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rt Blog:
  • All
  • Backup
  • Diary
  • gallery
  • lecture
  • Magazine

나는 오늘의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예수님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에게
외식하는 자라고 엄히 말씀하신다.
외식이라는 말은 그리스로마 시대에
얼굴에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연극배우를 가리킨다.

그들은 엄격한 종교규례를 지키기 위해
마시는 잔에 혹시라도 부정한 벌레가 들어갈 것을 염려해서
채로 걸러가며 정결을 지켰다.
하지만 예수님은 “너희가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킨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의 외식에 대해 예수님은 일곱가지의 심판을 말씀하신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 곧 외식하는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심판이다.

나를 아찔하게 한 것은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보좌와 그 보좌 위에 앉으신 분을 두고 맹세한다는 것이다. (마23:22)
이 한구절은 내가 서있는 공간과 시간속에의 책임을 느끼게 만든다.
내가 살아가는 공기, 공간.. 주님께 속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을까?

주님은 단순히 도의적인 심판,
겉과 속이 다른 것에 대한 말씀에 그치지 않으신다.
후반의 말씀을 이어 보면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선조가 선지자들을 죽인 것처럼
예수님에게도 똑같이 그렇게 할 것이다.
누군들 자신에 대해 알 수 있을까?
사울처럼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고 열심을 내지만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만히 있으면 나는 굳어지고 또 굳어진다.
성령님, 내 눈을 밝혀주세요.
내게 빛 비춰주세요.

모든 것이 주님께 속했는데
종교지도자들처럼 나는 자신의 잣대안에 주님을 가둬놓고
주님은 이것을 기뻐하실것이다.
주님은 이렇게 하는 것을 기뻐하신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기계적인 주님의 음성, 기억과 과거속의 주님을 산술적으로 추론하고 있지는 않은가?

과연 나는 주님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을까?
오늘 주님의 마음을 구하지 않으면 나는 어두워 보지 못하는 자이다.

우리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자의 하나님이시다.
그가 기뻐하는 예배는 무엇인가?

16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51:16-17)

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사66:1-2)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주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자..

나는 오늘의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외식하는자는연극하는자 #내가서있는공간과시간에두려움 #주님의시간주님의공간 #오늘의하나님을만나야한다

당신의 자녀를 위한 급박한 전개

이제 살아가겠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살아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희철이 어머니가  순간 순간 눈물흘리며 말씀하실 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누가 잘 살라고 말한다고 해서
살아갈 수 있는게 삶이 아닙니다.
그동안 용기내어 잘 살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을까요?

이 말을 스스로 말해주어서 얼마나 감사한지요.

아픈 두 모자가 힘을 내어 잘 살아준다는 말에
뛸듯이 기쁜 이 마음은 주님이 주신 격려겠지요.

무경이는 여전히 몸을 못 움직입니다.
쌍동이 동생 석빈이와 누나 수빈이는
가끔 감기에 걸리긴 하지만 건강합니다.
다른 아이들은 자라는데
여전히 누워있는 무경이를 보면
그저 아프고 미안해서 눈물만 흐른다고 합니다.
그래도, 무경이 어머니도 기도하면서 힘내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경이를 처음 만난 날,
무경이의 손을 잡고 기도하며
어머니에게 하나님을 전했습니다.
신이 있다면 왜 이런 절망이 있겠느냐는
무경이 어머니에게
그날 감사하게도 우리 아버지의 마음이 전해졌습니다.

아프고 절망스런 풍경들을 떠올리며
주님의 마음을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맹인과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시고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시고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 주셨습니다. (마9:35)
목자 없는 양같은 당신의 백성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할 것을 명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마9:36)
불쌍히 여기다로 번역된 이 말은
내장에 통증을 줄만큼 깊은 아픔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당신의 백성을 향한 주님의 이 마음은
제자들에게 아래와 같이 기도할 것을 명했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라.” (마9:37-38)

그러고는 깜짝 놀랄 장면을 만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하라는 내용은
다음 장면에서 곧바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마10:1)

주님의 마음.
다급하다 못해
급박하기까지 한 성경의 전개와 성취속에

당신의 자녀를 향한
주님의 마음이 만져지는 것 같았습니다.

