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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자리

나는 도무지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베란다에 매달려 보기도 하고
학교 다닐 적에는 답안에 장난도 쳐보고
하루는 재미있었지만
그 재미가 며칠을 가지 않습니다.

허기진 세상에서
재미를 쫓거나
허무를 느끼거나
둘 중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었지만
그 분은 내게 무관심한 분이거나
무능력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빈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도 채울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그 자리를
채울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또한 하루 이틀이 아니라
긴 시간을 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사람이라면,
그 꿈이 이루어진다면,
나는 만족할 수 있겠다고 믿어 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전 미문 앞에 구걸하는 사람은
나의 모습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금으로도, 은으로도 채울 수 없는
허기를 주님이 채우셨습니다.
언젠가 촬영 때문에 미국에 있을 적에
주님이 내 마음에 물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솔로몬에게 물으신 것처럼

“너의 소원이 무엇이니?”

나는 그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주님이 보고 싶습니다.”
 
내 소원은 정말 그것이었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대하며
주님을 보는 날에

우리는 그 기쁨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16:8)
 
이 말씀이 너무 좋아서
메일을 보낼 때마다 
내용 아래에 함께 보내는
발신서명으로 적어 놓았습니다.
흔들리고 또 흔들리는 현실 앞에서도
내 영혼이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_여호와를_내앞에_모심이여 #성전미문앞에_구걸하던_나 #연인이_할수없는_그것 #주님만이_채울수있는_빈자리

말과 글과 사진과 그림

나는 좋은 노래와 연주를 듣게 되면 마냥 좋았습니다.
그렇다고 노래를 잘 부르거나, 악기를 다루는 것이 부럽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각자의 은사라고만 여겼습니다.
하지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볼 때면 부러웠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있는 생각을 그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내가 적절하게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찾지 못해서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긴 시간에 걸쳐 내게 말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젯밤에 누워 주님의 하신 일을 찬찬히 생각해보니
정말 예측할 수 없는 계획과 방법과 시간이 있었습니다.

내가 전공한, 잘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없다고 얘기한 영역을 통해서,
적어도 한 번 이상 ‘나는 이 분야는 정말 할 수 없다.’ 고 말한
그것을 통해 주님은 일하셨습니다.
나는 은혜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벌써 10년이 넘게 사진 찍었지만
오늘 사진 찍는 자체가 내겐 감사의 제목입니다.
이젠 익숙해져서 밥 먹는 것처럼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라 말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색약이라지만, 색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나 대로의 색 감각을 가지고 사진을 찍고,
내게 보이는 데로의 색으로 사진 찍고, 그림을 그릴 뿐,
이것을 장애라고 생각해본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나누어 말할 수 없습니다.

“왕이신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내가 날마다 주를 찬양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시145:1-2)
다윗은 왕이지만, 하나님을 왕으로 모십니다.
다윗이 왕이 된 이후에도 다윗은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기억합니다.

자신의 왕이신 하나님을, 다윗은 몇 번에 걸쳐 찬양하는데
특이할 부분은 다윗은 하나님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하나님과 관련될 때의 이름은 그 분의 거룩한 성품이나 사역등을 반영합니다.
결국 이 말은 자신에게 이루신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했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할 뿐 아니라,
자신의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만났고 이를 찬양했던 것입니다.

나는 가끔 에덴동산이 그립습니다.
거울을 대면하는 듯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그 사귐,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그 사귐이 어떤지가 궁금합니다.
창세기 2장은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이라 표현합니다.
하지만 창세기 3장에서는 창세기의 저자가 ‘여호와 하나님’이라 칭하는 반면에,
뱀과 여자와 남자는 ‘하나님’이라 칭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엘로힘’이라는 능력자, 심판자의 의미로 통칭적인 ‘신’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바알과 하나님 모두를 신으로 부를 수 있는 것 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능력자이면서도 우리와 친밀하게 관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 나와 관계 맺으시는 분을 뱀은 이간하여 갈라버렸습니다.
나와 하나님을 별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선악과를 먹게 되면 그 능력자와 같은 능력자가 될 것이라 속삭이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에 대한 의존자가 아니라 자존자로 서는 순간,
우리는 변질 되는 것입니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말을 하고 있지만,
긴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감격할 수 있다면,
자격 없는 내게 주신 아버지의 선물인 것을 잊지 않는다면,
나는 정말 행복할 것입니다.

