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시절에 나는,

. 3분 소요

누군가 내게 불안을 물었습니다.
작가님도 불안하실 때가 있나요,
만일 불안하다면 어떻게 하시나요.
이 질문에는 내가 불안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는
짐작이 담겨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꽤 오랜 시간 불안에 내몰린 채 살아왔으니,
마치 내성이 생긴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모두에게 불안이 있다고 말합니다.

언젠가 후배가 물었습니다.
선배가 오디세우스라면 세이렌의 소리를 듣겠습니까.
나는 듣겠다고 답했습니다.
각자의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욕망이라 여기지 않을 뿐, 누구에게나 욕망이 있습니다.
선한 욕망까지도,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는 욕망까지도.

같은 맥락에서 나에게도 불안이 있습니다.
유리에 대한 트라우마를 들었습니다.
깨진 유리 파편의 기억 때문에 유리잔을 쓰지 못한다고 합니다.
나의 불안은 조금 다른 자리에 있습니다.
한쪽 발뒤꿈치에 수술 자국이 있습니다. 유리가 박혔던 자리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두렵지는 않습니다.
군대에서 축구에 동원될 때 핑계가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눈이 색약인 것도 그렇습니다.
보지 못할까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색약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층위를 보게 합니다.
다만 보지 못하기 때문에 책임지지 못할까 두려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두려움은 책임지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책임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 주님은,
내가 너의 아버지가 되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이 당시 내게는 복음과 같았습니다.
내가 책임져야 할 짐을 주님이 책임져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든든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실제 느낀 삶은 괴리가 있습니다.
내가 책임져야 할 것 같은 낭떠러지의 아찔함을
얼마나 많이 경험했는지 모릅니다.
그 아찔함이 아니었으면 나는 여태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고,
앞으로 걸어 나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나를 흔들지 않으셨습니다.
흔들어서 바뀌는 것도 없기에 흔들지 않으셨나 봅니다.
다만 내가 바뀔만한 급소들을 이리 저리 흔드셨습니다.

여전히 앞으로도, 평생 흔들리겠지요.
그때마다 기억합니다. 주님은 누구신가요.
그러면 흔들림 속에서 주님의 인자를 바라보게 됩니다.
만일 불안하다면 어떻게 하시나요. 이 질문의 답은,
불안의 시절에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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