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올 때
이삿짐센터의 실수로 냉장고가 넘어졌다.
바닥과 장식장이 다 부서졌던 기억 때문일까?
중풍병자였던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가기 위해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누운 상을 달아 내리는 모습을 계속 생각하게 된다. (막2:4)
지붕을 뜯어내는 행위,
당시 시대적인 상황을 다 알지 못하지만
친구들의 절박한 마음과 함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풍경을 생각하게 된다.
나는 혼자의 불편함은 감수할 수 있지만
내가 가진 믿음 때문에 상대방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에 대한 조심스런 마음이 있다.
그런데 본문은 믿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무엇이 믿음인가?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
나아오는 것 자체가 믿음이라기 보다는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예수님께 나오왔을때
예수님이라면 고치실것이라는
믿음이 아니었을까?
여기서 중요한 지점 하나는,
중풍병자가 한 일은 없다는 점이다.
그는 말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그들과 함께 했고
친구들이 지붕에서 달아내렸다.
그런데 본문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말한다. (막2:5)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그리고 치유함을 선포하신다.
구원의 사건은 개인에 머무르지 않는다.
개인의 믿음에 국한되지 않고
구원은 공동체성을 띄고 있다.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속으로 고소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죄 사함이 쉬운 말인지?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는 말이 쉬운 말인지?
이 말을 판단하기 위해
중요한 측거점은 책임과 믿음에 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자면
죄사함은 보이지 않는 영역이다.
중풍병자가 일어나 걷는 것은 기적이다.
보이지 않는 영역은 알 수 없지만
보이는 영역은 당장 확인 가능한 문제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확대하게 되면
일어나 걷는 것은 기적이지만
죄 사함에 관한 문제는 신적 영역이다.
그래서 둘 중에 쉬운 말은
상을 가지고 걸어라는 말이다.
예수님의 선언으로 중풍병자가 치유함을 얻었을때
사람들은 다 놀랐다.
놀랐다고 번역된 원어는
말그대로 기절할 만큼 크게 놀란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한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게는 무엇이 쉬운가?
눈에 보이는 변화에 반응할 것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