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간은 상대적이다.
느리게 흘러가는
긴박한 시간속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던
사울이 이제는 상황이 뒤바뀌어
유대인들의 살의앞에
사울은 광주리에 숨어 성벽을 내렸다. (행9:25)
복음으로 이제 그를 따르는
새로운 제자들이 생겼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지고 있다.
수많은 목숨의 위협앞에
그는 자신의 목숨을 아끼고 있지만
사실은 자신의 목숨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향후의 걸음, 복음의 기회를 살리고 있는 것이다.
긴박한 순간에 나의 행동이 이런 저런 목적이다라고
명확하게 구분지을 수 없다.
우리의 긴박한 순간에는
그저 본능으로 결정하고, 본능으로 움직이게 되기 때문이다.
다만, 그동안의 기도들,
그 기도는 우리 삶의 방향을 만든다.
그 기도의 방향을 따라 주님이 이끄신다.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시고
도울 사람을 붙여주시고
숨가빴던 시간이 다 흘러간 후에야
겨우 하나님의 은혜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해서
긴박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 잘될거야. 라고 마냥 응원할 수 없는 것은
주님의 계획이 다르고, 사건을 치르고 난 후와 그때의 감정은
전혀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켜보고 기도하고 위로하고
주님 바라보기를, 마치 처음 그렇게 하는 것처럼
주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이다.
2. 사울은 이제 자신이 적대했던 제자들에게
손 내밀며 사귀기를 원했다. (행9:26)
사도행전 본문에는 언급하지 않지만
그의 서신서를 보면 사울은 아라비아와 다메섹을 거쳐
3년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사람은 복음으로 한 순간에 변할 수 있다.
동시에 사람의 변화는 시간이 필요하다.
사울에게도 적어도 3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눕고 기고 걸음마를 거치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하며
겨우 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꽤 긴 시간이 흘렀지만
제자들은 사울과 사귀기를 두려워했다.
제자들조차 마음에 거리낌과 두려움이 있었다.
사울의 핍박은 실제적이었고
그 핍박을 직접적으로 당한 피해자들이
이들이거나 직간접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상처는 우리의 감정을 건드린다.
사람은 옳은 것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니라
옳다고 느껴지는 것을 따라 걷게 된다.
믿는 자들을 볼 때, 교회 지도자들을 볼 때
우리는 그들을 마치 성인으로 기대한다.
그 기대가 깨지면 전에 없던 실망을 하게 된다.
직분과 역할의 구분, 연약함을 품은 한 사람이다.
다만, 바나바에게 하나님은 그런 성품과 은혜를 주셨다.
사울은 공동체에 이어주는 다리,
화평하게 만드는 직분을 가진 자.
위로의아들, 바나바의 역할은
한 사람을 공동체 가운데 세워주는 일을 맡았다.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아니라, 드러나야 하는 사람을 드러내는 일
화려한 무대 위의 대단한 메세지를 가진 자 뿐 아니라
갈등하고 깨진 관계속에서 서로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한 사람.
나는 오늘 누구의 바나바인가
3. 다소 출신 사울은
다소로 향했다. (행9)
자신이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이 복된 소식을
다른 곳 보다 먼저 자신의 출신지에서 부터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울이 예루살렘을 떠난 후 교회는 평안을 찾았다.
사울이 떠난 후 소란이 잦아들었던 때문일까?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율법에 능했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사울이
이제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예루살렘을
흔들어 놓고 떠났다는 사실이다.
사울의 행적을 보고 의문을 표했던 사람중
상당수가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갈등이 있지만, 문제 같아 보이는 그 갈등을 통해서
결국 주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