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에서 헌금을 두고
죽임을 당한 인물이 등장한다.
단순히 땅값의 일부를 숨긴 죗값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속이고 시험하는 행위였다.
그 일 이후,
온 교회와 소문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행5:11)
하지만 이 두려움은 하나님께 대한
마땅한 반응이었으며,
초대교회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는 이들이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행5:14)
그 후로도 교회사에서 하나님을 속이는
많은 이들이 존재했겠지만
이들처럼 죽지는 않았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살필 수 있는
기준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레위기의 제사법과 법규들 사이에
두 번의 죽음이 등장한다.
하나가 잘못된 제사를 드려서 죽임 당한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이고
그리고 또 하나가
아버지가 이집트인이지만 어머니가 애굽인인
이스라엘 사람 중 가장 경계에 속한 사람이다.
이스라엘의 가장 중심에 있는 사람과
가장 경계에 있는 사람의 죽음을 통해
그리고 이 둘 사이에 속한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주님의 마음과 기준을 살필 수 있다.
나답과 아비후의 죽움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을까?
하나님을 믿는 공동체,
그리스도인의 중심에 예배가 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하지만 나답과 아비후가 드린 잘못된 불에
하나님은 진노하셨다.
예배의 형식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고,
우리의 믿음을 담보하지 않는다.
수양의 번제와 살진 송아지를 가져오지만
그것은 내 마당만 밟을 뿐이라고 말씀하신다.
구제와 헌신, 봉사,
심지어 선지자 노릇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때에 주님은 내게
나를 모른다고 말씀하실지 모른다.
그리고 경계에 속한 이의 죽음.
디브리의 딸의 죽음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저주하는 말에 있다. (레24:11)
그의 죽음에 애석한 부분을 찾을 수 있다.
이스라엘인이지만 혼혈인으로
이스라엘 사람과 싸우다 벌어진 일이다.
그 싸움의 원인은 알지 못하지만,
싸움에는 일방적으로 벌어지지만 않는다.
이 사건을 아주 단순하게만 본다면
싸움이 문제가 아니라, 저주하는 말이 문제가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머물 때
백성들은 모세와 목마름으로 다투었다.
목마름 자체는 생존의 문제였지만
성경은 여호와를 시험하는 행동이라 말한다. (출17:2)
그리고 그곳 지명을 맛사 또는 므리바,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다고 말한다. (출17:7)
일상을 살아간다.
하나님이 계신가 안 계신가
경계에 속했던 디브리의 딸이
싸움 중에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고 저주하였던 것처럼.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도
사람들이 진영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 죽이지 않는다.
성경은 이렇게 명했지만 이를 지지하지 않는
모순을 보이기도 한다.
다윗은 동해동형법의 원리를 지키지 않고
끊임없이 사울에게 기회와 용서를 주었다.
예수님도 간음한 여인을 용서했으며,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대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성경 전반에 걸쳐 보증하고 있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주님이 억울함을 갚아 주신다는 내용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그리고 디브리의 딸의 죽음을 통해
주님은 내게 말씀하시는 것들은 명확하다.
오늘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대단한 가치나
슬로건을 내건 행동 강령과 같은 것이 아니다.
임마누엘이신 주님의 이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의 일상 속에 함께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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