의상 한 두번 거절할만한데,
그 도움을 물리치지 않고 단호히 받겠다는 글에서
어머니의 뜨거운 모성이 느껴졌습니다.
무경이는 아직까지 전혀 움직이지 못하지만
난청까지 있어서 보청기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 필요들을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요?

내 사진과 그림 한 두점을 경매 하는 시간도 가지려고 합니다.
선물처럼 그림을 그리게 되었으니, 그 선물을 어떤식으로 나눌까를 매일 모색하고 있습니다.
잡지 발행 기념식 때 무경이 어머니도 초대하려고 합니다.
경매할 그림으로 오늘부터 틈틈히 무경이를 생각하며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얼마 후에는 탈북자들을 돕기 위한 전시도 가지려 합니다.
그밖에 여러가지 비밀스런 전시들도 있습니다.
오늘도 화방에서 캔버스와 물감 몇 개를 골랐습니다.
여전히 갖고 싶은 도구 대신 조금 값이 싼 것들을 골랐습니다.
하지만 기쁜 선물처럼 내 그림이 씨익 웃으며 걸어가
사방으로 악수하고 토닥거리며 위로하는 꿈을 꿉니다.
내게 그림은 선물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알아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림을 그리는 것은 얼마나 경이롭고 감사한 일인지요.
전혀 자격 없는 사람을 통해 이 일을 시작하셨다면 내 몫은 역시나 순종입니다.
순종을 통해, 우리의 모든 숨결속에, 일상 속에 빛이 비추어 진다면
내 그림을 통해서 누군가에게 빛을 나눠줄 수 있겠지요..

그림을 그리며

나는 결코 작가를 꿈꾼적이 없습니다.
‘나는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나 할까.’
이 물음으로 내 인생을 회의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사랑해서,
당신이 이끄시는 걸음을 걸어가다 보니
어느 순간 나는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이렇게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사람이 계획할지라도 그 길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이것을 깨달았다면
내 자녀에게도 그렇게 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율배반적이며 이중잣대를 들이대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녀들을 방임하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다양성 가운데서
하나님이 각 사람들에게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스무살 언저리가 되면 대학을 가게 됩니다.
그 때까지도, 그 후로도 자기 길이 열리지 않더라도
만일 아이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 가운데 있다면
그것은 옳게 가는 것입니다.
느려보여도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에게 계획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으며, 다윗이 그랬습니다.

부모에게 아이는 생명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아이를 위해 부모는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아이들의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사울왕은 블레셋의 위협 앞에 자신의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싸웠고, 전쟁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했습니다.(삼상13)
왜냐하면 사무엘을 더 기다리다가는 전쟁에서 패배할 수 있다고 직감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전쟁에서 이겨야 했고, 자신의 백성을 지켜내야 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이 오해한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에게 무관심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내 인생을 위해, 아이를 위해 전쟁하면서
마치 하나님이 내 인생에, 아이들의 인생에,
그리고 자신의 백성들에게 무관심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사울은 당장 그 전투에서는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무엘은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임금님의 왕조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할 것입니다”(삼상13:14)

사울왕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백성이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임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아이들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주님께서 사무엘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 말씀하신다면
블레셋의 위협앞에서도 기다리는 것이 궁극적으로 전쟁에서 이기는 비결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항상 옳으실 뿐 아니라, 계획하시고
또 당신의 계획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온유의 의도2

온유가 5살 때,
집에 돌아오니, 온유가 오늘 그린
그림을 보여줬습니다.
전 간혹 그림을 그리면서 제목을 정하는데,
온유는 항상 미리 제목을 정해놓고
그림을 그립니다.
그래서 온유가 그린 그림에는
저마다의 분명한 의도가 들어가 있습니다.
온유에게 답을 듣기 전에
그림의 제목을 알아맞히고 싶은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이번에도 한참을 보았지만 도무지
무슨 그림인지 알 수가 없어서

DSC_6004

온유에게 물어보았더니,
이 그림의 제목은
<쉬가 마려운 사람>이라네요.
쉬가 마려우면 온몸에 전기가 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이런 표현을 했나봅니다.
제목을 듣고 보니 ‘아. 그렇구나.’ 싶습니다.

언젠가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한 아이가 고양이를 그렸는데,
꼬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손주에게 물었습니다.
“이 고양이, 꼬리는 어디 있어?”
그러자 아이는 “여기.”라며 잡고 있는
펜을 가리켰다고 합니다.
고양이 꼬리는 펜 안에,
아이의 의도 속에 숨어있다는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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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냥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온유의 그림 속에도
저마다의 의도가 숨어있듯
세상의 모든 작은 몸짓에도
의도는 있는 거겠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인생에도 말입니다.

온유의 의도

온유는 어렸을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합니다.
하루에 한 번은 엎드려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합니다.
아끼는 동생이지만,
그림 그릴 때 방해를 하면
신경질을 내며 밀어버릴 정도입니다.
 
온유가 5살때 일입니다. 아내는 온유가 그린 그림을 보기 위해
스케치북을 넘기다가 속상해 합니다.
온유가 제대로 그림을
그린 곳이 있는가 하면,
크레파스로 마구 휘갈겨 놓은 곳도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온유야, 스케치북을 왜 이렇게 쓰는 거야?

 이렇게 쓰지 말라고 엄마가 말했지?

 이렇게 쓰면 너무 아깝잖아.

 너 도대체 뭘 그린거야?”

“…바람 그렸어. 태풍도 그렸고.”

 

엄마의 호통에 온유가 작은 소리로

답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미안해.”

어른의 눈에는 그저 마구 휘갈겨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림에

이런 의도가 숨어있는 줄은 몰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