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rt Blog:
  • All
  • Backup
  • Diary
  • gallery
  • lecture
  • Magazine

가이사랴 빌립보

가이사랴 빌립보는 헬몬산 근처에 있는 도시다.
분봉 왕 헤롯 빌립이 로마 황제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도시다.
황제의 직명 가이사랴와, 분봉왕 빌립의 이름을 갖고 있는
상징적인 이 도시, 지상 최고의 권력을 말하고 있는
이 곳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냈다.

사람들은 로마황제의 이름이 마치 신의 이름인 것처럼
우러러 보지만 지금 작은 한 켠에서 하나님은 당신을 계시하고 계신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마16:16)
내가 믿는 예수님은 이런 분이시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다.
기름부음 받은 자는 세 가지 – 곧 왕과 선지자, 제사장을 의미한다.
우리의 왕이시며 선지자이시며, 또한 우리의 죄를 속죄하신 제사장이신
예수님은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막연하게 예수님을 믿는다 말하지만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것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면
내가 두려워 떨게 만드는 여러가지는 사실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마16:13)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요한, 혹은 엘리야,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여겼다.

예수님은 동일하게 이 시대에도 물으신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4대 성인중 한 명으로 여긴다.
아니면 조금 나은 사람, 전설 속의 한 인물,
또는 역사속에 한 인물정도로 여긴다.

나는 예수님을 내 구원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으로 알았다.
하지만 거기서 그칠 이름이 아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나의 구원자일 뿐 아니라 주님이시다.
그 분의 십자가의 사건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우주적 전쟁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지 않으면
교회는 그저 착한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을 목표로 삼을 지 모른다.
화내지 않고, 잘 인내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을 추구할 지 모른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해 너무나 정확하고 훌륭한 고백을 했지만
그 조차도 다른 제자들과 같이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출해 내시고
왕으로 등극하실 것을 기대했는지 모른다.
사람이 생각하는 훌륭한 무엇, 선한 무엇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마16:21)
말했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16:22)
이 말을 베드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가 지켜주겠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원어를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자기에게로 데리고 와서는 대들듯 말했다.
어리석고 순진해 보이는 예수님을 베드로는 가르치려 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과 그 지혜는
사람에게는 미련해 보일지라도 하나님께는 최선이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25)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3)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한다고 막아선 일이
도리어 하나님의 일을 막아선 것이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마16:23)

베드로가 십자가에 대해 막아선 것은
사탄의 시험과도 같다.
예수님조차도 겟세마네에서 십자가의 일을 앞두고 눈물로 기도해야 할 만큼
그 일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인류의 죄에 대한 댓가, 그 저주와 사망.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혼자서 마셔야 하는 것이다.
마치 광야에서 예수님을 세 가지로 시험한 사단과도 같다.
사단은 이렇게 유혹한다.

십자가의 길 외에 다른 더 좋은 방법이 있을텐데,
그것을 모색해 보면 어떨까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마16:23)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미련해 보이는 것으로
어떻게 구원을 이룰 수 있을까요?
이 곳 가이사랴 빌립보의 찬란한 문화와 영광을 보십시오.
이 방향이 더 좋지 않을까요?

하지만 주님은 이 시험마저도
단호하게 물리치시고, 그 길을 가셨다.
그리고 그 길위에 주님은 인류를 초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인자가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터인데,
그 때에 그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 줄 것이다.” (마16:24-27)

예수님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신다.
너무나 두려운 말씀이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했지 않은가?
하지만 믿음과 행함은 따로 노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곧 예수님의 길 위에 함께 따라 걷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이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처럼 함께 죽고
그 후에야 우리는 그 분의 부활에도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죽지 않고 부활에 동참할 수는 없다.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다.

그것이 바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
라는 고백이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고백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신다고 약속하셨다.

