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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노래하는 풍경 #38

하나님의 마음은
힘든 중에, 아픔 중에, 고난 중에,
더욱 알게 됩니다.
 

그것이 광야가
존재하는 이유일까요?

 

[노래하는 풍경 #38]

 

광야는 히브리어로 ‘미르바르’ 입니다.
미는 from 이란 뜻을 지녔고
말씀이라는 ‘다바르’ 에서 이 단어가 나왔습니다.
이는 광야가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곳’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전혀 볼 품 없어 보이는 이 곳을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모두 거쳐갔나봅니다.

사람의 눈에 전혀 쓸모 없어 보이는, 버려진 이 곳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제련소일 줄 누가 알 수 있을까요..
40년간 이 광야의 길을 걸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 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로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8:2-3)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라 번역되어 있지만
원문에 보면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입니다.

그것은 수많은 풍경을 연상시킵니다.
당신의 호흡으로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듯,
우리를 살게 하시며
빛이 있으라 하신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만드셨습니다.
무엇보다 말씀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요1:1)

 

불확실성 속에
어디로 가얄지 모를 우리의 처지와 어둔 시절이
마치 광야와 같다면
우리를 궁극적으로 살게 하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불확실성의시대
#마치광야와같다면
#살게하시는등불은
#예수님이십니다
#광야는
#미르바르
#하나님이말씀하시는곳입니다

#노래하는풍경
#럽앤포토 #천국의야생화

고독과 믿음과 변증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과의 차이와 관계에 대해 나는 늘 관심을 가집니다.
이 두 차원을 어떻게 유기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할 것인가.
를 고민하는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동의 작품들은 내게 많은 도움이 됩니다.
지방에 내려갔다가 비는 시간을 틈타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게 되었습니다.
감독의 세계관에 대한 부분은 논외로 하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는 시간과 공간, 차원을
유기적으로 연출하는 묘미가 있습니다.
왜곡된 차원과 구성을 그냥 나열할 수 있도 있겠지만
그는 꽤 설득력 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흥밋거리와 상관없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는 내게
‘고독과 인내와 믿음’ 같은 주제에 대해서 질문하곤 합니다.
이번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인공인 쿠퍼와 아멜리아는 모선에서 밀러 행성을 확인하러 갔다가
사고로 인해 시간을 지체하게 됩니다.
그들이 서둘러 모선으로 돌아왔을 때
모선에서의 시간은 자그마치 23년의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그들의 만남 앞에 내 마음이 요동했습니다.
중력 차이로 인한 시간의 왜곡 때문에
쿠퍼 일행에게는 3시간이 흘렀지만,
기다리던 로밀리에게는 23년의 시간이 흐른 것입니다.
늙어버린 로밀리는 ‘쿠퍼 일행은 자신에게 돌아오지 못할 거라 믿었다’고 말합니다.
영화 <인셉션>에서도 감독은 현실과 꿈,
꿈과 꿈같은 이질적인 차원을 설득력있게 연결 짓습니다.
첫 장면에서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꿈의 더 깊은 꿈(림보)속에 잠들어 있는 사이토를 찾아갑니다.
영화의 설정상, 꿈을 꾸면 현실보다 수 십 배의 시간을 체험할 수 있게 되는데
사이토는 자신의 꿈속에서 이미 자신의 전 생애를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보고 느낀 모든 것이 전부라고 느낍니다.
꿈을 현실로 믿고 사는, 이미 의식이 혼탁해진 사이토는
주인공 코브의 설득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믿고 있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믿음,
꿈이 현실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믿음,
동료가 내게 돌아오고 있다는 믿음
실제적인 생애 속에서 간헐적이고 희미한 진리를 쫓기란 쉽지 않습니다.
주인공들을 기다리는 동료들의 모습에 나는 한참 동안 망연자실했습니다.
가상이지만 실제적인 시간을 살아내야 하는 그들의 고민을 고민했습니다.
나는 무엇으로 진리를 변증해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보이는 현실만이 아니라,
믿어야 하는 진리의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노래하는 풍경 #37

“내가 이만큼 수고했다.”
가 아니라,
“나 같은 작은 자를
사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노래하는 풍경 #37]

p.s 언젠가 여행 중에

대기업 사장님이 우리와 동행했습니다.

그분이 나와 영상을 하는 동생들에게
이런 작업을 하게 되면
돈은 못 벌지 않느냐며 조소했습니다.