왕이신 하나님,
찬양받기 합당하신 주님과,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왕이신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내가 날마다 주를 찬양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시145:1-2)

회의론자, 이상주의자

나는 지독한 회의론자이며,
동시에 이상주의자입니다.
그래서 간혹 걷다가 멈칫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립니다.

그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뜻인지,
주님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는 명확지 않습니다.
검은색인지, 흰색인지 알 수 없는 회색지대에서
어떤 일을 결정할 때
기준으로 삼는 말씀들이 몇 개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결별하는 장면입니다.
롯이 택한 땅은 애굽땅과 같았고
여호와의 동산 같은 땅이었습니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선택해야 할 노른자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소돔과 고모라의 결말은 우리가 잘 아는 바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택한 땅을 주목해서 보게 됩니다.
무엇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내가 가진 생각과 판단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우선하는 선택의 기준은
이 일에 하나님은 어떤 마음일까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결정한 여러 선택들이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당혹스러운 것들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미련해 보이는 일들이
시간이 지나 내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미천한 내 인생에 어떻게 개입하시는지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당장 믿음의 결정과 도약을 뛴다고 해서
눈앞에, 혹은 손에 잡히는 이익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결정과 도약을 주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남편이 되었고, 아빠가 되었지만
우리 주님은 여전하십니다.
주님이 변하지 않았기에
믿음의 결정과 도약도 여전하길 두려운 마음을 품고 기도합니다.
믿음의 결정과 도약은
마음이 굳센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만한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오해합니다.
아닙니다.
결정과 도약을 한 사람은 얼마간
얼마나 마음이 두렵고 떨리며 흔들리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인생을 걸어가는 이유는
인생을 경영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결정 후에 망할 수도 있다는 것은
세상을 긍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너무도 냉혹해서 낭만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다윗을 자주 생각합니다.

사울 왕을 피해 다윗이 도망할 때
사람들은 다윗을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제대로 믿고 있었을까?
도저히 성취되지 않을 오랜 전설처럼 여기고 있진 않았을까?
피해 망상을 가진 절대 권력자는 다윗을 두려워했지만
사울왕의 수하를 비롯해서, 다윗의 추종자들까지
이성적인 판단을 가진 정상인이라면
다윗이 왕이 된다고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도망하며 겨우 자기 몸 추스르기도 힘든 도망자의 인생을
그렇게 상상한다는 것은
결론을 내다 보지 않으면 너무 많은 비약이 필요합니다.
나는 지독한 회의론자이지만,
누구보다 기뻐하며 이 길을 걸어가려 하는 이유는
절망 중에도 주님은 여전히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

이상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23:4)

기름부음 받은 다윗의 인생에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주님은 여전히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커피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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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좋아합니다.
아내와 연애할 때 카페 한 번 간적 없었는데
결혼하고는 늘 함께 집에서 커피를 내려 마십니다.
선물받은 커피머신으로 일 년을 마시다가
작은 비알레띠 모카포트로 에스프레소를 내려 삼 년을 마셨습니다.
선교지에 나갈 때면 작은 도구들도 함께 꾸립니다.
밤이 일찍 오는 그 땅에 커피 한 잔은 선교사님에게 위로가 됩니다.
그러다가 올해 초부터 워터드립으로 내린 더치커피(dutch coffee)를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한 방울, 한 방울 진지하게 떨어지는 물방울을 바라봅니다.
똑같은 물방울인데 같은 모양은 하나도 없습니다.
때론 호흡처럼, 때론 한숨 같아 보입니다.

언젠가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시 56:8)
지금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다가 자신을 숨겨준 제사장들까지도
모조리 죽임을 당하는 어두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결국 택한 망명의 땅 가드에서조차 원수들에 둘러싸여 울고 있습니다.
“하나님,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종일 삼키려 하나이다.” (시 56: 1-2)

언젠가 나는 하나님께 깊이를 구했습니다.
내가 가진 깊이로는 아무것도 담을 것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내게 다윗의 눈물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아픔, 하나님의 아픔을 지적인 동의로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눈물을 알지 못하면 알 수 없는 깊이.
다윗은 눈물로 만들어 졌습니다.
오늘 흘리는 눈물들 안에 아버지의 마음이 있습니다.

느리지만, 충분한 시간동안 만들어 내는 더치커피를 보고
사람들은 ‘커피의 눈물’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더디게 떨어지는 커피 방울을 보며
신실하게 담으시는 주님의 눈물병을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