#희귀난치 #희철이 #무경이 #불쌍히여기다 #일꾼을위한기도 #다급한전개 #숨은주님의마음

주님 원하신다면

군대에 입대해서 2주일간 예배를 드리지 못하다가
예배당 앞에서 집사님이 건네준 따뜻한 커피 한 잔에
마음이 녹았습니다.
바닷바람에 오랫동안 서있어서
꽁꽁 얼었던 몸에 온기가 돌았고,
나는 예배 시간 내내
그리웠던 주님을 소리내어 찬양하며 눈물을 흘렀습니다.

산상수훈을 마치신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그 가르침과 권위에 놀랐습니다. (마7:28-29)
그 분의 권위 앞에 한 나병환자와 백부장이 엎드렸습니다.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격리되었던 나병환자에게
예수님은 손 내미셨습니다.
“내가 원한다. 자. 깨끗하게 되어라.” (마8:3)
그러자 곧. 그는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깨끗함을 받았다는 말로 쓰인 단어는
죄를 씻다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구원을 읽으며 나도 같은 은혜를 구합니다.
주님, 내게도 말씀해 주세요.
주님이 원하시면 날마다 나를 깨끗하게 해주세요.

예수님은 나병환자의 치유를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야만 사회로부터의 격리가 풀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에게도 외면받아야 했던 그의 부정이
예수님의 말씀앞에 깨뜨려졌습니다.
구원이 지니는 놀랍고도 포괄적인 이미지들을 생각합니다.

이방인이었던 백부장 역시 예수님이 베푸시는 구원에 참여합니다.
이스라엘에서도 아직까지 이렇게 큰 믿음을 본 적이 없다.” (마8:10)
예수님이 본문에서 칭찬하시는 백부장의 큰 믿음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여, 저는 주를 제 집 안에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마8:8)

예수님을 모실 자격이 없다는 백부장은
주님의 백성이 되는 자격을 얻었습니다.
반면에 기존의 이스라엘의 아들들 중 일부는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아들이 되는 자격
전통과 혈통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내게 말씀하시면
내가 깨끗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늘 가지게 되는 의문이 있습니다.
과연 그 분이 내게 말씀하셨는가?

그 분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없다면
그 분의 의사나 결정, 권위와 상관없이
내가 이미 깨끗함을 받았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깨끗함을 입는다는 말인데,
주님과 상관없는 구원은, 거짓되고 슬픈 이야기입니다.

위대한 사역의 결과를
위대한 사귐의 결과로 치환하거나 담보하는 것은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그때 나는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마722-23)
위대한 사귐의 결과가  
위대한 사역의 결과로 나타날 수는 있지만
위대한 사역의 결과가 위대한 사귐의 결과는 아닙니다.

영화 메멘토에서 주인공은 잘못된 단서 하나 때문에
안타까운 결말을 맞게 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단서는 ‘자격’ 입니다.
전통과 혈통으로, 사역과 결과로
자격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공동체과 가족으로부터도 외면당했던 나병환자와
전에 구원에서 멀리 있었던 이방인 백부장이
주님 앞에 엎드렸던 것처럼
그 분의 놀라운 성품에 기대어야만 합니다.

“주님이 원하신다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신다면
이 땅을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마8:2)

내가 주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은
주님의 은혜에 기인합니다.

#백부장 #나병 #마태복음 #은혜 #메멘토 #단서 #사귐 #사귐의결과 #오픈핸즈

빛으로 오신 하나님 나라

신학 대학원에 입학하면서
처음 신청한 선택과목이 ‘하나님의 나라‘였다.
이 주제가 무엇을 말하는지 전혀 감도 잡지 못한 상태에서
성경속에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을 통해
마태복음에서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4:17)
는 뜻이 장소적인 접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경외심에 대한 무게 때문에
하늘이라는 말로 대신 사용하였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 말은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의미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는 말은 이제 왕이 이 땅에 오셨다는 말이다.
앞서 세례요한이 선언했던 것처럼
성경에서 예언했던 그 분이
이제 이 땅에 오셨고, 어둠 가운데 있던 땅에 빛이 임했다.
빛으로의 그 분의 사역 앞에
거치는 모든 것들은 회개해야만 한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인해
병원이나 치료 방법이 없던 당시 고대인들에게
병이 치유되는 것을 포함한 놀라운 구원의 소식이 울려퍼졌다.
하지만 동시에 굳어져서 회개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심판의 메세지이기도 했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모든 질병과 아픈 곳을 고쳐 주었을 때
그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져서
사람들은 병을 앓는 모든 사람들을 예수께 데리고 왔다.
온갖 질병과 고통으로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
귀신 들린 사람들, 간질병에 걸린 사람들, 중풍에 걸린 사람들..
지금의 현대 의학으로도 치유하지 못할 사람이라도
예수님께 나아오면 치유 받았다.
그 분께 나아오는 모든 이들은 구원을 받았다. (마4:23-24)

하지만 여전히 고통하고 아픈 사람들,
여전히 남은 고통들이 있다.
사단이 광야에서 시험하고 있는 것 처럼
예수님은 당장에 모든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고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할 수 있다.
그럼으로 모든 사람들을 부요케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쉬운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세상의 유혹과 육신의 만족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니라
어둠 가운데 빛을 가져오기 위해 오셨다.
빛으로의 놀라운 사역은 마태복음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보게 될 것이다.