돈도 못 버는 작업을
왜 하느냐는 이유로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그때 나는 그분에게 작업과
생의 의미에 대해 증명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동생들의 기를 살려주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자랑할만한 작업들의 제목도 열거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나는 처절하게 회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이 길 위에 서 있는 이유가
마치 다른 좋은 기회를 벗어던지고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듯,

내가 잘 난 듯이 떠들어 댔지만

정답으로 말하면 
이 모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허물 많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구원해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 게 하셨다는 진실을 
그 분에게 전하지 못 했습니다.

아무도 듣는 이 없는 밤,
나는 다시 정정하며 주님께 대답했습니다.
“자격 없는 저에게
은혜를 주시어 살 수 있게 하신,
나를 불러 주신 그 은혜만으로
나는 감사합니다.”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눅17:10)

#나는무익한종
#정답입니다
#그래서회개합니다
#주님을위한포기가아니라
#주님의잔치에
#나를초대해주셨습니다

#럽앤포토 #천국의야생화
#노래하는풍경

노래하는 풍경 #36

여행 중에 낯선 숙소에 묵게 되면
짐을 풀기 전에
그곳에서 먼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곳에서
있었던 죄악을 회개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못 했던 행동과
모든 음란과 범죄를 회개합니다.
주님, 용서해주세요.
주님의 보혈로 덮으시고
이 공간을 전혀 새로운 곳으로 사용해 주세요.”

나와 상관없었던 죄악이지만,
내가 그 죄악을 대신하여
회개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주님이 내게 그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모든 죄가
우리의 죄임을 고백합니다.
주님 용서해주세요.”

[노래하는 풍경 #36]

#교회의죄는
#교회만의죄가아니라
#몸을이룬
#나의죄이기도합니다
#주님용서해주세요

애굽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에 머무르다가
기근을 만나 애굽으로 내려옵니다.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말씀하셨지만
하늘만을 바라봐야 하는 땅입니다.
우기인 겨울과 봄에 비만 적당히 온다면 ‘비옥한 초생달’이겠지만
비가 오지 않으면 이 땅은 광야와 다름없게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늘 기근의 때에 애굽으로 향할 유혹을 만나게 됩니다.
애굽은 하늘을 바라보지 않아도 살만큼 비옥한 땅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바라보지 않아도 충분히 살만하다면 과연 나는 어디를 향해 걸어갈까요.?

다윗은 그토록 바라던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기뻐하며 이렇게 찬양합니다. (대상16, 시105:14)
“그러나 그는 사람이 그들을 억압하는 것을 용납하지 아니하시고
그들로 말미암아 왕들을 꾸짖었습니다.”
다윗의 찬양에 나오는 이 대목은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의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는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속이는 세 번의 대목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바로와 아비멜렉에게, 이삭이 그랄에서 아비멜렉에서 그렇게 합니다.
우리의 불신앙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때마다 간섭하셔서 그들을 구해내십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그들 또한 주님께서 만나주신 인생들입니다.
과연 주님 앞에서 내가 이루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갈릴리호수에서 제자들은 풍랑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고물에 주무셨을 때는
당신께서 함께 하셨기에 그나마 나은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수님이 부재(不在)하십니다.
5개의 떡과 2개의 물고기로 나눈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고도
밤새 파도조차 거스르지 못하여 제자리에서 맴도는 인간의 한계 또한 우리의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육체의 노곤함, 현실의 한계, 부양과 육아의 어려움..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성경은 그 때의 제자들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막6:52)
하지만 예수님이 내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 분은 임마누엘로 함께 하십니다.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풍랑을 밟고 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막6:50)

주님께서 약속하셨지만, 그 분의 은혜를 맛보았지만
우리의 마음이 둔하여지면 약속의 땅을 떠나 애굽을 향합니다.
잠시 하늘을 손으로 가려보기도 합니다.
광활한 하늘을 작은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둔하여지고, 어리석은 자들을 위해서도
그들을 통한 당신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세상의 왕들 조차 꾸짖으십니다.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에게 할당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도다
그 때에 그들의 사람 수가 적어 그 땅의 나그네가 되었고
이 족속에게서 저 족속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떠돌아다녔도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그들을 억압하는 것을 용납하지 아니하시고
그들로 말미암아 왕들을 꾸짖어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손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들을 해하지 말라 하셨도다” (시105:11-15)

노래하는 풍경 #34

만일 나의 모든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심각한 슬픔과
절망에 빠지게 될지언정

그 실패가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노래하는 풍경 #34]

p.s 다윗은 그의 수많은 시편에서
절망중에서도
주님의 인자와 진실을 노래합니다.

