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원수가
드디어 사라졌다.
사울 왕의 죽음에 다윗은
전혀 즐거워하지 않는다.
자신의 옷을 찢고
활의 노래, 애가를 지어
자신의 편인 유다 족속에서
가르치라고 명령한다.(삼하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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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적으로 다윗은
사울에게 고통당한
시간을 살았지만
도대체 다윗의 기억과 마음은
길고 긴 고통의 시간 동안
무엇이 자라나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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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이 정치적이고 전략적인
사람이라서 이스라엘의 통일을
준비하느라 연기한다고
폄하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원수를 위해 울고
기름 부음받은 자에게 손댄
사람을 처단하는 다윗이
연기였다고 가정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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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그의 일생동안
이 연기를 계속 이어나간다.
원수의 가문에서 맺은
왕의 자손을 자신의 식탁에 올리고(삼하9)
적의 장수의 죽음 앞에도
소리 높여 애도한다. (삼하3:2)
적군의 왕을 암살한 이들을
악인이라 규정하고 (삼하4:11)
자신을 반역한 압살롬의 죽음에는
식음을 전폐할 정도였다. (삼하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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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의도가 자신의 성격이나
기질을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백성 앞에
계속 이어나가는 일관성을
습관, 혹은 경향성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런 경향성을 만드는 시간도
오래 걸리지만, 오래 걸려 만든 습관을
다시 뒤집는 것도 어렵다.
성경 전반에 언급한 다윗의 울음을
하나님은 사랑하셨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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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울음은 자신의 사정이나 고통에만
터지는 샘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자신을 찾았을 때
외모가 아닌 중심을 바라보셨듯,
사람의 존재를 존재 그 자체로
바라보는 다윗의 시선.
그래서 원수의 죽음들의 죽음마다
다윗은 옷을 찢고 애가를 부르며 슬퍼한다.
내 문제 만을 기도하는 한계를 넘어
함께 살아가는 존재를 위해 아파하며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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