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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사랑해요.

차에서 내릴 때
온유가 놀리듯 말했습니다.
“아빠는 운전을 마치고 나면
맨날 주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해.”

집을 나설 때 현관에서 신을 신고 있으면
“아빠는 신발 신고 나갈 때
주님, 주님. 도와주세요.라고 말해.”

요즘 온유가 아빠를 관찰하고 흉내내곤 합니다.
아이의 흉내가 아빠를 놀리는 부분이 있지만
개의치 않습니다.
나도 알지 못했던 부분이었습니다.
그 습관적인 신음들을 아이가 인식하고 말해준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 그래? 아빠가 그랬어? 어떻게 했는데?”
아이들은 어른을 흉내내며 신앙을 배워간다고 생각합니다.

온유가 네살부터 어깨너머로 배운 기도가 있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게 해주세요.”
이 기도를 들을적마다 내 마음이 뭉클합니다.
이 기도는 온유에게 말로 전해주어 가르쳐 준적은 없습니다.
아이 옆에서 기도하며 내가 날마다 그렇게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며칠전에는 차를 타고 가다가
아이들이 노래를 지어 부르길래 녹음했습니다.
아직 아이에게는 기도와 예배, 놀이와 장난이 구분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기도와 찬양속에
주님은 우리와 함께 웃고 계실거라 믿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해요.
사단아 물러나라.
내가 예수님을 제일 사랑해요.
아빠, 엄마, 소명이보다 더!
나는 나는 예수님을 제일 좋아해요.
아빠보다 나보다.

아빠 물러가라.
소명이야 물러가라.

예수님을 사랑해요.
사단아 물러가라.
똥꼬빵꾸야 물러가라.”

당신의 자녀를 위한 급박한 전개

이제 살아가겠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살아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희철이 어머니가  순간 순간 눈물흘리며 말씀하실 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누가 잘 살라고 말한다고 해서
살아갈 수 있는게 삶이 아닙니다.
그동안 용기내어 잘 살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을까요?

이 말을 스스로 말해주어서 얼마나 감사한지요.

아픈 두 모자가 힘을 내어 잘 살아준다는 말에
뛸듯이 기쁜 이 마음은 주님이 주신 격려겠지요.

무경이는 여전히 몸을 못 움직입니다.
쌍동이 동생 석빈이와 누나 수빈이는
가끔 감기에 걸리긴 하지만 건강합니다.
다른 아이들은 자라는데
여전히 누워있는 무경이를 보면
그저 아프고 미안해서 눈물만 흐른다고 합니다.
그래도, 무경이 어머니도 기도하면서 힘내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경이를 처음 만난 날,
무경이의 손을 잡고 기도하며
어머니에게 하나님을 전했습니다.
신이 있다면 왜 이런 절망이 있겠느냐는
무경이 어머니에게
그날 감사하게도 우리 아버지의 마음이 전해졌습니다.

아프고 절망스런 풍경들을 떠올리며
주님의 마음을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맹인과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시고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시고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 주셨습니다. (마9:35)
목자 없는 양같은 당신의 백성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할 것을 명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마9:36)
불쌍히 여기다로 번역된 이 말은
내장에 통증을 줄만큼 깊은 아픔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당신의 백성을 향한 주님의 이 마음은
제자들에게 아래와 같이 기도할 것을 명했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라.” (마9:37-38)

그러고는 깜짝 놀랄 장면을 만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하라는 내용은
다음 장면에서 곧바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마10:1)

주님의 마음.
다급하다 못해
급박하기까지 한 성경의 전개와 성취속에

당신의 자녀를 향한
주님의 마음이 만져지는 것 같았습니다.

#희귀난치 #희철이 #무경이 #불쌍히여기다 #일꾼을위한기도 #다급한전개 #숨은주님의마음

주님 원하신다면

군대에 입대해서 2주일간 예배를 드리지 못하다가
예배당 앞에서 집사님이 건네준 따뜻한 커피 한 잔에
마음이 녹았습니다.
바닷바람에 오랫동안 서있어서
꽁꽁 얼었던 몸에 온기가 돌았고,
나는 예배 시간 내내
그리웠던 주님을 소리내어 찬양하며 눈물을 흘렀습니다.