몇 년 전, 이스라엘에서 가이사랴 빌립보를 만났다.
베드로의 고백을 생각하며 그 곳 돌맹이 몇 개를 주워왔다.
당시의 영광스러웠을 가이사랴 빌립보는 지금 다 무너져
몇 개의 흔적들이 관광객을 맞고 있지만
미비해 보이던 하나님의 나라의 씨앗은
예수님의 약속처럼 큰 나무가 되어 마지막 때를 기다리고 있다.
예수님이 이 믿음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마 16:18)

또한 교회가 이 고백위에 있을 때 음부의 권세은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마16:18)
이 시대에 수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질타하고 있는 이유는
때가 악한 이유도 있겠지만,
교회가 이 고백위에 서있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고백위에 서있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예수님은 놀라운 선물을 주셨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16:19)

열쇠는 열고 닫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묵상하며 하나님은 여러 말씀을 생각나게 해주셨다.
열쇠는 하찮아 보이지만 놀라운 의미를 지니고 있다.

느혜미야가 백성들과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을 때
산발랏과 도비야 등은 집요하게 그들의 공사를 방해하고 훼방했다.
원수들은 성벽 재건 공사를 마치고 수리하지 못한 곳이 없다는 말을 듣고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뇌물을 주면서 까지 느헤미야의 공사를 방해하려고 했는데
그 때는 아직 성문의 문짝을 달지 못한 때였다. (느6:1)
하지만 마침내 성벽 역사가 마쳤을 때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 하여 크게 낙담했다. (느6:16)
이렇게 문이 달리고 난 뒤에야 성은 자신의 구실을 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여호수아가 아이성을 정복할 때도
일부는 아이성의 군대를 유인했고, 일부는 매복했다가
유인당한 아이 군대로 말미암아 열려진 문을 통해 아이성을 점령했다.

“여호수아가 단창을 들어 신호를 보내는 순간
매복하고 있던 이스라엘군이 일제히 일어나
성 안으로 돌격하여 성을 점령하고 즉시 성에 불을 질렀다.

아이군이 뒤돌아보니 성 안에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이때 광야로 도망가던 이스라엘군이 돌이켜 반격 태세로 나오자
아이군은 도망칠 길이 막연하였다.” (수8:19-20)

이만큼 문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만큼 큰 의미를 가진다.
내가 주님을 옳게 고백한다면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열쇠를 가지게 된다.
주님이 약속하신 열쇠는 곧 기도를 통해 역사한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적 세계를 진동케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 가나안 거민들이 있다.
그들은 너무나 커보여서 가나안정탐꾼은 그 앞에 악평을 늘어 놓았고
사울 뿐 아니라 하나님의 용사 ‘요나단’조차 그 앞에 침묵하고 말았다.
하지만 자신과 대적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골리앗을, 하나님과 가나안 거민들을 비교해야만 한다.

“그 땅 백성을 두려워 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하지 말라” (민14:9)

하나님이 주신 작은 돌맹이가 원수를 넘어 뜨리고 말것이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삼상 17:45)

나는 주님이 내게 맡기신 열쇠를 신뢰해야만 한다.
원수는 우리가 가진 열쇠가 작아서 문을 열고 닫을 필요에 의문을 갖게 한다.
실제로 우리 눈에 열쇠가 작고 하찮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열쇠로 열수 있는 문은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열쇠를 가졌다는 것은 이미 전쟁의 승기를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열쇠를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은 다시 우리에게 물으실 것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다른 사람이 무엇이라 말하든
나는 나의 대답을 말해야만 한다.

승리자

골목,
내 마음의 고향

My Israel #1

집을 떠나오는데 딸 온유가 내게 매달려서는
떨어지지 않으려 애를 썼다.
‘아빠가 멀리 가는 걸 아나?’ 라고 말하긴 했지만
정말로 알고 있다고 믿을 수 밖에 없을만큼
온유는 내 목덜미를 꼭 안고는 놓아주질 않았다.
집을 나서며 아내와 딸을 안고 기도했다.
온유 뿐 아니라 아내 목소리에도 힘이 없다.
그래서 집을 떠나오는 발 걸음이 너무나 무거웠다.

