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데반의 죽음은
설교를 채 마치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은 죽음이다.
그의 죽음 앞에서
스데반은 말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행7:56)
스데반은 말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행7:56)
하나님은 스데반에게
하늘나라의 영광을 보이셨다.
하늘나라의 영광을 보이셨다.
사실 하늘이 열리는 모습은
일반적인 우리 눈으로는 보지 못하는 모습니다.
만약 열린 하늘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나는 부끄러울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비교한다.
누구의 삶이 누구에 비해
더 나은 삶인가?
내가 좌절하고 낙담하는 이유도
문제 없는 누군가와 비교했을 때
내 모습은 갈등과 패배가 가득하기 때문이 아닌가?
내가 좌절하고 낙담하는 이유도
문제 없는 누군가와 비교했을 때
내 모습은 갈등과 패배가 가득하기 때문이 아닌가?
눈에 보이는 것과 비교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비교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비교한다.
하지만 마지막에 주님앞에 섰을때
나는 무엇을 부끄러워 할 것인가?
나는 무엇을 부끄러워 할 것인가?
굳이 그때까지 가지 않더라도
지금 열린 하늘 아래서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부끄러워 할 것인가?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부끄러워 할 것인가?
스데반의 죽음은
비참한 죽음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은 아니다. 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아니다. 라고 말씀하신다.
열린 하늘 앞에서 그는
자신의 죽음을 도리어 감사했을 것이다.
나는 열린하늘 아래서
어떤 삶을 살았던가?
오늘 어떤 삶을 살것인가?
어떤 삶을 살았던가?
오늘 어떤 삶을 살것인가?
성령충만을 원어적으로 살펴보면
존재하다는 말 외에 가까이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열린 하늘 아래 사는 삶은
내 안에 계신 주님,
그리고 가까이 임재하고 계신 주님을
인정하는 삶이다.
존재하다는 말 외에 가까이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열린 하늘 아래 사는 삶은
내 안에 계신 주님,
그리고 가까이 임재하고 계신 주님을
인정하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