산상수훈을 마치신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그 가르침과 권위에 놀랐습니다. (마7:28-29)
그 분의 권위 앞에 한 나병환자와 백부장이 엎드렸습니다.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격리되었던 나병환자에게
예수님은 손 내미셨습니다.
“내가 원한다. 자. 깨끗하게 되어라.” (마8:3)
그러자 곧. 그는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깨끗함을 받았다는 말로 쓰인 단어는
죄를 씻다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구원을 읽으며 나도 같은 은혜를 구합니다.
주님, 내게도 말씀해 주세요.
주님이 원하시면 날마다 나를 깨끗하게 해주세요.

예수님은 나병환자의 치유를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야만 사회로부터의 격리가 풀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에게도 외면받아야 했던 그의 부정이
예수님의 말씀앞에 깨뜨려졌습니다.
구원이 지니는 놀랍고도 포괄적인 이미지들을 생각합니다.

이방인이었던 백부장 역시 예수님이 베푸시는 구원에 참여합니다.
이스라엘에서도 아직까지 이렇게 큰 믿음을 본 적이 없다.” (마8:10)
예수님이 본문에서 칭찬하시는 백부장의 큰 믿음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여, 저는 주를 제 집 안에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마8:8)

예수님을 모실 자격이 없다는 백부장은
주님의 백성이 되는 자격을 얻었습니다.
반면에 기존의 이스라엘의 아들들 중 일부는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아들이 되는 자격
전통과 혈통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내게 말씀하시면
내가 깨끗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늘 가지게 되는 의문이 있습니다.
과연 그 분이 내게 말씀하셨는가?

그 분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없다면
그 분의 의사나 결정, 권위와 상관없이
내가 이미 깨끗함을 받았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깨끗함을 입는다는 말인데,
주님과 상관없는 구원은, 거짓되고 슬픈 이야기입니다.

위대한 사역의 결과를
위대한 사귐의 결과로 치환하거나 담보하는 것은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그때 나는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마722-23)
위대한 사귐의 결과가  
위대한 사역의 결과로 나타날 수는 있지만
위대한 사역의 결과가 위대한 사귐의 결과는 아닙니다.

영화 메멘토에서 주인공은 잘못된 단서 하나 때문에
안타까운 결말을 맞게 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단서는 ‘자격’ 입니다.
전통과 혈통으로, 사역과 결과로
자격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공동체과 가족으로부터도 외면당했던 나병환자와
전에 구원에서 멀리 있었던 이방인 백부장이
주님 앞에 엎드렸던 것처럼
그 분의 놀라운 성품에 기대어야만 합니다.

“주님이 원하신다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신다면
이 땅을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마8:2)

내가 주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은
주님의 은혜에 기인합니다.

#백부장 #나병 #마태복음 #은혜 #메멘토 #단서 #사귐 #사귐의결과 #오픈핸즈

두려움 속에서

 

예수님의 유년생활은 결코 평화롭지 않았습니다.
태어나자마자 그는 난민으로
생명의 위협을 피해가며 이곳 저곳을 떠다녀야 했습니다.
지금처럼 이동이 수월해진 시대에도
거처를 옮긴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요셉은 당대 최고 권력자의 위협을 피해
막 태어난 아이와 출산으로 약해질만큼 약해진 아내를
데리고 한밤중에 급히 이집트로 떠나야 했습니다.

