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권세 있다.
무엇인가를 살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다.
그래서 돈이 가진 권세는 실제적이다.
하지만 내가 믿는 하나님은
돈의 권세보다 더욱 실제적이다.
다만 차이점은 내가 부릴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일뿐,
예수님은 내가 부리는 분이 아니다.
내가 그 분 아래 속해야 한다.
가난하고, 부족하고, 배고픈 빈들의 풍경이
최고의 잔치로 변했다.
오늘의 절망을 주님께 올려드린다.
상상할 수 없는 주님의 잔치에 나를 맡기리라.
주님은 말씀하신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막6:37)
그 분의 통치를 믿는다면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사촌의 죽음.
세례요한이 살로메의 춤사위앞에
허무하게 죽음을 당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가까운 친척이다.
세례요한의 장사 이후에도 예수님은 당신의 길을 걸어가신다.
슬픔과 절망이 가득한 세상에서
여전히 걸어가야 할 길이 있다.
예수님 주변으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예수님과 제자들은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
“외딴 곳으로 가서 잠깐 쉬어라.” (막6:31)
나는 워커홀릭이었다.
많은 일을 감당하고 해내는 일,
그것이 멈췄을때의 두려움을 알고 있다.
하지만 쉼이 없으면 다음 걸음을 갈 수 없다.
멈춰서면 앞서 가는 사람들의 등이 보이고
뒤쳐지는 자신을 보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그렇지 않다.
지상 나라의 셈법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지금 내가 선 곳에 분주함들을 잠시 뒤로 하고
외딴 곳으로 가서 잠깐 쉬어라.
사람들은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재공급을 말한다.
그것은 일부 옳은 말이기도 하지만
이 말로써 모두를 밀어붙여서는 안된다.
예수님에게 큰 무리가 나왔다.
불쌍히 여기셔서 가르치셨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의 목자가 되어야 할 지도자는
왕궁에서 술에 취해 선지자를 처형했고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달리,
율법 그 자체에 취해 있었다.
예수님의 가르침,
여기에 길이 있다.
백성들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말해준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길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가?
무리를 보시고, 나를 보시고 주님이 불쌍히 여기서면
나는 빈들에서도 살 수 있다.
제자들은 군중을 위해 2백 데나리온의 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약 2천 만원 정도다.
예수님 누구신가?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피조세계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음을 보이신다.
그저 주린 배를 해결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고,
열 두 바구니에 차고 넘쳤다. (막6:42-43)
주님의 잔치, 주님의 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