어떤 나무인가?

“왕이 오신다.
왕이 오시는 길을 준비하고
그 길을 곧게 하라.”

이사야의 말씀부터 이어오던
말씀의 성취가 이제 눈 앞에 이르렀다..
원어적으로는 예수님의 오심을 통해
‘천국이 이미 임했다. ‘
세례 요한의 외침 앞에 사람들은
왕의 오심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 세례의 의미는 애굽인들이 홍해에 수장된 것처럼
그리고 수장되어야 할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살아가는 것처럼
죄에 대하여 죽고 주님과 연합하여 새로운 생명을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요한은 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이라고
독설을 퍼붓는다.
이들이 세례를 받으러 온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형식적인 세례 만으로
왕이 오심을 준비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철저하게 정결예법을 지키던 그들에게
과연 무슨 죄목을 발견할 수 있을까?
그들은 아브라함이 자신들의 조상이라는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들로 인해
선별된 자들이라 여긴 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한다.
그들의 죄는 마음에 숨겨져 있었으며
그들이 자랑하는 신분은
널려 있는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할 수 있다고 꾸짖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하지만,
약속을 믿어야 할 것인가?
약속의 주최이신 하나님을 믿어야 할 것인가?
율법 앞에 드러나는 죄는 없을지 모르지만
율법을 만드신 하나님 앞에 드러나지 않을 죄는 없다.
드러나는 죄가 하나도 없지만
주님의 법도 앞에 서지 않으면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 있는 것처럼
임박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오심은 놀라운 은혜의 초대이지만
그 분이 오실 길을 예비하지 않는 자에게는 무서운 심판이 있다.
열매 맺지 않는 나무는 모조리 잘려서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다.

나는 좋은 나무가 되고 싶지만,
내가 어떤 나무인지를 말해 주는 것은
나무가 맺는 열매이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다.”

사람은 그 마음에 품은 것을 열매 맺게 마련이다.
나는 어떤 나무인가?
내 마음은 무엇으로 조성되어 있는가?
내 마음의 방향은 어디를 향해 있는가?

첫 장은 족보

마태복음의 첫 장은 족보로 시작됩니다.
무언가 이야기가 시작되기 이전에
마태는 보다 의미심장한 선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혈통을 중요하게 생각했을 당시 유대인들에게
마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를 통치했던 늙은 헤롯은
왕의 혈통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온전한 유대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왕이 누구인가?

아브라함과 다윗에게로 이어지고
다시 열왕들로 이어지고 있는
예수님의 족보는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몇 천년간 그들이 기다려온
메시아가 바로 그라는 사실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족보속에는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과 같은 믿음의 조상과
다윗, 히스기야, 요시야로 대표되는 선왕의 이름 뿐 아니라
아하스, 므낫세와 같은 악한 왕들의 이름,
그리고 무엇보다 네 명의 이방인 여자들의 이름들이 등장합니다.
다말과 라합, 룻과 밧세바.

영화 ‘사도’에서 영조는 
자신의 비천한 신분으로 인해
위태해질 수 있는 왕권에 대한 위협을 끊임없이 염려합니다.
그로 인해 결국 자신의 아들까지 죽음으로 내몰게 됩니다.
같은 맥락에서 위에 열거했던 이름들은
왕의 족보에 들어가면
치명적으로 수치를 당할 수 있는
사람들의 이름들과 사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말은 시아버지인 유다로 부터 창녀취급을 받았으며,
라합은 여리고성의 배신자, ..
특히 밧세바는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였습니다.

이 이름을 배경으로 한 비정상적인 이야기들은
예수님이 유대인 뿐 아니라 세상의 구주이시며,
죄인들을 위한 메시아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이 첫 장을 통해
더디 이루어 진다고 믿는 하나님의 약속,
성취되지 않을것이라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지금 우리 삶 가운데서도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