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나는 굳건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강사의 자격으로 온당한지 모르겠습니다.
온통?흔들리는 삶,
그것이 두렵고 불안할 때가 많습니다.
흔들리는 삶 자체 보다 내가?염려하는 것은
쉬운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심장이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저 쉬워 보이는 선택을 할까 두렵습니다.
마치 주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선택하고 살아갈까 두렵습니다.
하지만 위로가 되는 것은
성경 속에 누구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야곱과 요셉, 모세와 다윗,
엘리야와 세례요한이 그랬습니다.
가장 극심한 환란에 처했던 욥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친구들과 벌인 논쟁의 대부분은
이 환란이 어디서 비롯되었나 하는 것입니다.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23:10)
우리가 가는 길을 우리는 알지 못 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을 우리는 알지 못 합니다.
시간이 지나 돌아보았을 때야 웃을 수 있겠지만
당장은 한 치 앞도 알지 못해 두려워 떠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날마다 옳으시며, 선하신 주님이
나의 가는 길을 아신다는 말은 얼마나 복된 말인가요?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자에게
사람들은 이 장애가 누구의 죄 때문인지를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환난은 죄로 말미암은 것이 분명하다는 사람들의 인식에서
시작된 이 본문의 마지막은 극적으로 역전되고 맙니다.
보지 못하던 자는 보게 되었고
본다고 자부하던 자는 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요 9:39)
전에 맹인이었던 자는
예수님을 향해 선지자로, 이후에는 주님이라 고백하며 절하였습니다.
절하였다고 번역된 이 단어는
주인의 손을 핥는 개처럼 키스한다는 의미와의 합성어로써
주인의 손을 핥는 개처럼 키스한다는 의미와의 합성어로써
성경에서는 주로 주님을 향한 경배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네가 태어나면서부터 죄 속에 파묻혀 있었으면서
어떻게 감히 우리를 가르치려 하느냐?” (요9:34)
바리새인들의 호된 비난과 함께 그는 결국 회당에서 쫓겨났습니다.
바리새인들의 호된 비난과 함께 그는 결국 회당에서 쫓겨났습니다.
이 현실을 피하기 위해 그의 부모는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회피했습니다.
회당에서 쫓겨난다는 말은 공동체에서의 완전한 퇴출과도 같은 말이며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나 생계뿐 아니라 생명까지도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눈이 치유된 것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행진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그는 피하지 않음으로 결국 환란에 맞닥뜨렸습니다.
그로 인해 주님은 그를 다시 만나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요9:3)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예수님이 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제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다르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저 그의 육신의 눈을 뜨게 한 것에?그친 것이 아닙니다.
맹인의 눈을 ‘떴다’고 번역한 단어는 (요9:14)
‘열다’라는 의미로써 흔히 성경에서 ‘하늘이 열린다’라는 표현에서 사용됩니다.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의 규정에 얽매여 안식일의 주인을 보지 못하는 몰이해와 부정
심지어 부모의 회피 속에서도
맹인이었던 자는 예수님이 진정 누구인지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린 것입니다.
문제의 해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 너머의?하나님의 일,
우리의 삶의 모든 정황 속에서
예수님이 진정 누구인지를 보고 깨달을 수 있는?눈을 열어주세요.
황무지에 꽃이 피는 것처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