리무진 버스를 타고 공항에 도착할 무렵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밝은 목소리다.
용케 힘을 냈나보다.
활기 있는 목소리를 들으니 내 발걸음도 가벼워진다.

비행기안이다.
이제부터 한국시간은 잊기로 했다.
이스라엘 시간은 현재 2시 20분.

공항에서 동역자들에게 문자로 기도제목을 보냈다.
‘주님과 동거하며 보내는 시간이 되게 해주세요.’
이전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을 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면
그 후 몇 년이 지나 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꿈꾸게 되었다.
사역과 삶은 너무나 다른 영역이었다.
단적인 예로 사역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가정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가운데 서있기 위해서는
때론 사역을 포기하고 가정을 지켜야 할 때도 있다.
그렇게 가노라면 참 느리게 걷는 것만 같다.
나만 어리석은 삶 가운데 서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것이 복되다. 말씀하신다.
내 인생의 최종 평가는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이 일하셨다라고 생각되는 전환점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택 가운데 서 있기를 힘썼다.
나는 그 때마다 몇 개의 말씀을 기초로 삼았다.
그 중 하나는 가나안 정탐꾼의 이야기이고,
또 하나가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이야기다.
이런 모든 이야기의 배경이 이스라엘 위에 펼쳐져 있다.

나는 바로 그 이스라엘로 향하고 있다.

이스라엘로 향하는 지금 내가 가장 꿈꾸는 것은
모든 시간, 주님과 대화하고 답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그 사람을 보는 것 같이 바라보고
주님께서 보고자 하는 것을 촬영하고 질문하고 답하는
그 분과의 교제를 이번 이스라엘의 목표로 잡으려 한다.
그리고 그 목표는 내 평생동안 품어야 할 것이다.

이번 여정의 첫번째는 버드나무와 나비공장 식구들과 함께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곳을 향해 떠나는 것이다.
그런데 다들 가지고 온 카메라를 보니 주눅이 든다.
사진작가라지만 내가 가진 카메라는 작고 초라한 것이다.

하늘과 가까운 이 곳에서 하나님은 여러 추억들을 생각나게 하신다.

누군가의 자켓 촬영을 하기로 한 날이다.
그 날도 지금처럼 주눅이 들었다.
나는 촬영을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책들을 사서 참고했는데
흡족한 사진을 찍기 위해 필요한 장비들을 구입해야 했는데
절망할 수 밖에 없을 금액대었다.
그래서 힘이 빠졌고, 용기도 잃었다.
다음 날 촬영하기로 했는데 그 날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이렇게 쏟아지는 비 앞에 촬영일은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았기에
나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날 밤. 이 일을 놓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내 마음에 말씀하셨다.

“내가 사진 찍는 것 자체가 기적이잖니?”
그렇다.
나는 눈이 색약이라 꿈꾸었던 선생님이 되지 못했다.
신체검사에서 보기좋게 떨어져 버렸다.
선생님이 되는데 색약이 얼마나 큰 장애가 될런 지는 모르겠지만
사진을 찍는데는 그보다 더 방해가 될 것은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그것은 전혀 방해가 되지 못했다.
하나님이 도우셨기에 내가 사진 찍는 것은 은혜의 범주에 속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 날, 절대 잊을 수 없는 말을 덧붙이셨다.
“내일을 걱정하지마렴, 내일 내가 너의 조명이 되어줄게.”
아. 나는 정말로 가장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세상에 어떤 값진 조명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보다 더 좋은 조명을 제공해 줄 수 있을까?
모든 상황과 조건은 같아 보였지만 내 마음은 두둥실 하늘로 떠올랐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시면 나는 살수 있는 것이다.
기도를 끝내고 촬영할 사람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 비는 내일이면 그칠 겁니다.
내일은 가장 좋은 촬영이 될거예요.‘
그리고 다음날 시원하고 맑은 날씨속에 멋진 촬영을 할 수 있었다.

비행기는 이런 저런 추억을 안고 6시간째 날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