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누군가 내게 이렇게 질문했다.
아무리 고민하고 찾아도 회개할만한 구석을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를 회개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오늘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향해 ‘너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말한다. (행2:36)
이 사실을 근거로 이천년동안 유대인들은 열방과 교회의?조롱과 핍박을 당해야만 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들에 의해 십자가를 지시고 억울하게 죽임당한?것으로 그친다면
그의 죽음과 부활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
질문은 ‘예수님을 누가 죽였나?’ 가 아니라,
‘예수님은 누굴 위해서,?왜 죽으셔야 했는가?’ 이다.
그 분의 죽음이 아니면 처리할 수 없는 문제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에 대한?책임은
유대인에게 돌릴 책임이 아니라?내 몫이다.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교회가, 각 성도가 하나님의 마음에서 떠나 있다면 회개는 당연한 것이다.
죄의 고백을 회개라 가르치지만, 회개는 보다 큰 것이며 구체적인 것이다.
세례요한이?광야에게 회개를 외칠 때(눅 3:7-17)
무리들은?말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회개를 통해 부으시는 하나님의 큰 위로가 있다.
회개하면, 천국이 임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회개는 바로 축복이다.
내가 어떠한 죄인인지 몰랐을 때, 회개는 부담스런 형식이었지만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를 비추셨을 때 회개는 내게 축복이 되었다.
회개하면, 천국이 임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회개는 바로 축복이다.
내가 어떠한 죄인인지 몰랐을 때, 회개는 부담스런 형식이었지만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를 비추셨을 때 회개는 내게 축복이 되었다.
회개는 어떤?사건에?국한되는 문제를 너머,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며, 내 존재의 문제이다.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며, 내 존재의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