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크하지 않은 날

노크하지 않은 날

. 6분 소요

이른 아침, 운전을 하고 강서로 향합니다.
오늘은 탈북청소년 학교인 여명학교에서 졸업사진을 찍기로 한 날입니다.
2005년 무렵부터였으니, 벌써 스무 해가 넘었습니다.
봉천동 시절에 시작된 인연이 명동을 지나 이곳 강서까지 이어졌습니다.
여명학교에 가면 '명숙 누나'라고 부르는 교장 선생님 방에
먼저 노크를 하고 반가운 인사를 나누곤 했습니다.
누나는 매년 나를 보고 반가워했지만,
졸업사진 찍는 날인 줄은 까맣게 잊고 있곤 했습니다.
하루도 아무 일 없는 날이 없는 학교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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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사진찍는 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빌려 입을 옷을 찾아다니던 모습이 참 누나다웠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노크를 하지 않았습니다.
뉴스와 메일로 전해 듣는 학교의 사정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명학교는 이십 년 넘게 교실을 찾아 옮겨 다녔습니다.
2019년에는 은평구로 옮기려던 계획이 주민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그해 졸업사진을 찍으러 갔던 날,
점심을 먹으며 누나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를 위해서는 울거나 절대로 무릎 꿇지 않아. …
필요하다면 몇 백 번이라도 울거나, 무릎을 꿇을 수 있어.
왜냐하면 나를 위한 게 아니라 우리 아이들을 위한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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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23년, 문을 닫은 초등학교 건물을
기적처럼 빌려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그동안 좁은 실내에서 탁구를 치며 놀던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넓은 운동장이 생겼습니다.
그해 졸업사진을 찍던 날, 아이들이 땀 흘리며 뛰노는 소리가 참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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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곳은 처음부터 기한이 정해진 자리였고,
그 기한은 내년 2월입니다.
올여름 교육청과 통일부, 한 기업이 이 부지에
새 학교를 짓기로 협약을 맺으면서
이십 년의 숙원이 풀리는 듯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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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9월 주민설명회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반대하는 주민들은 처음에 들었던 임시 사용과 다르고,
충분한 설명과 동의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아파트에는 반대 현수막이 걸렸고,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현수막이 없는 쪽으로 다니라고 일러둔다고 합니다.
시의회에 올라가야 할 안건은 아직 제출되지 못했고,
내년 상반기로 미뤄질 거라는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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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한 아이가 누나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문장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우릴 귀하게 생각해 주셔서 고마워요."
누나는 그 편지를 읽고 무척 속상해했습니다.
고맙다는 말 앞에 차마 쓰지 못한 말,
'남들은 우릴 천대하는데'가 읽혔기 때문입니다.
현수막 앞을 지나는 아이들도 그 말을 다시 읽고 있을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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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설명회 자리에서 누나는 또다시 무릎을 꿇었습니다.
20여 년 전, 『요셉일기』에 누나의 이야기를 실으려 했을 때,
누나는 사진을 혼자 간직하고 싶다며 사양했습니다.
자신의 섬김이 아이들에게 공명심으로 보일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드러나는 것을 그렇게 마다하던 사람이,
이제는 기사 사진 속에서 주민들 앞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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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기도해 온 제목이고
개인의 사욕을 구하는 것도 아닌데, 생각보다 응답이 더딥니다.
삼 년 전 넓은 운동장을 보고 돌아온 날에도 일기에 같은 질문을 적었습니다.
'기도는 어떻게 응답되는 것일까?'
아이들의 졸업 사진을 찍을 때마다
마음으로 드린 기도가 인연의 시간만큼 쌓였는데,
질문도 그만큼 쌓여갑니다..
내가 보지 못하는 영역에서 기도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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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졸업사진을 찍던 날, 누나가 지나가듯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라는 것은 없어.
다만 얼마나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문제인가, 그 차이만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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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신문 인터뷰에서 누나는 한국 교회에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않도록 기도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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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아 너희는 낙심하지 말고 선을 행하라'(살후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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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선한 일이 금방 열매 맺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낙심할 만한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낙심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누나는 반대하는 주민들을 원망하지 않겠다고,
정의보다 사랑을 보여 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말 앞에서, 더딘 응답을 서운해하던 내 기도가 조금 부끄러워집니다.
그래도 들려오는 소식이 모두 무거운 것만은 아닙니다.
학교 앞에 꽃과 간식을 놓고 가는 이웃들이 있고,
스물일곱 개 단체가 함께 서명을 모았습니다.
"우리 선생님들 지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며 두 손을 모으는 학생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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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주님은 이 더딘 시간을 통해,
흩어져 있던 우리의 마음과 관심을 한자리로 모으고 계신 건 아닐까요?
오늘 노크하지 않은 그 방문을,
언젠가 새 학교에서 다시 반갑게 두드릴 날을 기다립니다.
그날까지 함께 기도해요. 낙심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이들의 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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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풍경 #16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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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학교 #졸업사진 #기도의응답

1: 2026.11.04 16:39 / 2: 2026.11.04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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