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인지 모호한 그 순간에도
순종하는 편을 택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좋을 선택만으로
치우칠 수 있기 때문이며
그런 시행착오들이 쌓이면 분별까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전제에는 기도와 말씀이 있다.
기도하지 않으면 주님을 알 수 없고
말씀을 모르면,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하나님의 뜻인지 어떻게 아느냐?”
라고 자주 물을 때가 있다.
이 경우는 내 개인에 속한 문제가 아니라
보다 공적인 상황에서의 문제이다.
혼자의 책임이나 대가지불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함께 속해있을때의 문제이다.
그때는 연습의 차원이 아니다.
오래전, 청문회에 나온 교회집단이
서로 하나님앞에 자신의 정직함을 이야기했다.
하나님을 개인의 구원의 방편으로 사용하게 되면
우리는 거짓 예언자들이 되어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을 위장하게 된다.
거짓선지자들은 백성들에게
이는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고
말씀을 구별하여 이야기한다. (렘23:33)
왜 그렇게 말했을까?
내 말에 주목하여 보라는 뜻은 아니었을까?
세상에 많은 메세지가 있다. 너무 많은 메세지중에
내가 진짜 메세지라는 표식과 같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짜 메세지는 무엇일까?
집으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유튜브 몇 개를 보다가
마음이 어려워졌다.
양 끝단에서 서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다투고 있을때 나는 하나님이 한 쪽만의 손을
들어주실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힘의 균형과
정치와 문화와 경제와 이 모든 세력을 통해
자연스럽게, 아주 자연스럽게 주님의 뜻을 이루신다고 믿는다.
그제 시골에 있는 교회서 청년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있었다.
담당하시는 교역자는 갈 길 잃은 청년 몇 명을 자신의 집에서
함께 길러내고 있었다.
그 앞에 나는 오답을 걸러가며
주님의 뜻을 고민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큰 변곡점을 준비하셨다.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을 구원하게 하셨다.
동시에 요셉이 경험한 유혹과 위기와 갈등과 선택 또한
현실속에서는 유기적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하나님이 전혀 없어 보이는 순간,
그래서 이신론적인 하나님이라고 믿을 수 밖에 없는 현실앞에
우리는 믿음이 어디인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