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 가면
티비에 빨려 들어간다.
나름 절제를 하지만
집에 티비가 없어서 평소에 못보던 신세계를 경험한 탓이다.
집에 있을때는 아이들이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말씀암송을 하지만
이렇게 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하지 못한다.
무엇을 보느냐, 무엇을 경험하느냐.
가치관과 생각을 만드는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
오랫동안 경험한 가치는 결국 눈에 보이는 것들이다.
그속에서 이신론을 믿거나, 현실주의자가 되거나
자기가 중요하다고 하는 근거 위에서 사고하게 된다.
예수님이 누룩을 이야기했을때
제자들의 머릿속에는 온통 떡에 대한 고민이 가득했다.
배에 올라탈 때에 자신들이 떡을 준비하는 것을 잊었기 때문이다.(막8:16-18)
하나 밖에 없는 떡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우리의 실제 삶에 대한 고민이다.
하지만 그들이 잊어서는 안되는 것,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대한 것이다.
지금 누구와 함께 있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한지를,
듣지 못했으며, 기억하지 못하였음을 탓하신다. (막8:17-18)
함께 하시는 이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 분과의 사귐을 통해 알 수 있다.
전에 나아가지 못하는 믿음의 발걸음, 순종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지금까지 인도하신 그 사귐의 시간이 근거가 된다.
하지만 다시 눈에 보이는 것을 몰두하면
떡에 집중할 수 밖에 없다.
세상의 가치가 그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전케어와 함께 아프리카 사역할 때,
두 눈을 보지 못하는 목사님이 계셨다.
한 눈을 수술하고 하루만에 눈이 희미하게 회복되는 것을 느끼고,
나머지 눈까지 내어맡겼다.
아마도 세상에 이같은 기회는 없을거라 믿었으리라.
누룩은 번져간다.
죄의 누룩은 알지 못하는 사이 번져가고,
하나님의 나라도 누룩처럼 번져간다.
한쪽 눈이 회복되는 것을 경험하고, 무리를 해서라도
나머지 눈을 내어 맡긴 것처럼.
예수님은 벳새다에서 맹인을 치유하셨다.
눈에 침을 뱉으시고, 손을 얹고 물으셨다.
“무엇이 보이느냐?” (막8:23)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맹인,
마치 제자들조차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마음이 둔한 세대와 같다.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주님의 말과 생각이
들어올 여지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수세기동안 쌓여왔던 자신만의 방식과 생각이 있다.
예수님이 말하는데,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결코 당연하지 않다.
그래서 수로보니게 여인이나, 백부장의 믿음이
특별한 것인지도 모른다.
비로소 보게 된 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막8:26)
여러 군데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일하심에 대해
침묵하길 말씀하신다.
하지만 소문은 더욱 퍼지고, 사람들은 더욱 예수님께 몰려온다.
과연 이 소문과 기쁨을 막을 수 있을까?
마을에 들어가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한들
숨겨지지 않는 비밀이 있다.
마치 누룩과 같이 퍼져가는 하나님 나라가 있다.
감출 수 없는 기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