인자라고 번역한 이 말은
단순히 사랑이라는 말로
바꾸어 쓰기에 너무 강력합니다.
그것은 언약적 사랑으로 
영어성경에서는
정황에 따라서 unfailing love(실패하지 않는 사랑)와
같은 말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공경의 첫 걸음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세 아들의 이야기를
성경이 주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함과 같은 자녀가, 노아와 같은 아버지가 이후로도 많았겠지만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홍수심판이후 다시 생육하고 번성하게 된 첫번째 이야기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첫번째 이야기는 역사적인 흐름을 만들어 냅니다.
그 계기가 된 사건을 조금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생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던 갯벌같은 세상에서
노아와 자손들은 농사를 시작했고
생육하고 번성할 것에 대한 주님의 약속을 따라 놀랍게도 포도나무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노아의 아들 함은, 그 열매를 먹고 취하여 장막 안에 벌거벗은 아버지의 하체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저 지나치며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원어적 표현으로는 관찰하고, 주목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함은 자신의 두 형제에게 아버지의 수치를 알렸습니다.

홍수심판은 죄악이 관영했던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하지만 노아의 탁월한 의로움이 그를 구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의 이후 행적과 벌거벗음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노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기인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 벌거벗음을 가리려고 옷을 입은 것과는 반대로
노아는 벌거벗었습니다.
여기서 노아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죄 문제를 가진 사람이었으며,
함을 비롯한 그 가정 또한 이 문제 앞에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성경은 모든 죄를 같은 선상에서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물론,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분명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특별한 죄악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바울은 고린도 교인을 향해서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소리쳤습니다.
또한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음행하는 이를 향해 평화의 창을 던졌습니다.

오늘 본문은 특별히 함이 아버지를 향해 하지 않아야 할 행동을 취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함과는 비교될만큼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수치에 대해 다르게 행동합니다.
그래서 셈과 야벳은 놀라울만한 축복의 예언을 받게 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지막때에 대해 경고합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면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 부모를 거역한단다..” (딤후3:1-2)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음행과 폭행과 같은 죄악에 대해서는 충분히 심각성을 인식합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것에 대해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결과로써 부모를 거역하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결과에 대해 하나님은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27:16)고 엄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도 고르반_ 하나님께 드릴것이라고 말하면, 부모에게 필요한 것이라도 거절할 수 있다.-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로 사역에 대한 무게는 싣지만
그 말로써, 부모님을 사랑하지 않는 변명을 만드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당시 고르반이라는 말처럼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로, 마땅히 부모에게 드릴 것에 대해 거절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부모님은 특별한 무엇이 아니라 그저 따뜻한 말 한 마디. 사랑한다는 말을 바라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옳은 일입니다.
십계명에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약속이 보장된 첫 계명입니다.
그 약속은 ‘네가 하는 일이 다 잘 되고 이 땅에서 장수 할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엡6:1-3)

지금 주님께서 주시는 감동 중 하나는
먼저 용서를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들 중 많은 분들이 부모에 대한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픔은 기계적으로 완전하게 제하여 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아픔은 누군가를 위로하는 주님의 놀라운 도구로 사용될 것입니다.
그 아픔의 깊이가 깊을 수록 그렇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왕이 되시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왕이 되었을 경우에는 그 아픔은 나를 찌르는 도구로 사용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도구로 나를 드리기 위한 시작으로 용서를 말하고 싶습니다.
그 첫 걸음으로 우리의 입술의 고백을 통해 주님께서 일하실 것입니다.
아래의 글을 입술로 소리내며 기도해주세요.

“주님, 우리 부모님을 주님께 올려드립니다.
부모님의 지난 과오를 생각합니다.
노아가 벌거벗어 지은 죄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뒷걸음으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은 것처럼
내 부모들의 벌거벗음을 주님께서 입히신 새 옷으로 덮길 원합니다.
이제 그들의 과오에 대해 비난하려고 관찰하고 주목하는 일을 멈추겠습니다.

