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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에 능통했을 뿐 아니라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순종하고 행동하기까지 했던
사울은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던 지난 시간이
도리어 하나님을 박해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행9:4)
그가 기존에 이해하고 믿고 있었던
세계, 그 모든 것이 해체되었다.
지난 선지자와 예언자들의 모든 글은
예수님을 정말 만난 순간에 모두 해체되었고
다시 재정립되었다.
머릿속에 철저하게 믿고 있었던 모든 생각은
다메섹에서 모두 해체되었고 예수님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떤가?
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 아니실까?
그래서 청년부시절 수련회에서 나는 기도를 하다가
멈춰버리고 말았다.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으려면
결국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아야 하며
누군가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을 만나야만 한다.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오답이 지워지고
정답을 찾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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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행9:4)
사울은 예수님을 직접 박해하지 않았다.
다만 그를 믿는 이들을 옥에 잡아 넣고 박해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사람들이었고 예수님 자신이기도 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 주님의 백성들은
같은 맥락에서 모두 예수님이시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고전 12:27)
몸이며, 지체일 뿐 아니라 그 분 자체이시다.
가장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으로
여기신다.
아프리카 차드에 올해 다시 우물을 만들려고 한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인 동시에
나의 형제이며, 몸된 지체이며, 동시에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예수님은 박해 당하는 자들을 알고 계신다.
자신의 피부의 촉감을 자신이 모를 수 없듯
자신이 당하는 일을 모르는 이는 없다.
예수님은 박해 당하는 자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자신이 박해 당한다고 느낀다.
나의 아픔을 아실까?
그 분이 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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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던 사울은 (행9:1)
자신의 믿는 믿음을 행동하기 위해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지역 너머의
외국.
예루살렘에서 약 240킬로미터나 떨어진
이 곳 다메섹에 까지 향했다.
위협과 살기 뿐 아니라
온갖 지식과 의로써 무장된 사울에게
주님의 빛이 비춰졌을 때
땅에 엎드러질 수 밖에 없다.
사울과 함께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한
무장한 무리들도 이 빛 앞에서 단숨에 무력하게 되었다.
주님의 빛 앞에 무엇이 설 수 있겠는가?
나는 무엇으로 가득차 있는가?
내가 가진 것들을 해체하기 위해
나를 무장해제 하기 위해
주님 나를 만나주세요.
완전한 의인이라 믿었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죄인들의 괴수라는 말로 자신을 이해했다.
주님의 빛 비춰주세요.
그러면 내 안에 주님의 은혜가 드러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