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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가운데 선지자가 있었음을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말씀하셨다.
백성들은 에스겔앞에 모여 앉아서
그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말을 들으나 행하지는 않았다.’
이는 입으로는 사랑을 행하지만
그 마음에는 탐욕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변증한다는 관점에서는
얼마나 무의미한 시간이란 말인가?
에스겔은 소통되지 않는 말을 하고
백성들은 그 앞에 나와서 딴 생각을 하고 있는
마치 끝없이 달리는 평행선과도 같다.
의미없는 시간들이지 않은가?
에스겔의 외침을 사람들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사람처럼 여겼을 뿐이다. (겔33:32)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신비가 있다.
좋은 음악을 들을 뿐
아무것도 행동하지 않으려는 백성에게
하나님앞에 이 장면은 증거가 될 것이다.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에 있었음을 알리라.” (겔33:33)

내 삶 앞에도 수많은 선지자가 있었다.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선지자.
나는 그 앞에서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은채
그 노래를 듣고 있었다.
나는 주님앞에서 어떤 말도 할 수 없으리라.
과연 누구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나는 판단을 유보할 것이다.

또한 나조차도 이해되지 않거나
소통되지 않는 것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아무 소득없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질문앞에서
역사의 주인은 주님이시며
우리는 다만 주님이 주시는 음성에 귀기울이고 순종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몫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의 순종여부와 상관없이
주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실 것이다.
주님은 끊임없이 말씀하신다.

노래하는 풍경 #31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라고 고백하지만
우리 마음을 잘 살펴보면
추가 이익은 주님의 은혜이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원금은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추가 이익을 내지 못할 뿐 아니라
원금에 손상을 입으면 우리는 심각하게 경계하게 됩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내 것인 게 있었을까요?
주님의 은혜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기억할 때 제대로 깨닫게 됩니다.

“네가 날 때에 탯줄을 자르지도 않았고,
돌보거나 불쌍히 여긴 자도 없었다.
들에 버려졌으며 피투성이로 발짓하는 것을 보고
나는 너에게 “살아 있으라”라고 말하며
너를 돌보았다.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고,
너에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를 내게 속하게 하였다.
내가 물로 네 피를 씻어 없애고 네게 기름을 발랐다.
수놓은 옷을 입히고, 가죽신을 신기고,
가는 베와 모시로 덧입히고, 패물을 채우고..
금과 은으로 장식하고
고운 밀가루와 꿀과 기름을 먹여 극히 곱고 형통하여
왕후의 지위에 올랐다..”  (겔16:4-14)

본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어떻게 범죄하고 반역했는지를
살피는 본문입니다.
하나님은 버려진 피투성이를 
당신의 사랑으로 살리셨습니다.
그가 나를 살피시며 ‘살아 있으라.’
말씀하셨기에 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노래하는 풍경 #31]

p.s 노숙을 하던 두한이와 시간을 보내며
그에게 가장 많이 배운 건
‘밑바닥 인생은 두려운 게 없다’는 것입니다.
두한이에게 두려운 것이 왜 없을까요?
호랑이와 사자를 무서워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하지만, 그에게 통장 잔고나 무엇을 시도하는 것 따위의 두려움은 없는 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왕에 가진 게 없어서 잃을 게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잃을 게 많아지면 상대적으로 두려움이 많아집니다.

그 두려움을 살피면,
아직 내가 갖지 못한 수익들은 주님이 주신 은혜이지만,
현재 가지고 있는 유, 무형의 것들은 내 것이라,
내 것을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얄팍함이 작용한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가진 원금이 처음부터 존재하기나 한 것일까요..

살아남은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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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이 함께 예배드렸습니다.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막7:5-8)
온유에게 이 말을 설명해주었습니다.

우리가 입술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마음이 다른 곳에 가있다면,
예수님보다 초컬릿, 사탕, 장난감 같은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한다면,
그것은 외식하는 것과 같습니다.
외식하는 것은 마치 연극에서
가면을 쓰고 다른 사람으로 연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함께 드린 예배는 계속 있었지만
어제의 예배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이유는
처음으로 온유가 주도해서 기도제목들을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위해서도 기도하자는 말에
궁금해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천국에서 외할아버지가 잘 기다리고 계시라고
우리가 나중에 할아버지 만나러 갈테니까
거기서 잘 기다리고 계시라고 기도하고 싶어서.”

장인어른은 아내가 고등학교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물론이고, 저도 얼굴을 뵙지 못했습니다.
온유가 내놓은 기도제목이 참 따뜻하다는 생각에
그 기도도 함께 드렸습니다.

예배를 마무리하는 대표기도도 온유가 맡았습니다.

“우리 가족들을 지켜주시고
우리 가족들이 병이나
나쁜 질병에 걸리지 않게 해주시고

하나님만 사랑하게 해주시고
소명이도 기도하게 해주세요.

우리 가족들이
말과 행동이 하나님께로만 가게해주세요.
하나님만 사랑하게 해주세요.

교회서도 장난치지 않고
하나님만 찬양하고

우상한테 절하는 사람은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주시고
추석때 우상에게 절하는 사람들
하나님한테 절하게 해주시고
하나님께만 기도하게 해주세요.

내 생각과 내 마음과
우리 가족들 생각과 마음을
지켜주시고
마음이 초컬릿, 사탕, 장난감으로 가지않고
하나님쪽으로 가게 해주세요.”


요즘 계속 묵상하는 에스겔 말씀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말씀하십니다.
네번에 걸친 심판에 대한 말씀속에서(겔14)
크게 주목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의인으로 대표되는 노아, 다니엘, 욥도 심판을 막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아들이나 딸들도 구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자신에 대한 심판 뿐 아니라
자녀와 다음 세대에 대한 마음에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결국 자녀들을 심판 가운데 건져낼 수 있는 것은
자녀들 스스로가 주님을 바라보도록 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심판들이 전혀 비인격적이지 않은 이유는
살아남을 이들과, 심판 받을 이들 모두
그들의 행위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겔14:22)

이 말은 두렵지만, 감사한 말씀입니다.
살아남은 이들..
주님을 여전히 바라보는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들,
그들을 통해 주님을 바라보는 또 다른 사람들은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보라 구원받을 몇몇 아들들과 딸들이 그 안에 살아남을 것이다.
너희가 그들의 행동과 행위를 보면
모든 재앙에 대해 너희가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겔14:22-23)

매일 토닥거리고, 아이들을 위로하고 혼내고 다시 품어주는
일상의 반복을 통해
정말 바라는 것 한가지는
이 아이들 스스로 주님 앞에 서는 날입니다.
세상속에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사람들은 어리석다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 발 앞에서 우린 서로가 서로를 통해 위로와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p.s 아프리카 잘 다녀오겠습니다.
페이스북 페이지는 글이 올라가는 날짜와 시간을 예약해둘수가 있어서
미리 묵상글을 써두고 떠납니다.
<노래하는 풍경>
https://www.facebook.com/SingMyLoveNpho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