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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배우다’ 를 통해

조금 전 캘리포니아 얼바인에서
<결혼을 배우다> 책에 대한 메일을 받았습니다.
답장을 보내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내가 만나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주세요.”
이 책을 펴낼 때 기도한 제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투박한 기도를 가지고
넉 달도 안되는 짧은 기간동안
놀랍게 일하셨습니다.
 
결혼을 준비하는 청년이나, 
이제 애틋하게 사랑을 시작한 가정뿐 아니라
심각한 갈등 속에 있던 부부가
용기를 내어 상대에게 용서를 구하고, 기도를 청하고
이혼했던 부부가 다시 혼인신고를 하게 되고
위기 속에 있던 가정에
주님은 놀라운 타이밍으로 다가와 주셨습니다.
 
출판사에서 이 책을 제의했을 때
매번 거절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아직 제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 분야를 공부한 적도 없을 뿐 아니라
이제 나이 마흔에, 결혼에 대해 글을 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 말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마음을 따라
사랑하고 사랑을 배워간 정도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제가 결혼에 대한 전문가라면
아마도 이 책을 쓰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쓰게 된 가장 큰 계기는
누구보다 제가 결혼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 두려움을 해결하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나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께 묻고 또 묻습니다.
내가 알 수 없는 비밀이
주님께 있으며
그 비밀을 풀 열쇠 또한
주님이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결혼을배우다 #주님께배우다 #주님께속한비밀

두려움 속에서

 

예수님의 유년생활은 결코 평화롭지 않았습니다.
태어나자마자 그는 난민으로
생명의 위협을 피해가며 이곳 저곳을 떠다녀야 했습니다.
지금처럼 이동이 수월해진 시대에도
거처를 옮긴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요셉은 당대 최고 권력자의 위협을 피해
막 태어난 아이와 출산으로 약해질만큼 약해진 아내를
데리고 한밤중에 급히 이집트로 떠나야 했습니다.

하나님 아들의 생애조차 이렇게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가족이 이집트로 피한 후에
포악한 헤롯왕은 베들레헴과 그 부근에 살고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살육했습니다.
하나님이 부재하시는 시간 같아 보입니다.
이 사건은 마치 애굽에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과 같아 보입니다.
마태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모세의 모습을 연상케 하고 있습니다.
그 분은 빛 하나 없는 어두운 시대, 이 시대를 구원하실 분이십니다.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주님은 스스로 당신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그 피 아래 있는 당신의 백성을 속량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집트로 떠나시고,
헤롯의 잔인한 살륙과
다시 나사렛이라는 동네로 들어갈 때마다
성경은 구약의 예언의 말씀을
이루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쟁에서의 극적인 승리뿐 아니라
당사자들 조차 두려워 떠는 순간에도
주님의 말씀이 성취되어 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아켈라오가 유대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두려워했습니다.
우리 역시 수많은 뉴스와 삶의 정황들을 듣고 두려워 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현실이 이상적이지 않다는 말과 같습니다.
현실은 지극히 현실적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주인이 이 땅에 도래한 순간에도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현실적이라는 말이 더이상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그 분이 일하시지 않는 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우리 인생속에
주님은 여전히 일하시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두려워 떠는 순간에도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영광이 어울리지 않으니
그것은 마치 한여름의 눈이나 추수때의 비와 같다.” (잠26:1)

잠언의 말씀 한 구절, 또 한 구절이 두렵습니다.
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주님, 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영광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울리지 않는 여름의 눈과도 같습니다.

내 지난 모든 시간들을 지워버리고 싶습니다.
내 말과 글을, 사람들앞에서의 실수들,
내 삶의 궤적들을 조금씩 수정해서
주님이 보실 때 아름다운 길로 만들고 싶습니다.

하지만 눈 앞의 선택과
내가 옳다고 여긴 방법들
그 모든 것들이 나중에 주님 앞에서
어떻게 평가될까 두렵습니다.

주님, 사람들의 평가에 두 가지 생각이 들곤 합니다.
하나는 나로 인해서 주님이 수치를 당할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그림자도 없는 완전한 분이십니다.
하지만 나로 인해 주님이 마치 부족한 것처럼 인식될 까봐
주님의 이름이 더럽혀질까봐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한낱 인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아. 나는 얼마나 유한한 인간인가요.
나는 늘 그것을 고민하고 두려워했습니다.

또 하나의 두려움은 말그대로 사람들의 평가가
나를 찌를때 입니다.
나는 생각마다 여린 사람인가봅니다.
그래서 속을 긁으며 아파할 때
언젠가 주님이 내게 해주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나는 전혀 의롭지 않지만
주님, 나와 함께 걸어주세요.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영광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다만 어리석은 제게 주님이 거하여 주세요.
그것으로 나는 만족하며 기뻐하게 해주세요.
나의 만족의 기준이 주님께 가있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노래하는 풍경 #4

114

다윗은 헤브론 왕을 거쳐 이스라엘 왕이 된다.
여부스족의 난공불락 예루살렘 요새까지 정복했다.
모든 일을 정리하고 난 후,
그가 한 일은 법궤를 옮기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웃사가 죽게 되었고
그 마음에는 두려움이 가득하게 되었다.
과연 내가 하는 일이 옳은가?
하나님이 내게 기름 부으셨지만
사울 왕처럼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닌가?
하나님이 나를 왕으로 삼으신 일을 후회하고 계신 걸까?
하나님이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그에게 등을 돌리는 것 또한 한순간이다.
하지만 웃사가 죽고, 법궤를 머물게 한
오벧에돔의 집은 복을 받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삼하 6:11)

문제는 어디에서 잘못되었는가?
지난 잘못에 대해 회개하고
주님의 법도를 따르면 된다.
다윗은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법궤를 옮기는 방식을 버렸다.
그것은 실용적이고, 효율적이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방식을 따라
다시 법궤를 옮겼다.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니” (대상15:13)

그는 다시 주님 안에 기뻐 춤추었다.
미갈의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했다. (삼하6:21)

[내가 노래하는 풍경 #4]

내가 노래하는 풍경 #2

112

나를 두렵게 하는 수만 가지 두려움이나
내가 겪은 어떤 큰 고통도
나를 완전히 죽이지 못 했다.
오히려 그 시간은 나를 단련시켰다.

내가 아는 한,
가장 큰 고통을 경험한 욥조차도
고통으로 인한 파멸이 완전한 파멸을 의미하지 않았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욥의 고백처럼
나의 가는 길은 오직 주님이 아신다.
내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나를 두렵거나 고통하게 하지만,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신다는 사실은
고통 가운데서도 얼마나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지 모른다.

[내가 노래하는 풍경 #2]

손익분기점

우리는 손익분기점에 다다르면 손발이 떨린다.
내가 가진 것에 막상 손해가 생기면 마음이 닫혀 버린다.
하지만 실제로는 손익분기점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주님께 일만달란트
_인생동안 갚지 못할 은혜의 빚을 진 자일 뿐이다.

주님이 이미 내 손에 쥐어 준 것은
내 인생의 본전이라 생각하기에 잃는 것이 두렵다.
앞으로 주님이 내게 주실 것은
주님의 것이지만 (아직 내 손에 오지도 않았기에)
이미 내 손에 쥐어진 것은
주님이 내게 주신 것, (주님의 것이 아니라)바로 내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주님이 내게 맡기신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