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위기 속에서 기도한다.
오늘 큰 전쟁을 앞두고
이스라엘도 같은 기도를 드렸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만나게 된다.
하나님의 마음이 변하셨는가?
만일 하나님이 믿지 못할 분이시라면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멈춰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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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전장에 가져오기로 결정했다.
언약궤는 곧 여호와의 임재 상징이기에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낼 거라 믿었다.
‘여호와여 우리를 위하여 싸우소서.’
하지만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일방적인 살육과 함께
블레셋의 승리로 전쟁은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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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궤는 블레셋에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은 죽임을 당했다. (삼상4:11)
말 그대로 최악의 결과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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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식을 들을 때
엘리는 목이 부러져 죽게 되었고
비느하스의 아내도 죽어가며 ‘이가봇’
곧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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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이 떠났는가?
하나님이 블레셋에 볼모로 붙잡혔는가?
사람들이 언약궤를 자신의 목적에
가져다 사용한 것일 뿐,
하나님의 영광은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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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멸시한 엘리 가문에 대한
심판을 이행했을 뿐 아니라
블레셋이 가져간 여호와의 궤는
홀로 하나님의 전쟁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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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셋이 모시던 신 다곤은
여호와의 궤 앞에 머리와 두 손목이
끊어져 내렸고,
그곳 사람들은 다 망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지 못하게 할지라
그의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 (삼상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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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궤를 감당하지 못했던 블레셋은
암소 수레에 언약궤를 실어
벧세메스로 보냈다.
막 태어난 송아지를 두고
암소는가고 싶지 않은 길을
무언가에 이끌린 것처럼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길을 갔다.
이 모든 일은 우연히 당한 것이
아님을 증명했다. (삼상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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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세메스에 도착한 언약궤를 보고
그곳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본 까닭에
그 지역에 오만 칠십 명이 죽게 되었다. (삼상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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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 가르기가 아니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삼상2:30)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백성들이 슬피 울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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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우리를 위해 싸우소서.
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들에게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주님, 나를 도우소서.
라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하나님께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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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이길 목적으로 하나님을 상대했던 이스라엘
자신의 승리를 기념할 전리품으로 대했던 블레셋
하나님을 쉽게 생각했던 벧세메스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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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이 정답을 알고 있었다.
‘우상을 너희 중에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 향하라.’ (삼상7:3)
종일 금식하고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 하였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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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기도했지만
블레셋은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
순종했지만 위기 상황을 만나게 된다.
하늘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씀이 있었지만
광야의 시험으로 내몰리는 예수님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에 순종했지만
감옥에서 매질당하는 바울과 실라
하지만 그 이후
어떤 시간이 만들어질지 모른다.
오늘의 사건이 전부인 것처럼
반응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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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바에서의 회개 이후
만난 승리가 에벤에셀이다.
이렇게 하면 전쟁이 승리하고,
이렇게 하면 전쟁에 패배하고
이런 문제의 차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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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봇과 에벤에셀 사이에서
나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의지할 대상, 하나님의 궤를
상대에게 빼앗겼다고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간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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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 것이 가득한 세상이기에
가치들은 촉각적인 것에 수렴하게 되고
우리의 영적 지각은 점차 무력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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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나는
위기 속에, 평범한 하루 속에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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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삼상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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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시24: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