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을 줄 수 없는 아픔을 들을 때면
나는 무엇을 답해야 할까?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12:2)
관념적인 답이지만,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탁월한 답인지 모른다.
지쳐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생각하면 알 수 있다.
죄와 싸웠지만 아직 피를 흘릴 정도로
대항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싸워야 하는 이유도 예수님을 보면 알 수 있다.
크고 대단한 파도와 같은 유혹은
주님을 의지해서 넘을 수 있겠지만
내 힘으로 넘을 수 있을 것 같은
아주 사소하고 반복된 유혹 앞에
넘어지는 것이 유치한 인간이다.
넘어질 수 밖에 없는 순간에
예수님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넘을 수 있는 순간에도
예수님을 불러야
말 그대로 사귐의 시간이 쌓인다.
주님과의 동행을 말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대단한 사건을 경험하느냐가 아니라
평범하고 반복되는 일상속에 주님을 초대해야만 한다.
그 시간 속에서
주님의 훈계와 책망을 만난다.
그때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예수님께 답이 있다.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고
아들로 받으신 사람들을 연단하신다. (히12:6)
내가 믿어야 하는 것은
믿고 싶어 하는 실루엣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드러난 주님의 성품이다.
징계가 없으면 아들이 아니다. (히12:8)
주님, 나를 엎어서라도
넘어뜨려서라도
내가 주님의 아들로 살아갈 수 있도록
찾아와주세요.
이 기도는 두렵다.
이미 너무 많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기도하는 것은
아프고 쓰라리지만 그 시간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징계의 이유는
나의 유익을 위함이며,
주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심이다.
주님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예복을 준비한다.
즐거움도 아니고 괴로움으로 보이지만
그 시간을 통해 결국
의로운 평화의 열매를 맺게 만든다. (히12:11)
주님의 약속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가.
징계할 때 나는 징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징계하는 채찍이 아닌
주님의 마음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내가 걸어갈 길은 단거리가 아니라
인생이라는 멀고 먼 길이다.
알 수 없는 마라톤 경주 앞에서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아멘.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