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도 갈등 없이
단 한 번도 흔들림 없이
단 한 번도 아픔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하면 상상 속에 존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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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문제 없는 사람은 없어도
아무 갈등도 없는 사람은 말이다.
무척 긍정적으로 사고하고 관계적인 사람이어서
그는 갈등 앞에서 더욱 도전적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다만 너무 긍정적이어서 사려 깊지 못할 수 있고
디테일하지는 못할 수 있으며
다른 이의 문제 앞에 공감하지 못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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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큰 문제 없이 관계하는 사람들 중에
목회자나 상담자는 그들의 사역이 성장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다른 이의 실패나 아픔을
공감해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아픔과 눈물을
체휼하신 분이라는 사실이 주는 위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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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말씀 앞에 오늘 서려는 이유는
그저 도덕적인 관점이나 판단이 아니라
한 사람의 죄인으로, 그분의 피조물로
서기 위한 결단이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기독인이라는
종교를 가진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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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가나와 한나가 동침했을 때
여호와께서 한나를 생각하셨다. (삼상1:19)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의지의 경계를 사람은
알지 못한다. 그 신비 속에서 우리는 하늘의 문을
두드린다. 하나님의 신비가 나의 일상에
어떻게 침투하시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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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는 그의 아들 사무엘이 젖떼기까지
품었다가 여호와께 바친다고 말했다.
엘가나는 한나의 말에 힘을 실으며 답한다.
“오직 여호와께서 당신의 말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삼상1:23)
당시 남편으로 아내의 서원을 무를 수 있었지만
그 또한 하나님께 가장 귀한 것을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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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드릴 당시의 종교적 상황은
암흑과 같았다. 엘리뿐 아니라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교회를 더럽히고 있던
시절이었다. 악한 우리 안에 자신의 순전한
신앙을 드릴 수 있을까?
하나님이 받으시고, 하나님이 갚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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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한나를 생각하셨다는 단어는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 하사”(삼상 1:11)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통곡하며 기도할 때
기억해달라고 말한 단어와 같다.
기도의 임계점.
그 한 방울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때를 알지 못해서 하나님을
무능력하거나 무관심하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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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과 흔들림과 아픔은
내가 문제 많음을 증언하는 열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