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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원하신다면

군대에 입대해서 2주일간 예배를 드리지 못하다가
예배당 앞에서 집사님이 건네준 따뜻한 커피 한 잔에
마음이 녹았습니다.
바닷바람에 오랫동안 서있어서
꽁꽁 얼었던 몸에 온기가 돌았고,
나는 예배 시간 내내
그리웠던 주님을 소리내어 찬양하며 눈물을 흘렀습니다.

산상수훈을 마치신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그 가르침과 권위에 놀랐습니다. (마7:28-29)
그 분의 권위 앞에 한 나병환자와 백부장이 엎드렸습니다.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격리되었던 나병환자에게
예수님은 손 내미셨습니다.
“내가 원한다. 자. 깨끗하게 되어라.” (마8:3)
그러자 곧. 그는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깨끗함을 받았다는 말로 쓰인 단어는
죄를 씻다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구원을 읽으며 나도 같은 은혜를 구합니다.
주님, 내게도 말씀해 주세요.
주님이 원하시면 날마다 나를 깨끗하게 해주세요.

예수님은 나병환자의 치유를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야만 사회로부터의 격리가 풀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에게도 외면받아야 했던 그의 부정이
예수님의 말씀앞에 깨뜨려졌습니다.
구원이 지니는 놀랍고도 포괄적인 이미지들을 생각합니다.

이방인이었던 백부장 역시 예수님이 베푸시는 구원에 참여합니다.
이스라엘에서도 아직까지 이렇게 큰 믿음을 본 적이 없다.” (마8:10)
예수님이 본문에서 칭찬하시는 백부장의 큰 믿음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여, 저는 주를 제 집 안에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마8:8)

예수님을 모실 자격이 없다는 백부장은
주님의 백성이 되는 자격을 얻었습니다.
반면에 기존의 이스라엘의 아들들 중 일부는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아들이 되는 자격
전통과 혈통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내게 말씀하시면
내가 깨끗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늘 가지게 되는 의문이 있습니다.
과연 그 분이 내게 말씀하셨는가?

그 분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없다면
그 분의 의사나 결정, 권위와 상관없이
내가 이미 깨끗함을 받았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깨끗함을 입는다는 말인데,
주님과 상관없는 구원은, 거짓되고 슬픈 이야기입니다.

위대한 사역의 결과를
위대한 사귐의 결과로 치환하거나 담보하는 것은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그때 나는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마722-23)
위대한 사귐의 결과가  
위대한 사역의 결과로 나타날 수는 있지만
위대한 사역의 결과가 위대한 사귐의 결과는 아닙니다.

영화 메멘토에서 주인공은 잘못된 단서 하나 때문에
안타까운 결말을 맞게 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단서는 ‘자격’ 입니다.
전통과 혈통으로, 사역과 결과로
자격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공동체과 가족으로부터도 외면당했던 나병환자와
전에 구원에서 멀리 있었던 이방인 백부장이
주님 앞에 엎드렸던 것처럼
그 분의 놀라운 성품에 기대어야만 합니다.

“주님이 원하신다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신다면
이 땅을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마8:2)

내가 주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은
주님의 은혜에 기인합니다.