나는 오늘 그들을 용서하길 원합니다.
내 이성으로도, 내 감정으로도 그들을 용서할 수 없지만
내 안에 왕으로 계신 주님의 마음에 순종함으로 그들을 용서합니다.

이제 주님께서 일하세요.
내 안에, 그들안에서 주님 일하세요.
왕으로 일하여 주세요.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별

사람의 생이 이렇게 알 수 없는 것이구나.

너무 갑작스러웠던지 장례식에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가까운 지인을 만났습니다.
그를 보자 그제야 내 안에 참았던 눈물과 슬픔이 흘렀습니다.
돌아가신 분은 그렇게 바라던 주님의 품안에 노니는데
남아있는 이들은 빈자리를 그리워 하네요.

나는 지금도 내 곁에 있는 이들이
이 땅에서 영원히 함께 할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루만 살 것처럼 살아간다면
나는 오늘 무엇할까 생각해봅니다.

소성케 할 바람

쉼 없이 내리던 비가 그쳤습니다.

하나님은 땅에 바람을 보내시니 물이 줄었습니다. (창 8:1)
여기서 바람은  히브리 원어로 ‘루아흐’라 표현하는데
이 단어는 성경에서 바람, 호흡, 영, 성령’을 가리킵니다.
바람이 불어 이 땅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모습은
마치 성령님께서 이 땅의 구석을 손수 빚어 가시는 풍경을 연상케 합니다.
홍수심판으로 망가진 세상, 어느 곳에도 희망을 볼 수 없는 세상 가운데
성령님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따라 세상을 다시 만들어 가십니다.
전 세계의 전쟁과 기근과 양극화의 아픔속에
절망을 볼 때마다
이보다 더한 고통 가운데 있던 세상에
바람을 보내셔서 회복케 하시는 풍경을 상상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지만
부흥의 시대를 기록한 문서들을 읽어볼 때면
누구도 거절하지 못할 성령님의 특별한 초대를 보게 됩니다.
그 바람이 불게 될 때 당시의 어떤 유흥가도 예배당이 되어
고함소리 대신 찬송이 울려 퍼짐을 보게 됩니다.
끝없는 기도와 예배도 주님의 영광 앞에 부족함을 보게 됩니다.
얼마전 뉴스에 북한이 종교 탄압을 가장 심하게 하는 곳으로
발표된 기사를 보았습니다.
엄청난 댓글이 달려 있었는데 사람들의 주된 의견은
북한이 잘하고 있다며 응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전혀 소망없어 보이는 이 공간에도 바람이 불길 기도해야 겠습니다.
북한 구석 구석에도 그 바람이 불길 기도해야 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령의 바람을 보내실 때
가장 원인이 된 것은
방주에 있는 노아들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창8:1)
기억이라는 단어는 ‘자카르’인데
성경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그 약속이 때론 더디게 이루어 지는 것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은 당신께서 스스로 이루어 가십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시고 지금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종살이 할 때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탄식하며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습니다. (출2:23)
여기서도 중요한 단어를 만나게 되는데 바로 ‘자카르’ 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한 출애굽의 사건은,
구원의 놀라운 사건은 하나님의 기억하심으로 가능했습니다.
그 기억은 적어도 430년 전,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으로 말미암았습니다.
그 후로도 하나님의 기억하심으로 우리는 수많은 구원을 보게 됩니다.
다윗이 기름부음 받았지만 오랜 세월 망명생활 할 때에도 언약은 여전했으며
선지자 시므온과 한나는 어린 예수님을 보고 그 언약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 천국에 꽃이 피게 해주세요.”
딸 온유가 5살이 되던 해에 자주 하던 기도입니다.
주님, 조그만 아이의 기도처럼
황폐해진 우리 마음에 천국의 꽃이 피어나게 해주세요.

우리 주님은 기억하십니다.
언약하시고, 이루어 가시는 주님께서
당신의 때를 따라 바람을 보내십니다.
그 바람이 내 안에 가득 불어서
천국같은 마음이 피어나게 해주세요.

내가 노래하는 풍경 #33

내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게 무엇인가요?

나는 여전히 악합니다.
선한 것을 기획한다 한들
그것으로 구별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내게 기름 부으시지 않으면
나는 구별된 것도, 
변한 것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누구의 손을 잡기 원하나요?
“다른 누구보다
주님의 손잡기를 원합니다.”
이 고백이 나의 구별점이어야 합니다.

[노래하는 풍경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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