하나님 아들의 생애조차 이렇게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가족이 이집트로 피한 후에
포악한 헤롯왕은 베들레헴과 그 부근에 살고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살육했습니다.
하나님이 부재하시는 시간 같아 보입니다.
이 사건은 마치 애굽에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과 같아 보입니다.
마태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모세의 모습을 연상케 하고 있습니다.
그 분은 빛 하나 없는 어두운 시대, 이 시대를 구원하실 분이십니다.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주님은 스스로 당신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그 피 아래 있는 당신의 백성을 속량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집트로 떠나시고,
헤롯의 잔인한 살륙과
다시 나사렛이라는 동네로 들어갈 때마다
성경은 구약의 예언의 말씀을
이루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쟁에서의 극적인 승리뿐 아니라
당사자들 조차 두려워 떠는 순간에도
주님의 말씀이 성취되어 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아켈라오가 유대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두려워했습니다.
우리 역시 수많은 뉴스와 삶의 정황들을 듣고 두려워 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현실이 이상적이지 않다는 말과 같습니다.
현실은 지극히 현실적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주인이 이 땅에 도래한 순간에도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현실적이라는 말이 더이상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그 분이 일하시지 않는 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우리 인생속에
주님은 여전히 일하시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두려워 떠는 순간에도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첫 장은 족보

마태복음의 첫 장은 족보로 시작됩니다.
무언가 이야기가 시작되기 이전에
마태는 보다 의미심장한 선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혈통을 중요하게 생각했을 당시 유대인들에게
마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를 통치했던 늙은 헤롯은
왕의 혈통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온전한 유대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왕이 누구인가?

아브라함과 다윗에게로 이어지고
다시 열왕들로 이어지고 있는
예수님의 족보는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몇 천년간 그들이 기다려온
메시아가 바로 그라는 사실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족보속에는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과 같은 믿음의 조상과
다윗, 히스기야, 요시야로 대표되는 선왕의 이름 뿐 아니라
아하스, 므낫세와 같은 악한 왕들의 이름,
그리고 무엇보다 네 명의 이방인 여자들의 이름들이 등장합니다.
다말과 라합, 룻과 밧세바.

영화 ‘사도’에서 영조는 
자신의 비천한 신분으로 인해
위태해질 수 있는 왕권에 대한 위협을 끊임없이 염려합니다.
그로 인해 결국 자신의 아들까지 죽음으로 내몰게 됩니다.
같은 맥락에서 위에 열거했던 이름들은
왕의 족보에 들어가면
치명적으로 수치를 당할 수 있는
사람들의 이름들과 사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말은 시아버지인 유다로 부터 창녀취급을 받았으며,
라합은 여리고성의 배신자, ..
특히 밧세바는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였습니다.

이 이름을 배경으로 한 비정상적인 이야기들은
예수님이 유대인 뿐 아니라 세상의 구주이시며,
죄인들을 위한 메시아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이 첫 장을 통해
더디 이루어 진다고 믿는 하나님의 약속,
성취되지 않을것이라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지금 우리 삶 가운데서도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습니다.

내게 고난이 없었다면

칠십 대의 장로님과 점심을 함께 했다.

“많이 바쁘시죠?”
이 말 앞에 나는 차마 만남을 미룰 수 없었다.
아내와 자녀들을 안타깝게 잃으시고, 셀 수 없는 질병 때문에
매시간 약이 없으면 살 수 없는 분이시다.
하지만 예수님을 얘기하는 게 너무 좋아서
나와 함께 하는 두 시간 정도가 그렇게 행복하시단다.
수많은 질병을 위해,
그리고 아프시지 않기를 기도하겠다는 내 말을 가로막으셨다.
“이 질병들은 내게 가시와 같지만
내가 기도하면 그래서 아버지가 나를 치유하시면
나는 또 아버지를 떠나게 될까 봐
이 질병을 감사함으로 품고 살아가고 싶어요.”
장로님은 예수님과의 사귐이 없는 거짓 평화를 누리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헤어지는 당신의 뒷모습을 한참 쳐다보았다.
걸음조차도 쉽지 않지만, 한 걸음, 한 걸음의 고통 속에서
마음 깊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한다.

“만일 내게 고난이 없었다면
나는 부족하거나,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라
예수님을 만나지 못 했을 거예요.”

질병은 질병으로서 그에게 충분히 고통스러워 보였지만
고난 중에도 여전히 함께 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어서
그의 무게들은 도리어 감사의 제목이라 말씀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