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때 아이들에게 나니아연대기를 보여주었다.
사실 오래전부터 보여주고 싶었던 영화지만
아이들이 이해할만한 나이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반지와 제왕도 보여 주고 싶지만
그건 앞으로 몇 년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아이들은 겨우
터키 과자 하나에 배신을 하느냐며
흥분했지만
사실은 그 모습이 매일 우리의 모습이라 말해주었다.
아슬란이 없는 나니아의 전쟁을
자신의 힘으로 싸워 이기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아이들은 또 안절부절하기 시작했다.
“왜 아슬란을 찾지 않아!
안돼!
왜 무모하게 전쟁을 벌이는 거지?”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라면
마녀와 손을 잡아도 상관없는
왕들의 욕심 앞에서 아이들은 소리 질렀다.
그게 매일 일상 속에 만나는
우리의 모습인데 말이다.
내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것이 얼마나 악하거나,
얼마나 선해 보이건 상관없지 않은가?
내 뜻이 이루어지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속기 쉬운 유혹인가?
기도하지만
하나님과 관계없이
뜻만 이루어지면
상관없지는 않은가?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돌을 떡이 되게 한다던지
구원할 능력을 갖기 위해
무릎 한 번 꿇으면 된다던지,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해
요단을 앞에 두고
찾아온 이에게
너는 내 편인지, 혹은 적의 편인지 물었다.
그게 중요하다.
내 편인가? 나와 싸울 상대인가?
그는 말했다.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수5:14)
아니라는 말은
내가 가진 수많은 질문을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그리고 이어 말씀하셨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수5:15)
내가 선 곳은 어디인가?
전쟁을 앞에 둔 여호수아에게도
망명자로 양을 치던 모세에게도
주님이 부르시는 그곳이 어디이건
거룩한 곳이 될 수 있다.
아슬란이 빠진 전쟁을 싸우고 있지는 않은가?
“아슬란을 위하여”
나니아인들이 자신을 위한 싸움을 싸우다가
아슬란을 군대 대장으로 모시며 바꿔 외친 말이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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