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나는 기도했다.
세상에 많은 감정들이 있을텐데
그것을 이해하고 경험하기를..
지금은 차마 그것을 기도하지 못한다.
의도는 좋았으나, 내가 그 감정을 다 견디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순간순간의 마음 조차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할때가 있다.
아무도 위로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절망 앞에 눈물 흘리던 그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위로의 말을 할 수 있겠지만
내 위로의 말이 정말 위로가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그에게 말했다.
지금 이 시간 유일하게 위로자가 되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몸소 시험을 받으시고 고난당하셨기에
우리의 모든 눈물을 아시는 분이시기에 위로할 충분한 자격이 되십니다.
그래서 그는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습니다. (히2:18)
그 분은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다.
예수님은 긍휼과 믿고 의지할 만한 분이시다.
신실한으로 번역된 단어 ‘피스토스’는
성경의 많은 곳에서 충성으로 번역된다.
충성스러운 종,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 ..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서 강조하시던 그 신실함은
바로 예수님의 성품이다.
나의 죄와 허물,죽음의 문제 앞에서
죽음으로 인해 죽음의 권세를 가진 마귀를 멸하기 위해
혈과 육에 속하였다.
예수님이 혈과 육에 속한 이유는
구속해야 할 사람, 곧 내가 혈과 육을 가졌기에
신이 인간의 자리로 성육신한 것이다.
거닐 수 없는 더러운 곳에서 그는 사셨고, 고난당하셨다.
마지막 형틀에서 그는 모든 저주를 받아내셨다.
그로 인해 평생 노예로 매여 살아야 할
나를 구속하셔서 풀어주셨다.
예수님은 왜 고난당하셨는가?
그 분은 아들 아닌 자들을 아들의 영광의 자리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이다.
곧 우리를 위한, 나를 향한 사랑이다.
그리고 영광의 자리는 어디인가?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것,
함께 고난에 기쁨으로 참예하는 것.
그리고 과연 나는 그 길을 갈 수 있는가?
그조차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오늘 예수님과 함께 걷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