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풀 수 없는 문제들이 가득합니다.
하나님 언제까지 입니까?
우리의 인생은 어디를 향해 갑니까?
당신은 왜 무능력한 분처럼 침묵하십니까?
헤롯은 세례요한을 참수하고
야고보를 참수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반응을 살핀 후 그들의 호응에
이제는 베드로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
절대로 도망가지 못할 상황,
네 명이 한 조가 되어
네 개의 조가 베드로를 지키도록 했습니다.
절대로 풀지 못할 인생의 감옥.
예수님을 믿는데 그는 곤경에 빠졌으며
더더구나 교회의 수장이 내일이면 죽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기도와
주의 천사가 상황에 개입하여
그는 드라마틱하게 살아났습니다. (행12:1-12)
천사는 갇힌 베드로에게
“급히 일어나라”고 지시하고는 그의 탈옥을 이끕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셨다면
급히 일어날 게 뭔가요?
그냥 느긋하게 움직여도 되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그 상황에 구체적으로 지시하십니다.
우리의 만남, 일, 기다림. 이 모든 인도에는
그 분의 질서가 있습니다.
언제든 멈추고, 언제나 절제를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특별히 원하시는 주님의 때가 있습니다.
그 때를 놓치면 그 순간은 오지 않습니다.
오늘 새벽처럼 주님이 내게 ‘급히 일어나라.’ 말씀하시면
그 곳이 어디건, 죄 가운데 이건, 일 가운데 서건, 쉼 가운데 서건
우리는 일어나야만 합니다.
일상 속에 그런 시간이 쌓여야만
주님과 호흡하며 걸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내가 알지 못하는 지점에 있습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감사하게도 이제는 죽음. 그 두려움의 대상이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죽음 보다 크신 분, 죽음 보다 사랑하는 분이
그의 안에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리운 예수님앞에 얼굴과 얼굴로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하지만 오늘이 아니었습니다.
천사가 찾아온 날은 죽게 되었다고 생각한
바로 전 날 밤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시간을 알지 못합니다.
탈옥에 성공했으니
하나님이 그를 구했으니
이제 그는 두려움 없이 거리를 활보해도 되는 걸까요?
하나님이 일하시기에
우리는 아무 거리낌 없이 살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일하심에도 불구하고
야고보는 칼로 죽임 당했습니다.
베드로가 잡혔을 때처럼 야고보가 잡혔을 때
교회는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주님과의 동행이 나를 구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아침이면 수배자가 되어 피해다녀야 하며
여전히 생명의 위협이라는 현실 앞에서
믿음과의 교차점을 찾아 고민하며 걸어야 합니다.
탈옥에는 성공했지만
이제 그는 수배자가 되었습니다.
보니발 아내의 유혹에서 벗어났지만
그는 강간미수범이 되었습니다.
창을 열고 하루 세 번씩 기도했지만
사자굴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인생은 알지 못하는 것 투성입니다.
여전히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믿음.
그 믿음에 반응할 뿐입니다.
그렇게 오늘을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