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같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부담스럽다.
혹, 앵무새가 되는 것은 아닐까?
혹, 앵무새가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같은 이야기가 아닌 다른 이야기가 없는게 아니다.
신대원 시절, 설교학 시간에 최고점수를 받았다.
새로운 말씀을 준비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가장 들려주고 싶은 메세지는 무엇일까?
내가 청년시절로 돌아간다면
가장 듣고 싶은, 혹은 필요한 이야기는 무엇일까?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는 필요하지만
방법론이 유효하기 위해서 필요한 내용은 무엇일까?
두려운 세상,
하나님은 과연 나와 함께 하시는가?
그 하나님이 지금도 여전히 일하시는가?
하나님이 여전히 일하시는 분이시고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며
두려운 세상 보다 크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전제해야지, 그 다음 걸음을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적부터 예수님을 믿었지만
초, 중, 고, 대, 청년시절, 어쩌면 지금까지도
예수님을 믿었지만
그래서 의인이지만 당연하게도 죄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 괴리감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바울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에 도착하고,
결례를 행하자마자
결례를 행하자마자
유대인들로 인해 소요가 발발하고 바울은 체포당했다.
그는 막사로 들어가기 전에 천부장 루시아에게
연설할 기회를 요청하고,
연설할 기회를 요청하고,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님을 전한다. (행22:1-11)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님을 전한다. (행22:1-11)
흔히 복음만을 전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복음이 제한되고 한정된 단어의 나열을 열거하는 것으로
협소하지 않다.
협소하지 않다.
나에게 복음은 무엇이며
그들에게 필요한 복음의 방식은 무엇인가?
복음은 변하지 않지만
이 시대 필요한 복음의 언어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