#백부장 #나병 #마태복음 #은혜 #메멘토 #단서 #사귐 #사귐의결과 #오픈핸즈

고독과 믿음과 변증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과의 차이와 관계에 대해 나는 늘 관심을 가집니다.
이 두 차원을 어떻게 유기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할 것인가.
를 고민하는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동의 작품들은 내게 많은 도움이 됩니다.
지방에 내려갔다가 비는 시간을 틈타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게 되었습니다.
감독의 세계관에 대한 부분은 논외로 하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는 시간과 공간, 차원을
유기적으로 연출하는 묘미가 있습니다.
왜곡된 차원과 구성을 그냥 나열할 수 있도 있겠지만
그는 꽤 설득력 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흥밋거리와 상관없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는 내게
‘고독과 인내와 믿음’ 같은 주제에 대해서 질문하곤 합니다.
이번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인공인 쿠퍼와 아멜리아는 모선에서 밀러 행성을 확인하러 갔다가
사고로 인해 시간을 지체하게 됩니다.
그들이 서둘러 모선으로 돌아왔을 때
모선에서의 시간은 자그마치 23년의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그들의 만남 앞에 내 마음이 요동했습니다.
중력 차이로 인한 시간의 왜곡 때문에
쿠퍼 일행에게는 3시간이 흘렀지만,
기다리던 로밀리에게는 23년의 시간이 흐른 것입니다.
늙어버린 로밀리는 ‘쿠퍼 일행은 자신에게 돌아오지 못할 거라 믿었다’고 말합니다.
영화 <인셉션>에서도 감독은 현실과 꿈,
꿈과 꿈같은 이질적인 차원을 설득력있게 연결 짓습니다.
첫 장면에서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꿈의 더 깊은 꿈(림보)속에 잠들어 있는 사이토를 찾아갑니다.
영화의 설정상, 꿈을 꾸면 현실보다 수 십 배의 시간을 체험할 수 있게 되는데
사이토는 자신의 꿈속에서 이미 자신의 전 생애를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보고 느낀 모든 것이 전부라고 느낍니다.
꿈을 현실로 믿고 사는, 이미 의식이 혼탁해진 사이토는
주인공 코브의 설득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믿고 있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믿음,
꿈이 현실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믿음,
동료가 내게 돌아오고 있다는 믿음
실제적인 생애 속에서 간헐적이고 희미한 진리를 쫓기란 쉽지 않습니다.
주인공들을 기다리는 동료들의 모습에 나는 한참 동안 망연자실했습니다.
가상이지만 실제적인 시간을 살아내야 하는 그들의 고민을 고민했습니다.
나는 무엇으로 진리를 변증해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보이는 현실만이 아니라,
믿어야 하는 진리의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내가 노래하는 풍경 #17

127

 
내가 나를 믿게 되는 순간,
나는 나를 신뢰할 수 있는 존재로
착각하게 됩니다.
나는 믿어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
믿어야 할 존재는 내 안에 계신 분입니다.

내가 나를 믿는 순간,
나는 자존자가 됩니다.
선악과를 통한 유혹은
자존자가 되려는 투쟁의 시작입니다.
모든 인류는 자존자가 되기를 시도하며,
인류 최초의 경고는
그렇게 할 경우
죽음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창3:3)

나는 믿어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
나는 의존자입니다.
죽음 앞에 온전히 설 때
나는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나의 지혜를 믿어서는 안되지만,
내게 지혜를 주신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주님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노래하는 풍경 #17]

#나를향한믿음
#긍정의힘
#주님을향한믿음
#자존자와의존자
#나는의존자로살아야한다
#나의지혜
#아무것도할수없지만
#내안에계신분
#모든것을할수있다

 

내가 노래하는 풍경 #8

118

기적을 보면 믿음이 생기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들은 문제가 생겼을 때 걱정하지 않는가?
기적을 보거나, 경험하는 것과 믿는 것은 차이가 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보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초자연적 기적을 경험했다.
심지어 일용할 양식도 하나님께 그저 얻었다.
하지만 그들의 불신앙은 여전했고, 불평은 더해갔다.

집회를 통해 부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하지만,
어떤 기적이나 은사만을 구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감각적인 현상만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제한하는 것이다.

은사가 있지만 마음에 평강이 없는 사람도 많다.
주님조차 통제 못하는 고집 센 사람도 많다.

모든 행사를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비로소 그 은혜가 드러난다.
은사를 담을 그릇이 필요하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강력한 은혜를 구하라.
그것은 사랑이다.

[내가 노래하는 풍경 #8]

겸손한 중에

성경 전반에 수많은 전쟁이 있고,
수많은 풀어야 할 난관이 있다.
하지만 성경은 일관되게 그것을 푸는 열쇠는
군사력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라 말씀하신다. (신28:7)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을 통해
하나님은 어떻게 걸어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지혜를 주신다.

하나님이 가리키는 길이 있다.
그 길로만 걸으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맹세하신대로
우리를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실 것이다. (신28:9)
어느 길을 가야 할 것인가?
수많은 물음 앞에서 답을 아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지혜이다.

하나님은 내게 지혜를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은 지혜를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그 지혜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지혜인 것을 기억하라고 하신다.
마치 물건이 주어지듯, 내 손에 쥐어지고 나면
마치 계약서에 싸인을 하고 나면
원주인은 내게 아무 효력을 못 미치는 그런 모양이 아니다.
모든 지혜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그렇기에 지혜가 있어도 지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분은 질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지혜를 구하는데 뿐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데도 주님의 마음을 물어야 한다.
겸손한 중에, 조용한 중에, 은밀한 중에
그 지혜를 사용하라 말씀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