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머리가 지끈거려서
해야 할 일들을 미루었다.
작은 통증으로도 중요하다고
여긴 어떤 것도 손댈 수 없게 된다.
아프거나 연약함을 만날 때
나는 비로소 한계에 대한 고민을 한다.
한계를 만나지 못하면
나는 자신의 바벨을 만드는 벽돌을
모으기 시작한다.
한계를 만나지 못하면
타인의 아픔과 감정을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지 못하면 공감하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하면 설득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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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내 안에 보배가 있다면
그래서 그 보배를 전해야 한다면
이 과정은 당연한 수순이다.
이해나 공감없이 설득은 힘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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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에 몸이 회복되어
금요 성령집회에 참석했다.
소명이가 국가와 민족을 위한
기도를 선포했다.
리허설까지 꽤 오랜 시간을 교회에서 머물렀지만
소명이의 컨디션도 괜찮았다.
여러 측면 중 하나이지만, 들러리가 아니라
자신의 몫을 부여한다는 것은 중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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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기간을 거치며 교회 공동체의 아픔과
고민을 많이 목격했다. 그중 한 목회자의
눈물은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다.
목회자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청년부가 공중분해되었기에 자신을 자책했다.
예배는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곧 각 지체들이
어떻게 모일 것인가는 고민해야 한다.
다윗은 주님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고
자신의 마음을 시편을 통해 올려 드리지만 (시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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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목적이 아니면 모일 이유가 없다고
선을 그어 버리면 우리는 과정을 잃게 된다.
사랑. 사랑은 시작이 필요하고 과정이 필요하다.
이건 사랑이 아니라고, 호감을 느끼는 이를
꾸짖게 되면 사랑은 멈추게 된다.
그들에게 모일 수 있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이유에서 모이든, 모이는 목적이
주님과 상관없다고 할지라도
다만,
주님이 우리의 이기적인 목적까지 전복시키길
기도한다. 주님이 우리 주님이시니. (시16:2)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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